을지연습이 한창이던 17일 낮 1시 반께 정부과천청사 내 방송통신위원회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최성준 위원장은 이날 방송문화진흥회 신임 이사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연장자인 고영주 이사 포함 9명의 이사와 1명의 감사가 임명장을 받았다. 방문진은 MBC를 관리감독하는 MBC의 대주주로 MBC 사장을 결정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서열로만 보면 방문진 이사와 감사를 3년마다 임명하는 권한을 방통위가 갖고 있으니 방통위가 위다.

최성준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선임 과정에서 상임위원들 간 여러 차례 협의와 고민이 있었다”며 “결과적으로 예정된 일정(8월8일)이 지났는데, 이러한 과정을 겪은 것은 여러 국민들께서 여러분들에게 준 업무가 소중하다는 뜻이 반영된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국회에서도 방문진에 대해 ‘MBC에 대한 관리감독을 철저히 해 달라’는 요구를 여러 차례 했다”며 방문진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날 최성준 위원장은 예정에 없던 비공개 간담회를 열었다. 방통위에서는 기자들에게 나가줄 것을 요청했다. “애초에 비공개라는 이야기는 없었다. 방통위와 공영방송 이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비공개로 할 이유가 뭐가 있나”고 따져 물었으나, 최성준 위원장은 “업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개인의 생활이라든지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다. 나중에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면 다시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회의실 밖에는 개나리색 점퍼를 입은 직원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을지연습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최성준 위원장이 을지연습 시간을 늦추면서까지 비공개 간담회를 진행한 이유는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실제 회의실에서는 여러 차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덕담과 박수만 오간 것은 아니었다. 방통위 관계자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고삼석 상임위원은 “협의는 전혀 없었다”며 “축하 못하겠다”고 말했다.

13일 의결 한 시간 전에야 정부여당 추천 쪽이 쥐고 있던 명단을 확인했다는 게 야당 추천 상임위원들의 증언이다. 이들은 △공영방송 이사 3연임 금지 △정파 나눠먹기 지양 △적임자 선임 등 3대 기준을 제시하며 의결을 세 차례나 거부했다. 그러나 말짱 도루묵이었다. 최성준 위원장, 허원제 부위원장, 이기주 상임위원은 KBS 이사회를 7대 4로, MBC 방문진을 6대 3으로 나눠 온 관행을 또다시 힘으로 관철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방통위는 노동조합(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KBS노동조합)이 공개적으로 반대한 차기환 방문진 이사를 KBS 이사로 대통령에게 추천했다. 차 이사는 세월호 유가족을 폄훼하는 일간베스트 글을 퍼 날라 파문을 일으켰으나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조사위원이 됐다. ‘극우 스피커’이자 ‘박원순 저격수’로 불린다. 프로그램과 뉴스에 개입하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이인호 이사장도 연임에 성공했다.

방통위는 MBC 방문진에도 문제인사를 수두룩 내리 꽂았다. 공안검사 출신인 고영주씨가 이사가 된 것이 대표적이다. 그는 세월호 유족을 ‘떼쓰는 사람들’에 비유해 파문을 일으켰으나 세월호 특조위 조사위원이 됐다. 특히 그는 ‘애국진영’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정수장학회 장학생 출신으로 ‘친박’으로 분류할 수 있는 김원배 이사(전 목원대 총장)도 연임에 성공했고, 김광동 이사는 무려 ‘3연임’에 성공했다.

문제인사를 한 명도 막아내지 못한 김재홍 고삼석 상임위원은 의결 직후 기자회견을 자청해 사과했다. 공영방송 노동조합과 언론운동단체들은 성명을 내고 방통위를 비판했다. 방통위가 결정을 번복할 확률은 없다. 그러나 임명장 수여식에서조차 ‘뒤끝’이 나오는 이유는 문제적 인사가 예상보다 많기 때문이다. 일례로 방문진 이사로 임명된 고영주 김광동 권혁철은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라는 애국단체의 임원이다.

후폭풍은 17일 회의에도 이어졌다. 고삼석 위원은 “우리가 요구한 인사 요구와 원칙을 왜 그렇게 강하게 거부했는지 알 것 같다. 이번 인사는 공영방송에 대한 최소한의 철학도 찾아볼 수 없는 ‘묻지마’ 인사로 향후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분들은 하나같이 이념논쟁을 통해 사회 통합과 국민 화합을 저해했다. 사회적 약자들에 대못질을 했다. 적절하지 못한 인사라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김재홍 위원 또한 “간절히 요구했고 노력했지만 아무런 변화를 못준 것에 무력감을 느낀다”며 “(과거와 달리) 우리(3기 방통위)만 인선 기준과 원칙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일이 반복되면 정말 발전이 없다. (…) 어떤 사람을 내리 꽂던 간에 공영방송은 정책 중립성을 지켜줘야 한다. 그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아무런 하지 못하고 표결을 통과해 두고두고 회한을 풀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정부여당 추천 이기주 상임위원은 “한 달 여 동안 같은 주장을 하셨는데 두 분 위원님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맞받아쳤다. 이기주 위원은 “우리는 이번에도 방문진법에 따라 거기서 정한 자격기준에 따라 했다. 과거에는 인선 기준 원칙을 발표했다고 하지만 이번이 과거와 다르게 했다는 것은 없다고 본다”며 “충분한 협의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수결에 따른 일방적 결정은 아니라고 본다”고 했다.

최성준 위원장은 한술 더 떠 ‘경고’했다. 그는 “(야당 추천 위원들은) 언론을 통해서 어떠한 사람들이 인사의 물망에 나온다고 얘기가 나오자 거기에서부터 ‘(특정)인사의 연임, 정파 나누기 식으로 안 된다’는 등의 원칙을 내세우기 시작하셨다”며 “제가 보기에는 (두 위원이 제시한) 인사의 원칙은 특정인을 지정해서 그 사람에 대한 것을 인선의 기준과 원칙이라고 포장해서 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 의심도 든다”고 말했다.

소수파가 잘못을 면피할 요량으로 연기하는 걸까, 다수파가 거짓말을 하는 걸까. 제3기 방통위에서 가장 중요한 의결과 평가는 최성준 위원장의 경고로 끝이 났다. 이제 남은 것은 최성준 위원장을 향한 경고뿐이다. 남은 임기 내내, 그리고 임기가 끝난 뒤에도 ‘공영방송을 망친 주범’이라는 꼬릿말이 붙을 것이다. 싸구려 정치판이 돼 버린 방통위, 최시중 이경재 전임 위원장의 전철을 밟고 있는 그가 안타까울 뿐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