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대와 스탠퍼드를 동시에 합격했다는 이른바 ‘천재소녀’ 기사를 쓴 미주중앙일보 객원기자가 ‘오보’를 인정했다. 앞서 워싱턴 중앙일보는 지난해 12월19일자 기사를 통해 김정욱 넥슨 전무의 딸 정윤양(토마스 제퍼슨 과학고 3학년)이 하버드대에서 조기입학을 제안받았고, 올해 6월2일자 기사에서는 김양이 스탠퍼드에서도 입학을 제안받았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두 대학은 복수의 언론을 통해 합격증은 ‘위조’라고 밝혔다. 김양의 아버지는 12일 언론에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 큰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검증 없이 베끼기에 몰두하고, 김양과 그 가족을 ‘모셨던’ 언론은 다시 한 번 객쩍은 ‘기레기’가 됐다.

복기해보자. 워싱턴 중앙일보 발 오보는 여러 언론을 통해 확산됐다. 언론은 검증을 않고 이 사실을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중앙일간지의 경우, 대부분 미국 특파원들이 작성했다. 두 대학을 확인 취재해 합격증이 위조됐다는 사실을 최초 보도한 경향신문 또한 지난 5일자 기사를 통해 “미국 유학 중인 한국 여고생이 4년 전액 장학생으로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에 동시에 진학하게 됐다”며 김양의 스토리를 자세히 보도했다. CBS는 김양과 라디오 인터뷰를 해 내보내기도 했다. 누리꾼의 문제제기와 경향신문의 확인 보도 전까지 오보는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중앙일보 2015년 6월4일자 24면

10일 경향신문의 검증 보도로 김양의 합격 소식은 ‘오보’로 확인됐다. 논란으로 이어지자 워싱턴 중앙일보는 이날 사과문을 게재, “기사 작성 당시 김정윤 양 가족이 제시한 합격증서와 해당 대학교수들과 주고 받은 이메일 등 20여 페이지 분량의 문건을 근거로 기사 작성을 했으나, 해당 대학과 교수 등에게 사실 확인을 끝까지 하지 않은 우를 범해 사실과 다른 보도를 하게 됐다”며 “특히 합격 진위 여부가 논란이 됐을 때 대학에 사실 확인 등 신속히 대처하지 못한 점 또한 깊이 반성한다”고 밝혔다. 기사를 쓴 기자는 오보임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위조 합격증이 누구에 의해, 어떤 과정을 거쳐 언론에 올랐는지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다만 합격증은 위조됐고, 김양의 가족들 또한 뒤통수를 맞은 것만은 분명하다. 김양의 아버지인 김정욱 넥슨 전무와 함께 기자생활을 했고 평소 친분이 있던 워싱턴 중앙일보 객원기자는 별 다른 의심과 확인 없이 ‘이야깃거리’를 기사로 썼고, 한국 언론은 베끼기에 급급했다. 급기야 검증의 마지노선이라고 할 수 있는 방송뉴스와 신문지면에도 오보가 실렸다.

경향신문은 12일자 8면에 사과문을 내고 “김양 가족의 주장이 처음 알려졌을 때 정확한 확인 없이 ‘한인 수학 천재소녀, 하버드·스탠퍼드대 번갈아 다닌다’(6월5일자 23면 보도)라고 사실과 다른 내용을 전했다”며 “이 보도로 독자 여러분에게 혼란을 일으킨 점에 대해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오보를 낸 손제민 특파원은 취재 후기에서 “미국의 유명 대학 입학을 둘러싼 이번 소동은 한국사회에 뿌리깊은 학벌주의와 그것이 몸에 밴 젊은 학생들과 부모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확인 없이 확대재생산하는 언론에 울리는 경종”이라고 썼다.

▲경향신문 2015년 6월12일자 8면

이번 오보 문제는 한국 언론의 고질병을 그대로 드러낸다. 워싱턴 중앙일보 기자가 ‘믿을 만한 취재원’의 이야기를 확인을 않고 쓴 것도 문제이지만 천재소녀, 학벌주의, 국위선양 같은 코드로 독자를 끌어당기기 위해 추가 검증 없이 받아쓴 언론이 더 큰 문제다. 언론은 ‘정론지’를 자처하면서도 스스로 가십지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실시간검색어나 이슈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이 낳은 결과다. 여기에 동참했던 언론 대다수는 설명 없이 기사를 삭제했고, 오보 소식을 ‘알고보니’ 류의 기사로 처리하고 있다.

성공회대 최진봉 교수(신문방송학과)는 <미디어스>와 통화에서 “센세이션한 기사는 충분히 과장될 가능성이 있는데도, 그런 부분을 고려하지 않고 앞 다퉈 보도한 것이 문제”라며 “‘다른 언론에 나오면 문제가 없는 사실’인양 검증을 않고 속보경쟁을 하는 한국 언론의 구조적 문제”라고 지적했다. “인터넷신문도 주류언론도 트래픽 때문에 위험할 수 있는 기사를 받아 쓰는 악순환에 빠졌다”는 설명이다.

최진봉 교수는 “지금 언론은 자율적으로 속보경쟁과 오보를 막으려는 자정노력을 할 수 없는 구조고, 저널리즘의 가치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며 “언론은 오보를 삭제하면 ‘익스큐즈’ 된다는 식이지만 독자는 사실이 아닌 정보를 받았고 (이런 일이 쌓일수록) 언론에 대한 신뢰도는 떨어진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제는 속보보다 질로 언론을 평가하는 분위기와 제도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김양의 아버지인 김정욱 넥슨 전무는 언론에 “모든 것이 다 제 잘못이고 제 책임”이라며 “그동안 아이가 얼마나 아프고 힘든 상태였는지 제대로 살피지 못한 점, 오히려 아빠인 제가 아이의 아픔을 부추기고 더 크게 만든 점 마음속 깊이 반성한다”고 알렸다. 그는 “상황 파악이 끝나지 않아 일일이 설명드리지 못하는 점 용서해 달라”고 전하면서 “아이와 가족이 더 이상의 상처없이 치유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보도와 영상 촬영을 자제해주실 것을 언론인 분들께 간곡히 호소드린다”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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