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참 독특한 정치인이다. 웬만한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최대한 좋게 말하면 그렇다. 냉정할 것도 없이 그냥 말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위기를 체감하지 못하는 체질의 정치인이라는 게 사실에 좀 더 가까울 것이다.

▲ 박근혜 대통령이 12일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보건소에서 자택격리자와 통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 방문 일정을 취소할 때에만 해도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 “아, 드디어 대통령이 메르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뭔가를 해보려는구나!”라는 게 선량한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이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방미 일정을 취소하고 메르스 사태와 관련해 한 일이라곤 어딘가를 방문하는 것 뿐이었다. 12일에는 수원시 장안구 보건소와 경기도 메르스 종합관리대책본부, 경기도 메르스 콜센터를 방문했고 일요일인 14일에는 동대문 상가와 서울대병원 메르스 격리병동에 들렀다.

▲ 박근혜 대통령이 14일 메르스 영향으로 해외관광객 감소와 소비위축 등 어려움을 겪는 국내 최대 규모 패션산업집적지인 동대문 상점가를 방문해 몽골 관광객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분명히 말하지만 대통령이 청와대 집무실에 있는 것보다는 어디든 현장을 방문하는 게 낫기는 하다. 그런데 현장을 방문한 그림이 지금 상황에 영 어울리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이 어떤 절박한 마음을 갖고 현장의 관계자들을 격려하는 모습이라기 보다는 어디 구경 온 사람 같아 보이는 게 사실이다. 심지어 동대문 상가를 방문한 자리에서는 시민들의 환호에 답하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 박근혜 대통령이 14일 서울대병원 메르스 치료 격리병동을 방문, 의료진과 통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청와대는 이 날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오늘 방문한 밀리오레에는 주말을 맞아 쇼핑에 나선 시민들이 대통령의 깜짝 방문에 놀라며 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들었고, ‘진짜 박근혜 대통령 맞아? 대박!!’, ‘대통령 파이팅, 힘내세요’ 등을 외치며 몰려드는 탓에 근접 경호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경호에 애를 먹기도…” 청와대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와있는 대변인 서면브리핑 내용의 일부이다. ‘일부’라고 하지만 나머지 부분도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메르스 사태 때문에 체감경기가 위축되고 자영업자들이 실제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서 메르스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겠다는 그야말로 절박한 의지를 보여주고 절망의 끝에 서있는 자영업자들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 그런데 공개된 동대문 상가 방문이 분위기는 오히려 대통령이 자영업자들로부터 희망을 얻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대통령의 표정도 즐겁다.

대통령의 즐거운 기분은 단 하루에 그쳤으리라는 생각이다. 15일 리얼미터는 지난 8~12일 실시한 여론조사(유권자 2500명 대상. 95% 신뢰수준에서 표본오차 ±2.0%포인트)결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정수행 긍정평가가 전주 대비 5.7%포인트 하락한 34.6%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는 대통령이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 이후 정치적 위기에 몰렸던 2월 2주차 이후 4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치다. 국정수행 부정평가는 7.5%포인트 상승한 60.8%였다. 이 정도의 수치면 박근혜 대통령이 자랑하는 ‘콘크리트 지지층’이 다시 무너지는 수순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간 언론은 박근혜 대통령이 메르스 퇴치의 전면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전면에 나서라는 것은 바이러스의 전파력이나 감염으로 인한 치사율과는 관계없이, 대통령이 중심이 된 ‘파격적 조치’를 통해 선제적으로 메르스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런데 방역 당국은 매 주말마다 “이번 주가 고비”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 통상적인 대응을 지속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지고 있다. 일선의 관계자들은 그래도 메르스 사태 초기에 비하면 정부의 대응이 합리적 수준까지는 됐다고 평가하고 있으나 국민의 눈에는 메르스 감염 의심환자에 대해 “아니면 책임질 거냐”라고 대답한 그 수준에서 크게 나아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이런데도 박근혜 대통령은 15일 국민을 답답하게 하는 발언을 이어갔다.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메르스에 대한 철저한 방역과 종식이 가장 큰 당면 과제지만, 메르스 사태가 끼칠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고 조속히 극복하는 일도 중요하다”면서 “국민들의 일상생활과 기업들의 경영활동이 하루속히 정상으로 돌아와야겠다. 휴업 중인 학교도 예방조치를 철저히 하고, 정상적인 학사 일정에 임해주기 바란다”고 발언한 것이다. 이외에도 박근혜 대통령은 온 국민이 국가적으로 전력투구 하고 있고 정부가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으므로 조만간 메르스 사태가 종식될 것이라고 발언하기도 했고 ‘전문가 중심의 즉각대응팀’을 상시기구화 시킬 것이라는 계획도 내놨다. 어느 부분에서도 앞서 강조한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고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생각과는 달리 이날 오전에도 58세 남성이 사망해 메르스 사망자는 총 16명이 됐고 간호사가 메르스에 감염된 건양대병원은 일시 부분폐쇄됐다.

물론 전문가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말하는 것과 같이 메르스 사태에 대한 대응에 대해 정부가 어느 정도 대응 체계를 잡았고 지역사회감염 등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곧 진정 국면에 접어들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이 그렇게 전망하는 것과 실제로 국가 지도자가 국민을 안심시키려는 노력을 반복하는 것은 성격이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이 판국에 대통령이 할 일은 “정상으로 돌아오라”고 남일처럼 말하는 게 아니라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환경을 실제로 조성하는 것이다. 정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보여주기’라도 잘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현장으로 향한 것은 그런 의미로 이해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판단이 틀렸다. 여기서는 오히려 일본의 사례를 참고할 필요도 있다.

2011년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났을때 일본인들은 공포에 질렸다. 사고의 규모를 은폐하기에만 급급한 도쿄전력 때문에 일본 정부는 응용물리학을 전공한 간 나오토 총리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초기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2009년 중의원에서 308석을 얻었던 민주당 정권은 2012년 중의원 선거에서 57석을 간신히 방어했다. 민주당 정권으로서는 그야말로 정치적 치명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치명상을 입는 과정에서도 민주당 정권 인사 중 유일하게 당시 긍정적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 있다. 에다노 유키오 내각관방장관이 그 주인공인데, 그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태의 원인이 된 대지진 이후 100시간 가까이 잠을 자지 않으며 쉴새없이 브리핑에 등장해 화제가 됐다. 내각관방장관은 내각의 입장을 공표하는 대변인 정도의 역할을 겸하기 때문에 세계가 주목하는 전무후무한 대재앙 앞에서 쉴 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의 이런 모습에 일본인들은 “에다노 자라”라는 메시지를 연속으로 SNS에 게시하는 등 응원을 보냈다. 이후 일본 네티즌들은 에다노 유키오’의 ‘에다’에 동사형 어미인 ‘루(る)’를 붙여 ‘에다루’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는데, “잠을 오랫동안 자지 못했다” 또는 “상사를 잘못만나 고생한다”라는 의미로 통용되기까지 했다.

▲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당시 잠을 자지 못한 에다노 유키오 내각관방장관
▲ 지난해 새정치민주연합 중앙당사를 방문한 일보 민주당 에다노 유키오 간사장(왼쪽). (사진=연합뉴스)

메르스 사태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태에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 교훈을 얻어야 할 필요도 있다. 즉, 대통령을 잠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거다. 잠도 자지 못하고 메르스 사태 수습에 분주한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 냉랭해진 국민 여론도 돌아올지 모르지 않는가? 황당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정상으로 돌아와달라'는 대통령의 비정상적인 호소에 정말 이런 비정상적인 방법밖에 생각나지 않는 것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부디, 대통령이 빠른 시일 내에 ‘해법’을 찾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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