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라는 ‘플랫폼’은 사실상 사라진지 오래다. 시청자의 90% 이상은 케이블과 IPTV 같은 유료방송을 통해 지상파 실시간 방송을 본다. 실시간 방송을 위협하고 있는 VOD(Video On Demand)도 마찬가지다. 지상파만의 OTT(Over The Top)서비스 ‘푹(pooq)’이 있지만 시청자 대부분은 디지털케이블, IPTV, 모바일IPTV 같은 경로로 VOD를 본다.

이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얘기지만, ‘케이블’ 프로그램 <삼시세끼>와 지상파 드라마 <프로듀사>가 치열한 시청률 경쟁을 하는 모습은 지상파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상파의 방송광고 점유율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지상파가 인기VOD 가격을 1000원에서 1500원으로 올리고, 모바일IPTV에 ‘푹’을 제공하면서 사전에 계약한 금액의 2배 가까운 금액을 요구한 일은 지상파가 이미 ‘위기’에 대한 상황 인식을 끝냈다는 걸 분명히 보여준다.

지상파, 유료방송에서 자발적으로 빠지다

논란이 뜨거워지고 있는 ‘푹’ 갈등을 보자. 2013년 지상파는 이동통신사와 2년짜리 계약을 맺고 모바일IPTV에 ‘플랫폼 인 플랫폼(PIP)’방식으로 입점했다. 이동통신사와 지상파는 최초 17개월 동안 총액 250억원, 이후 CPS(가입자당 대가) 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계약했다. 그런데 최근 지상파는 부가세 포함 3900원을 달라고 통보했다. 기존 1900원(부가세 제외)의 2배 수준이다.

지상파는 “이동통신사가 지상파 콘텐츠로 가입자를 모으고 이익을 얻는 만큼 제값을 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동통신사는 “모바일IPTV는 사실상 공짜 부가서비스고, 이용률은 30~40% 수준으로 가격인상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한다. 협상은 결렬됐고 푹은 6월1일자로 모바일IPTV에서 빠졌다. 모바일IPTV 기존 가입자만 11월까지 지상파 콘텐츠를 볼 수 있다.

지상파의 ‘돈’ 욕심에 이동통신사가 곤욕스러워하는 모양새다. 누가 옳건 그르건, 사업자들 싸움에 모바일IPTV 가입자만 뒤통수를 맞은 격이다. 그러나 주목할 대결구도는 있다. 현재, 한국에서 지상파는 유일하게 이동통신사업자와 협상을 할 수 있는 방송사업자다. 유료방송에 기대면 확실히 당장엔 수익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빨리 1/N 사업자가 된다는 건 지상파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파가 선공을 가했다. OTT는 사실상 정부가 개입할 수 없는 유일한 방송 서비스다.

그래서 지상파가 ‘푼돈(!)’에 들고 일어난 상황을 예민하게 볼 필요가 있다. 이동통신사의 수익 구조에서 ‘푹’ 요금인상분은 사실상 푼돈이다. 이동통신사는 지금도 고가 요금제 가입자에게 모바일IPTV를 공짜로 나눠준다. 익명을 요구한 IPTV업계 관계자는 “이동통신사가 방송을 부가서비스로 만들어 시장을 어지럽힌 건 사실”이라고까지 말했다. 이용자 지불장벽은 높지만, 이통사 지불능력은 충분하다는 얘기다.

한 번에 2배 넘는 가격을 부른 지상파의 믿는 구석이다. 이동통신사의 지불능력이 충분하다는 점은 감안해, 가격인상을 통보한 것이다. 푹 운영사인 콘텐츠연합플랫폼 관계자는 “이통사 수익도 늘어나는 만큼 이통사도 속으로는 웃고 있다”고 말했다. 협상이 최종결렬됐다고는 하나 비공식 협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한 IPTV 관계자는 “비디오 요금제를 내놓은 LG유플러스가 먼저 지상파와 협상을 해 판을 깰 것 같다”고도 말했다.

유료방송 시장은 ‘후리다매’, 사업자만 웃는다

지상파는 철저히 전략적으로 판단했다. 지상파가 모바일IPTV에 PIP로 입점하고 잇따라 콘텐츠 가격을 인상하는 이유는, 당장 사정이 열악해서라기보다 언제든 ‘블랙아웃’을 시도해 이동통신사를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협상이 안 될 금액을 통보한게, 어쩌면 '블랙아웃'을 유도해 가입자에게 충격을 주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 한 IPTV 관계자는 “모바일IPTV에서 지상파 시청점유율은 50% 수준”이라고 전했다. 게다가 VOD는 박리다매가 아닌 ‘후리다매’ 상품이다.

이동통신사들이 ‘푹’ 가격인상에 반대하는 이유도 철저히 전략적 판단 때문이다. IPTV업계 관계자는 “이통사 입장은 지금은 수익을 창출할 시기가 아니라 이용자를 늘려야 할 때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동통신사는 이동통신 가입자의 10분의 1이 채 안 되는 모바일IPTV 가입자를 플랫폼에 더 유치해야 넷플릭스 한국 상륙 등 경쟁상황에 대비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가격을 올리기보단 공짜로 제공하더라도 가입자에게 '맛'을 들여야 할 때, 지상파가 '욕심'을 부린단 입장이다.

물론, VOD는 좀 다를 수 있다. 이동통신사가 모바일IPTV를 공짜로 제공하는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VOD 매출이 급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성장 전망 역시 높다. VOD는 서버 유지비 정도만 들어가고, 가격규제 또한 전무하기 때문에 이통사에게는 알짜배기 상품이다. 전체 비즈니스 차원에서 보면, 이통사는 이용자를 잡아둬야 부가서비스 매출을 극대화해 배보다 배꼽이 큰 상황을 계속 끌어갈 수 있다.

방송콘텐츠 ‘가격’을 결정하는 절대 기준은 없다. 재전송료에서 VOD 가격까지 모두가 다 협상의 산물이다. 방송법상 규제대상이 아닌 OTT는 말할 것도 없다. 데이터 무제한 시대, 어디서든 방송을 볼 수 있는 OTT 가격을 올리는 것은 플랫폼에게도 명분이 있고, 확실한 이득도 있다. 이동통신사는 푹이나 VOD가 팔릴 때마다 25~35%에 이르는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인다.

지상파는 그 동안 홀드백(무료화 시점)을 1주에서 3주로 늘렸고, 인기VOD 가격도 1000원에서 1500원으로 인상했다. VOD 시청이 늘어난 만큼 이동통신사의 수익도 그만큼 증가했다. 문제는 지상파발 물가인상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점이다. 정부가 개입할 수 없는 OTT와 VOD의 영역에서 지상파와 이동통신사는 모두 시청자와 가입자를 깔고 드러눕는 벼랑 끝 전술을 택해 버렸다.

바보 같은 지상파를 위한 유료방송 가이드라인

하지만 지상파의 유료방송 정책은 지상파 플랫폼의 장기적 생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VOD 수익은 방송광고에 비하면 세발의 피 수준이다. 당장 호주머니가 쪼그라든다고 시청자와 유료방송 가입자에게 푼돈을 받아 채워 넣는 방식으로는 지상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지상파와 유료방송 간 헤게모니 싸움의 결과는 언제나 요금인상과 수익배분율 조정뿐일 수밖에 없고, 이는 '직접 수신'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지상파에게 장기적으로 불리한 결과가 될 수 밖에 없다.

시청률 하락이 ‘거역할 수 없는 추세’라면 지상파의 전략은 지금과 달라야 한다. 이대로가면 유료방송 플랫폼의 하위 파트너가 될 게 빤하다. 지상파가 취해야 할 전략은 유료방송 요금을 내려 VOD를 박리다매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 지상파DMB와 다채널서비스로 OTT와 VOD 수요를 일부 흡수하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유료 방송에 얹혀 돈을 나눠 갖으며 생존하는 방식이 아닌 유료 방송과 다른 진지를 구축해 가치를 높여야 한다.

지상파는 여전히 과신하고 있을지 모른다. 협상력이 높으니 당장엔 힘이 세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협상력이 높은들 의존도를 낮추지는 못한다. 지상파는 점점 더 단단히 유료방송에 종속되고 있다. DMB와 MMS를 활용해 방송광고 점유율을 유지하는 게 무료보편 플랫폼사업자이자 공영방송에게 올바른 생존방식이고 적합한 생존방식이지만 지상파는 그 생존의 룰을 스스로 깨고 자꾸 시장의 정글로 진입하고 있다.

시청률의 위기는 공공성의 위기와 구분된다. 지상파의 위기는 시청률 하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파라고 하는 플랫폼의 공공성이 상실되는 상황 그 자체에 있다. 그리고 지상파가 스스로 그 살싱의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늦지 않았다. 지상파 위기를 극복할 방법은 지상파의 공적 역할을 넓히는 데서 찾아야 한다. 지상파가 시장의 불량배도 아닐텐데, 자꾸 배 째라 드러눕는 천덕꾸러기여서는 곤란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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