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전 오늘은, 바로 며칠 전까지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YS정권의 고위관리들이 경제 ‘펀더멘털(fundamentals: 실질적인 조건들)’은 괜찮다고 항변하다 벼랑 끝에 몰려,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겠다고 발표한 날이다. 사실상 ‘국가부도’나 다름없는 위기를 인정한 날이다.

▲ 11월 21일자 경향신문 21면.
당시와 지금의 상황을 비교하면, 유사한 점도 많고 다른 점도 있다.

우선 11년 전과 다른 점은 위기에 대한 판단의 시기와 인식의 정도다. 11년 전에는 많은 외국 언론과 전문가들이 한국의 외환위기 도래를 예고하고 경고하는데도, 구제금융신청 계획 발표 며칠 전까지도 족벌언론을 포함한 거의 모든 언론이 ‘펀더멘털이 괜찮다’는 정부 관리들의 주장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다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언론이 경제를 심각한 위기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만 일부 국내외 언론이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부터 ‘9월 위기’를 경고했는데도 조선, 중앙, 동아 등 족벌언론들은 애써 외면하는 듯한 보도태도를 보였다. 돌이켜보면, 9월 위기설은 그대로 현실화된 셈이다.

요새, 경제위기 상황을 족집게처럼 예측했던 다음 아고라의 ‘미네르바’씨가 정부 탄압을 견디다 못해(?) 절필을 선언한 것이 화제다.

11년 전은 요즘처럼 사이버 공간을 통한 소통이 활발하지 못하던 때라, 상황은 다소 달랐지만, 그 때도 ‘미네르바’처럼 외환위기를 경고한 사람이 없지 않았다. 기자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1997년 말 외환위기 발생 훨씬 전부터 위기를 경고한 거의 유일한 언론인이 김영호 당시 세계일보 논설위원(현 자유기고가, 언론개혁시민연대 상임대표)이었다. 한국일보에서 1980년 해직된 뒤 모 국내 재벌 계열사에서 잠깐 근무하며 실물경제의 흐름까지 파악한 것으로 보이는 김 대표는 세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바 있다. 그는 11년 전의 '미네르바'였던 셈이다.

김 대표는 지금도 활발한 기고활동과 시민운동을 통해 경제위기의 근본 원인과 이 위기가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져올 가공할 피해에 대해 목청을 높인다.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족벌언론의 보도태도

11년 전과 비교할 때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것은 조선, 중앙, 동아 등 이른바 족벌신문들의 보도태도다. 자신들만이 나라와 나라경제를 생각하는 것인 양 떠들어대면서도 정작 위기가 닥치거나 닥칠 조짐이 현저히 나타났는데도 불구하고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원인 분석은 소홀히 하거나 눈을 감는 듯한 태도는 그 엄청난 사태를 겪고도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다.

최근 들어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 두 족벌신문이 강만수 경제팀의 교체를 주장하면서 이명박 정부의 위기관리능력 부재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비판이 진정성과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이미 국정수행 과정에서 총체적 문제점을 드러낸 이명박 대통령더러 물러가고 새 판을 짜거나, 여야 모두가 참여하는 거국내각을 구성하자고 할 법도 한데 아직 거기까지는 안 간다.

왜 그럴까?
기자가 보기에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생존을 독자와 국민과 국가의 그것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이해는 된다. 자신들의 생존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신문은 위기다. 오래 전부터 위기 속에서 간신히 버텨왔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도 예외는 아니다. 날로 떨어져가는 독자와 부수는 말할 것도 없고 전체 매출의 90% 정도를 차지하는 광고수입도 경기침체에 따라 급감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뾰족한 수단이 없는 것이다. 지상파 TV 방송, 종합편성채널(케이블) 방송과 보도전문채널을 포함하는 방송에 진출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거의 유일한 돌파구로 보이는데, 이에 관해 2MB 정부와 한나라당 정권이 칼자루를 쥐고 있기 때문에, 진퇴양난의 형국에 처한 꼴이다.

국민들 중 잘사는 1% 계층만을 위하는 ‘강부자 내각’으로 표현되는 2MB 정권의 실체가 드러난 데다 위기관리 능력 부재까지 겹친 상황에서 비판을 안할 수는 없고, 비판을 제대로 한다면 이명박 대통령 더러 ‘물러나라’고 해야 할 판인데, 이는 이명박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려 그동안 방송에 진출하기 위해 2MB 정권에 들인 ‘공든 탑이 무너지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의 딜레마

아무튼, 조선, 중앙 등은 진퇴양난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신문을 팔아먹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2MB 정권이 완전히 실패로 끝났을 때 2MB 정권의 탄생에 ‘혁혁한 공을 세운’ 자신들에게 화살이 날아 올 것에 대비해, 그렇지 않았다는 ‘알리바이(현장부재 증명)’도 만들어둬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11년 전 외환위기 사태 때와 비교할 수 없는 경제위기의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이며, 이 위기가 가난한 서민들과 주식과 펀드 투자자들의 삶을 얼마나 처참하게 만들지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혹은 예상되는 그대로 보도하면 2MB 정권의 눈에 나게 될 것을 걱정하는 것은 아닐까?

경제위기와 관련, 족벌언론을 비롯한 우리 언론은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우리 언론은 1997년 외환위기와 다가온 경제위기의 공범인가, 주범인가?

이와 관련해, 언론사유화저지 및 미디어 공공성 확대를 위한 사회행동(약칭 미디어행동)은 20일(목) 11년 전의 상황을 생각하며 ‘위기의 경제, 언론도 공범이 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경향신문사 강당에서 토론회를 열었다. 발제자, 지정토론자들과 참석자들 중에는 언론이 경제위기의 ‘공범’이 아니라 ‘주범’이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고, 우리 족벌언론에게 위기의 본질과 구조를 제대로 분석할 의지와 능력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문제있다는 취지의 지적도 있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족벌언론들의 보도태도를 보면 여전히 자신들의 생존을 먼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11년 외환위기 때는 우리 족벌언론들이 그런 태도로 상황을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번에도 통할까?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보도하면, 이명박 대통령을 물러나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몇 년 동안 공을 들여 온, 본격적인 방송진출 꿈이 날아 갈 것이 뻔하고, 이래저래 족벌언론들도 고민이 말이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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