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박래부의 직전 직함은 ‘한국언론재단 이사장’이다. 그는 지난 17일 퇴임했다. 지금은 그냥 ‘언론인’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이 ‘현재형 직함’은, N극을 가리키는 나침반 바늘처럼, 시간의 자장 안으로 빨려들고 마는 ‘기억의 직함’이다. 과거 ‘기자’였다는 뜻이고, 현재 ‘백수’라는 뜻이다. (한국사회에서 매체를 떠나 계속 기자로 사는 삶은 척박하기만 하다.) 그는 <한국일보>에서 29년 기자 생활을 했고, 딱 열 달 하고 열이레를 한국언론재단에 몸담았다. 문화부 기자로, 논설위원으로 긴 시간 필명을 날렸던 그가 짧은 시간 동안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는 떠밀렸으나, 마침내 스스로 물러났다.

퇴임하던 날 오후, 그의 집무실을 찾았다. ‘고별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였다. 연예/스포츠 저널리즘에 맞춤한 ‘형식’에 그는 쑥스러워했다. 공로상 수상이나 명예의 전당 헌정 마냥, 받는 자에겐 쓸쓸한 자족감을, 주는 자에겐 씁쓸한 안도감을 남기는 그런 통과의례를 치르기에도, 그나마 좋은 ‘기억’이 없는 듯도 했다. 출구를 빠져나왔지만 다음 입구를 찾지 못한 것도 같았고, 그렇다고 (정치계 입문 같은) 성공하는 언론인의 생애주기적 경로를 모색할 위인도 아니었다. 나는 아직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육것의 재료를 앞에 둔 요리사처럼 난감하여, 그와의 만남을 글로 옮기지 못하고 오래 조몰락거렸다. 하루하루 해는 짧아지고, 새 이사장도 정해졌다.

그의 집무실에 들어섰을 때, 이명박 정부의 국정지표인 ‘선진일류국가’ 액자가 벽에 걸린 채 입구 쪽을 데면데면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출근할 때마다 그 액자를 마주대했을 것이고, 퇴근할 때마다 등졌을 것이다. 그와 액자 사이는 내내 불편했을 터였다. 액자가 아니더라도 그 자리는 처음부터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언론재단 이사장 자리는 늘 정권의 ‘의지’가 반영된 자리였다. 그는 ‘잃어버린 10년’을 단숨에 벌충하겠다는 세력이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 물러나는 정권의 알심이 미쳐 그 자리에 왔다. (나는 몇 달 전 사석에서 그의 임명을 ‘알박기’라고 규정했고, 그는 내 말에 선하게 웃었다. 국회에서 ‘낙하산’이라는 공격을 받고도 “그렇게 볼 수 있다”고 답했다.)

앞이 빤히 내다보이는 선택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모험’을 각오하고 왔다”고 했다. 늘그막 그의 모험정신은 지난 20년 동안 한국사회가 다져온 민주주의가 최소한 절차적으로는 작동할 거라는 ‘기대’와, 언론재단이 언론의 다양성과 저널리즘의 향상, 국민의 미디어 권리 신장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의지’에 터하고 있었다고 했다. 젊어서 언론운동을 했고(그는 한국일보 노조위원장 출신이다), 언론인으로서 정파적 이해와 분명하게 선을 그어왔다고 자부하기에 언론인으로서 마지막을 언론행정·정책과 가까운 데서 마치고 싶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그는 기성 언론과 기자의 기득권에 비우호적이었던 지난 정권의 언론정책 ‘방향’에 동의하는 드문 언론인이었다. 그 기조를 지켜가기 위해서라도 3년 임기를 채우는 건 기본이자 당위였다.

그러나 “그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다”고 했다. 새 정권은 집권하자마자 자신의 낙하산을 투하하기 위한 노골적인 사퇴 압력을 가해왔다. 같은 신문사 출신 후배인 문화부 차관이 총대를 맸지만, 그럴 때에도 법이 정한 규정을 넘어설 수는 없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들의 ‘준법’은 저열했고, 법의 그물망은 그들의 속악함을 걸러내기에는 너무 성겼다. “나가달라”는 압력은 개인을 욕보이는 방식으로 작동했으나, 그것은 국가로서 대외적 체면조차 스스로 내던지는 방식이기도 했다. 세계신문협회 총회 참석과 중국 동포언론사 지원방문 같은, 한 국가 언론지원기구 책임자로서의 국외출장마저 그들은 번번이 불허했다.

비록 험한 꼴을 겪고 있었지만, 아주 의지가지없지는 않았다. 동병상련도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사퇴 압력은 누구랄 것도 없이, 지난 정권 때 임명된 기관장들 모두에게 들어왔다. 정연주 당시 KBS 사장은 훨씬 폭압적인 꼴을 당하고도 버티고 있었다. 언론재단 사태를 이명박 정권의 언론장악 기도의 연장선으로 보는 언론운동단체들의 시선도 그런대로 뒷심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내부에서 들이대는 칼날 앞에서는 이조차 아무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다. 언론재단 구성원들은 외부의 위협이 내부를 단결시킨다는, 역사적으로 축적되고 검증된 만고의 경험칙과 정반대 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것은 트로이의 목마처럼 그에게 치명적이었다.

정권은 언론재단의 밥그릇을, 아니 정확하게는 밥그릇과 연결되어 있는 줄을 슬쩍 건드렸다. 언론재단의 2대 재원인 정부광고 대행권과 프레스센터 운영권을 거둬들이겠다는 신호가 왔다. 유관기관 통폐합이라는 고전적인 시그널도 들어왔다. 신호는 기관과 기관, 조직과 조직 사이에 오가지 않았고, 국정원 직원 개인과 언론재단 간부 개인 사이에 ‘카더라’ 통신선을 타고 오갔다. 그것은 소식도 정보도 아니었다. 풍문이었다. 간헐적이면서도 주기적으로 들려온 풍문에 노조도 간부들도 ‘공포’라는 조건반사를 일으켰다. 정권은 파블로프 박사였고, 풍문은 새된 종소리였다. 그들은 저항하지 않았고, 반대하지 않았으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저 신호의 요구대로 대상을 물어뜯었다.

8월 들어 시작된 내부의 퇴진 요구에 언론인 박래부는 다른 언론인 출신 이사 세 명과 함께 맞섰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들이 끝까지 맞설 각오가 되어 있지는 않다고 봤다. 그럴 각오는 있었는지 몰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목표까지는 없다고 봤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의 전술이 그처럼 합리적 이성과 상식 위에 구성될 수는 없었다. 그런 싸움은 처음부터 비대칭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에겐 그때 얘기를 꺼내는 게 힘들어 보였다. “노조 간부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처음엔 순리적으로 얘기가 이어지다가도 갑자기 ‘우리는 생존권이다’로 되돌아가곤 했다.” “언론의 타락을 질타하는 지식인 집단인 줄 알았는데, 그들 스스로는 타락하고 말고 할 것도 없더라.” 그는 겨우 몇마디 했다.

그는 마침내 이사 세 명과 동반 사퇴하기로 결정했다. 내부의 퇴진 요구가 불거진 지 한 달쯤 지나서였다. “그 집요함과 가당찮음에 넌더리가 났다”고 했다. 하지만 백기투항의 모양새까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적어도 퇴임 시기는 스스로 선택했다. 다른 두 언론지원기구 대표들이 물러나는 10월말로 잡았다. 두 달 가까운 기간 동안 국정감사도 치르고, 내부비리 특감도 벌였다. 하지만 내부는 고요하기만 했다. 외부도 마찬가지였다. 정부광고 대행권과 프레스센터 운영권을 둘러싼 통신선은 더는 가동되지 않았고, 풍문도 들려오지 않았다. 언론지원기구 통폐합 논의도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았다. 다만 네 명의 빈자리에 누가 올 거라는 풍문만 간헐적으로 들려왔으나, 그것이 그가 치른 열 달 하고 열이레 싸움의 본질이었다.

언론재단 이사장으로서 마지막 날, 그는 언론재단의 앞날을 근심했다. 언론재단에 들어와서 부대끼다 보니 언론재단이 얼마나 취약한 구조인지 알게 됐다고 했다. 정권이 재원을 쥐고 재단을 쥐락펴락하고 있지만, 재단을 법정기구화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언론지원기구가 그나마의 독립성마저 잃으면 언론통제 창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언론재단을 ‘신이 내린 직장’이라고 보는 외부 시선이 바뀌지 않는 한 언론지원기구로서 언론계나 다른 언론단체로부터 고립되는 역설적 상황을 맞을 것이라고 걱정하기도 했다. 어느 경우든 언론재단의 존재이유가 사라지는 것임은 분명했다. 이사장 공모제를 도입하면 부족한대로 ‘낙하산 논란’의 악순환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지 않겠느냐는 얘기도 했다.

언론인으로 돌아가는 날, 그는 언론계의 남루한 살풍경을 개탄했다. 기자들 간에 갈수록 동료의식이 사라지고 소속사의 이해에 따라 글이 엇갈리고 맞부딪치는 세태를 자사이기주의에 함몰돼 기자정신을 잃어가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고도 기자들은 염치를 차리기는커녕 되레 뻔뻔해졌다고 했다. 같은 신문사 후배인 문화부 차관이 정권 쪽 사람의 낙하산 자리를 마련하려는 모리배 노릇을 서슴지 않은 것도 그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기자정신의 실종은, 저널리즘의 타락으로 이어지고, 민주주의의 훼손으로 귀결되는 것임을 그는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은 셈이다.

‘기억의 직함’만 남게 되는 날, 그와 세 명의 이사들은 퇴임식조차 생략했다. 안에서는 해주겠다고 했지만, 임원들 모두 그 제안을 내쳤다. “경우에도 안 맞고, 할 얘기도 없지만, 무엇보다 그런 통과의례로 부채감을 덜어주고 싶지 않았다. 나쁜 기억과 상처를 안고 가는 게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한동안 전업주부로 살면서 도서관에 다닐 거라고 했다. 책을 쓸 것이고, 언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무거운 책도 써보리라고 했다. 기회가 닿으면 진보적 언론인들을 크게 묶는 네트워크를 만드는 일을 거들고 언론인 1인 1책 쓰기 운동을 벌이고 싶다고도 했다. 그것은 달라진 정치환경과 매체환경에 맞서 저널리즘을 복원하기 위한 그 나름의 기획이기도 했다.

그와 나눈 인터뷰가 그에겐 언론재단 이사장으로서 마지막 공식 일정이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짧은 해가 뉘엿해질 무렵, 그는 다시 언론인으로 돌아가는 세 명의 이사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그와 나눈 대화의 풀이 수굿해지기를 기다리는 며칠 사이, 그는 이제 막 나선 출구 앞에서 새로운 입구를 찾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언론인으로서 상처를 붙들고 치열한 ‘기억투쟁’에 벌써 들어섰을 것임은 분명했다. ‘언론인’의 현재시제는 어떻게 얻어지는지 보여주겠노라고, 언론재단 이사장에서 물러나던 그날 유별나게 까칠하고 가파른 선택으로 이미 예고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