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팎에서 지적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심사숙고해서 결정하겠습니다.” 굉장히 형식적이지만 이 말 한마디면 취재에 매달리지 않을 수 있었다. 행사장에서 오찬장까지 50미터를 옆에 달라붙어 왱왱거리지도 않았을 터다. 잔칫날 불편한 질문을 던지고 싶은 기자는 없다. 기자 입장에서 초장에 이 말을 들었다면 한 시간 동안 뻗치기를 하며 1500원짜리 빵쪼가리를 먹지 않고 3만원짜리 공짜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석우 시청자미디어재단 이사장은 끝내 말 한마디를 아꼈다.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지하 그랜드홀에서는 시청자미디어재단 창립기념식이 열렸다. 이석우 이사장을 비롯한 재단 임직원들은 최성준 방송통신위원장, 허원제 부위원장, 김재홍 고삼석 상임위원을 맞아들였다. 유승희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 조대현 KBS 사장도 왔다. “애정 어린 관심과 지원, 지도편달을 부탁드린다”(이석우 인사말) “재단이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 미디어허브 되길 바란다”(최성준 축사) “재단이 출범하는데 나름대로 산파 역할 했다고 자부한다”(유승희 축사)는 잔칫날에 어울릴 법한 말들이 이어졌다.

시청자미디어재단은 전국 7개(내년 개관할 울산센터 포함) 시청자미디어센터를 총괄하는 방통위 산하기관이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유학기제와 미디어교육을 기획·운영하고, 장애인방송과 시청자참여프로그램 제작도 지원하는 조직이다. 소외계층 방송 접근권을 높이는 활동도 하고 방송 및 방송광고시장 모니터링도 한다. 2000년 방송법에 ‘시청자 권익 보호’가 명시되면서 2005년 부산을 시작으로 미디어센터가 생겼고, 지난해 국회는 방송법을 개정해 시청자미디어센터의 법적 근거를 마련해줬다.

▲ 이석우 시청자미디어재단 이사장 (사진=방송통신위원회)

이곳의 초대 이사장인 이석우씨는 기자 출신이다. 연합뉴스, 세계일보에서 일했다. 평화방송에서는 앵커와 보도국장을 지냈다. 이후 그는 자유언론인으로 활동했는데 트위터나 종합편성채널을 통해 야당을 저격하고 박근혜 대통령을 칭송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YTN 시청자들은 좌편향이고 SBS는 좌편향이라는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2014년 국무총리실에 들어가 공보실장과 비서실장을 지냈다. 그의 이력과 과거 발언을 두고 ‘낙하산’ 논란과 ‘부적절’ 지적이 나왔다. 그러나 방통위는 5월 내부 반대에도 이석우씨를 이사장에 임명했다. 그는 연간 예산 240억원을 굴리는 조직의 수장이자 3년 간 총 3억3300만원을 받는 고위직이 됐다.

이석우 이사장은 방통위에 출석하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과거 발언은 “자유언론인 시절 일시적인 시기에 했던 강한 표현”이라며 사과 아닌 사과를 했다. 그는 과한 표현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 “편을 확실히 갈라야 하는 종편식 저널리즘과 특수한 방송환경 때문”이라고 애꿎은 환경 탓을 했다. 그러나 ‘지금도 과거와 같은 생각과 철학을 갖고 있느냐’는 기자들 질문에는 끝내 답변하지 않았다. 표현이 다소 지나치긴 했으나 그의 과거 발언에는 평소 자신의 소신과 철학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는 “업무수행에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출범하자마자 업무수행에 차질을 빚었다. 창립기념식에는 재단 ‘살림꾼’인 경영기획실장(1급 공무원급)이 없었다. 일정대로라면 지난달 30일 이석우 이사장은 최종 후보 3인 중 한 명을 선택해 인사권을 행사해야 했으나, 그는 선택을 미뤘다. 경영기획실장 자리에 최수영 전 청와대 대변인실 선임행정관(새누리당 전 수석부대변인)이 지원해 ‘청와대 낙하산’ 논란이 일었기 때문이다. 최수영 전 행정관은 강원일보를 거쳐 한나라당 부대변인, 새누리당 수석부대변인으로 활동한 인사다. 2012년 대선 때는 박근혜 후보 공보위원으로 활동했고, 이후 청와대에 입성한 인사다.

▲ 시청자미디어재단 창립기념식에서 열린 CI제막식. 왼쪽부터 조준희 YTN 대표, 하동근 PP협의회 회장, 윤두현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 회장, 고삼석 방통위 상임위원, 김재홍 방통위 상임위원, 송현기 대표(시청자대표), 이석우 이사장, 최성준 방통위원장, 유승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허원제 방통위 부위원장, 조대현 KBS 사장, 곽성문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 김명룡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 원장. (사진=방송통신위원회.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미디어스는 창립기념식 본행사 직후 이석우 이사장에게 ‘경영기획실장 두고 청와대 낙하산 논란이 있다. 최수영 전 행정관이 최종후보 3인에 올랐나’라고 여러 차례 물었으나 그는 답변을 거부했다. ‘계속 여쭤보는 데 한 마디라도 해 달라’는 말에도 묵묵부답이었다. “오늘은 그런 자리가 아니다. 나중에 별도로 이야기하자. 담당자와 이야기하라”고만 말했다. 옆에 있던 최성준 방통위원장은 기자에게 “재단 출범하는 축제날인데 나중에 별도로 하라”며 이석우 이사장을 거들었다. 시청자미디어재단 기획정책부 권오상 부장은 이사장이 최종후보 3인 명단을 보고받았는지, 최수영 전 행정관이 후보에 포함됐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만난 방통위 임필교 시청자지원팀장은 “이석우 이사장이 최종후보 3인을 보고 받은 것은 맞다”면서도 최수영 전 행정관 포함 여부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임필교 팀장은 “김재홍 고삼석 두 상임위원이 비토해서 (이석우 이사장이) 인사를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방통위 김재홍 상임위원은 “(최 전 행정관이) 3인에 포함된 것으로 안다”며 “방통위가 재단 내부 인사에 개입할 수는 없으나 여러 가지 문제로 인사를 보류했거나 전면 재검토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재단 관계자는 “만약 3배수에 최수영씨가 없다면 이사장이 ‘없다’고 말하면 될 문제”라며 “재단 내부도 답답한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석우 이사장은 VIP 오찬자리가 끝나고 나서야 인터뷰에 응했다. 오찬이 끝나기 전까지, 재단 직원들이 오찬장소에 접근하는 것을 물리적으로 막아섰다. 인터뷰를 진행한 동안에도 재단 직원 다섯이 이사장을 수행하며 기자의 접근을 제지하긴 했으나 이석우 이사장은 “아직 심사 중”이라며 “저한테는 아직 (보고가) 안 올라왔다”고 말했다. 그는 ‘최수영 전 행정관이 올라와도 뽑지 않을 것이냐’는 질문에 “봐야죠”라고만 말했다. 그는 ‘인사가 늦어지고 있다’는 지적에 “어떤 조직이든 인사를 하다 보면 빨리 끝날 수도 있고 늦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