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이야기. 그것도 비정규직이라는 쉽게 언급하기 어려운 주제를 다룬 웹툰이 인기를 끌고 심지어 로맨스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불문율을 깨 가며 드라마로까지 성공한 <미생>의 사례를 보면서 게임에는 비슷한 사례가 없을지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세컨드 라이프>나 <심즈>처럼 가상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재미는 게임으로 자주 등장한 적이 있고, <신입사원 토오루군>(1984)처럼 나름 회사생활을 기반으로 만든 게임도 있긴 하지만, <미생>의 흥행사례와 비교하기엔 조금 방향이 다른 게임들이다.

1984년 코나미에서 발매한 <신입사원 토오루군>의 플레이 영상. 한국에선 ‘석돌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어렸을 때 이 게임을 해본 사람들은 비틀즈의 <It’s been a hard day night> BGM을 이 게임으로 먼저 들었을 것이다.

바둑용어인 ‘미생’이 불안한 현실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원인은 한국사회의 불안도가 미생이란 말에 어울릴 정도로 증가했다는 점에도 존재한다. <미생>이 이야기한 불안감이 현실적이기에 사람들이 공감한 것이다. 그리고 그 불안감의 정서는 새로운 게임 콘텐츠의 등장으로도 나타났는데,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한 2015년 5월 기준 애플 앱스토어 무료게임부문 다운로드 1위 게임은 <내 꿈은 정규직>이다.

그리 복잡한 조작을 요구하지도 않고, 엄청나게 방대한 그래픽과 분량으로 무장한 고용량 고퀄리티 게임도 아니면서도 <내 꿈은 정규직>은 플레이어들로부터 취업과 직장생활에 관한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재미와 공감을 동시에 잡아 낸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고 많은 블로그와 리뷰에서 짚어냈지만 크게 꼽고 싶은 특징은 세 가지로, 그 중 첫 번째는 게임오버에 대한 독특한 해석이다.

1. 해고: 셀 수 없는 해고의 물결, 그러나 희망은 있다!

제목에서부터 정규직이 되기를 희망하는 정규직 아닌 이의 이야기를 담은 게임임을 알 수 있는 <내 꿈은 정규직> 은 인턴에서 시작해서 사장까지 올라가는 취업과 승진을 중심으로 한 게임이다. 하지만 승진은 표면적인 목표일 뿐, 실제 게임을 해 보면 게임의 목표는 따로 있다. 바로 해고를 피하는 것이다.

처음 게임을 시작한 플레이어는 우선 면접 탈락부터 겪게 된다. 인턴 면접부터 시작되는 갖가지 해고를 피하는 것만으로도 게임의 의미가 살아난다. 회사가 뜬금없이 망하기도 하고 일을 너무 다 받아왔더니 더 줄 일이 없다고 권고사직이 날아오기도 한다. 각각의 해고 사유는 해고를 겪을 때마다 발생 확률이 줄어들며, 이를 통해 캐릭터의 생존율은 성장한다.

▲별 일로 다 해고를 당한다. 해고 사유는 수십 가지이고 해고될 때마다 생존률이 올라간다. 일을 잘해도 해고, 못해도 해고다. 상심하지 말자.

이 방식은 <살아남아라! 개복치>라는 게임에서 가져온 것이다. <살아남아라! 개복치>는 플레이어가 개복치 새끼가 되어 먹이를 먹고 온갖 위험을 뚫으며 생존하는 게임인데, 이 게임의 묘미는 ‘돌연사’ 다. 개복치는 별별 이유로 죽는다. 너무 섬세해서 아침해가 밝다고 죽기도 하고, 해파리인 줄 알고 먹은 먹이가 비닐봉투여서 죽기도 한다. 각각의 돌연사는 발생할 때마다 발생확률이 줄어들기 때문에 죽을수록 다음번의 개복치는 죽을 확률이 낮아지면서 점점 생존율이 올라가는 것이 <살아남아라! 개복치>의 룰이다.

▲ <살아남아라! 개복치>의 사인 중 하나.

<살아남아라! 개복치>가 가진 재미의 핵심인 이 돌연사 룰은 게임이 가진 ‘게임오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통해 만들어 낸 양식이다. 기존 게임에서 게임오버는 분명 게임 속 서사가 완전히 끝남을 의미했다. 게임오버 상황에서 플레이어는 저장한 시점으로 다시 되돌아가거나 아니면 게임 서사를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했다. 그런데 <살아남아라! 개복치>는 게임오버가 다음 게임의 게임오버 확률에 영향을 주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게임오버가 사실은 게임오버가 아닌 것이다.

이와 동일한 논리로 만들어진 영화를 살펴보면 좀 더 이해가 쉽다. 2014년 개봉한 <엣지 오브 투모로우>다. 일본 라이트노벨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서 주인공 톰 크루즈는 죽을 때마다 다시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 살아나는데, 자신이 어느 시간에 왜 죽는지를 알고 살아나기 때문에 죽음의 위기를 피하는 법을 학습하게 되고, 이를 통해 조금씩 자신의 생존 시간을 늘려갈 수 있게 된다. 게임 용어로 이야기해보자면 경험치가 쌓여가는 것이다.

<살아남아라! 개복치>는 게이머의 경험치라는 부분을 게임 속에 넣어버림으로써 게임오버를 일종의 ‘레벨 업’으로 치환한 경우다. 별다른 노하우나 복잡한 컨트롤 숙지가 중요하지 않은 단순한 게임이지만, 게임오버와 이를 통한 경험 축적이 아예 게임 안에 구현되는 바람에 게이머는 게임오버를 통해 성장하는 자신의 캐릭터를 체험한다. 마찬가지로 <내 꿈은 정규직>에서도 권고사직, 자진퇴사 같은 게임오버는 사실 게임오버가 아니라 ‘슬픈 레벨업’이 된다. 어떤 이유로 한번 퇴직을 겪으면 다음 번 플레이에서는 동일 사유에 의한 퇴직률이 크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게임오버가 끝이 아닌 레벨업이 되면서 직장생활과 취업을 다루는 이 게임은 오묘한 분위기를 갖게 된다. 피할 수 없이 찾아오는 퇴직의 물결은 불안한 노동환경에 대한 풍자이자 스케치가 되고, 수많은 퇴직을 겪으면서도 다음번 플레이는 어쨌든 ‘오늘보다 나은 내일’로 여기게 되는 것은 희망과 용기의 메시지다. <개복치>에서 웃기는 돌연사였던 게임오버 레벨업 개념은 <정규직>에서는 웃픈 현실에 대한 관조와 희망이 된다.

2. 승진: 반드시 올라가야 하는 구조의 불안함

두 번째 특징은 바로 화면구성이다. <내 꿈은 정규직>의 게임화면은 시점을 바꾸거나 카메라워크를 보여주는 대신 고정된 하나의 사무실 장면을 사용하는데, 이 한 장의 화면이 회사생활의 많은 것을 보여준다.

▲ <내 꿈은 정규직> 게임 본화면. 플레이어가 입사한 사무실의 전경을 보여준다.

사무실은 맨 하단부터 위로 총 4단의 책상배치를 갖는데, 위쪽일수록 높은 직급이다. 아주 보수적인 조직구조가 아니면 요즘은 많이 줄어든 이와 같은 사무실 배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 담당자의 시선이다. 게임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시선을 전방, 화면 아래로 고정하고 있는데, 상급자는 하급자를 볼 수 있지만 하급자는 상급자를 볼 수 없는 구조다. 특히 맨 위쪽의 황금색으로 빛나는 사장 자리가 갖는 시야는 명백한 파놉티콘 묘사다.

모두를 볼 수 있지만 아무도 뒤돌아보지 못하는 사장의 자리가 권력의 중심이 되며, 거기서부터 시야의 범위를 기준으로 내려올수록 낮은 수준의 권력을 가진 직원들이 배치된 사무실의 형태는 플레이어가 다녀야 하는 회사가 얼마나 수직적이고 경직된 분위기인지를 보여주는 요소다.

고정된 수직적 구조의 사무실 안에서 플레이어는 퇴직에 퇴직을 거듭하며 승진확률을 올려 나간다. 승진의 과정은 게임 내의 시각적 변화로 나타나는데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올라가는 형태로 묘사된다. 이러한 배치는 게임 역사에서는 꽤나 오랜 역사를 가진 구성이다. 바로 <승경도> 놀이다.

조선 태종대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승경도>는 말단 벼슬부터 영의정까지 조선시대 관직의 주요 품계를 따라 승진해 올라가는 내용이 중심인 조선 보드게임으로, 말단 관리에서 시작해 가장 먼저 꼭대기에 올라가면 이기는 게임이다. <내 꿈은 정규직>이 보여주는 현대 회사조직의 도식과 <승경도>가 보여주는 조선시대 관료체계 도식이 갖는 유사점은 관료조직의 생존이 승진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요소다.

<내 꿈은 정규직>에서 매 턴마다 다가오는 승진심사는 실패할 경우 두 직급이 떨어지는 결과를 주는데, 차장이 탈락해서 대리가 되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승진실패가 배드 엔딩(bad ending)이 되는 묘한 경우가 존재해 플레이어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바로 계약직의 존재다. 계약직 상태에서 두 번의 승진누락을 겪게 되면 다음과 같은 엔딩을 보게 된다.

승진 실패가 결과적으로는 게임의 엔딩 중 하나를 불러오는 구조는 실제 직장인들에게 꽤나 격한 공감을 받는 요소다. 직장인은 제자리에 머무를 수 없고 계속 올라가는 방향을 바라봐야 한다는 현실은 게임 안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구현되어 있으며, 그러한 엔딩의 존재는 현실에서 비슷한 압박을 견디며 살아가는 많은 직장인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3. 디테일과 풍자: 살아있는 회사생활을 그려내는 양념들

<내 꿈은 정규직>의 세 번째 특징은 디테일이다. 이미 해당 게임을 리뷰한 다른 많은 글에서도 언급된 바 있지만 게임의 디테일은 상당한 수준이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계약직 2년이 되면 퇴사해야 하는 현실에 대한 묘사도 분명하고, 중간중간 발생하는 이벤트들의 내용을 보면 무릎을 탁 치고 갈 수준의 이야기가 많다.

▲게임 중간에 발생하는 임원들의 대화 이벤트. 직장인들이라면 누구나 정답을 알고 있지만 정답을 누르기가 씁쓸한 이벤트들이다. 실제로 승진에 영향을 준다.

주말출근에 대한 압박과 같은 일상적인 이벤트(?)뿐 아니라 열심히 월급을 모으는데 갑자기 학자금대출 이자를 갚아야 하는 상황이 오기도 하고, 피곤한 마음에 몰래 살짝 졸다가 성공하면 체력이 회복되고 실패하면 권고사직을 당하는 등 실제 회사생활에서 격하게 공감할 수 있는 일들이 가볍지만 회사생활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려져 있다. 여기에 위 그림의 세 번째 예시처럼 직장인들에게 씁쓸함을 불러일으켰던 몇 가지 시사 이슈까지도 포괄하면서 게임은 퇴사위협과 승진압박이라는 직장인이 처한 구조적 불안을 세밀한 디테일로 그려낼 수 있었다.

시대가 낳은 블랙 코미디: 그중 제일은 제목

<내 꿈은 정규직>은 해고와 승진이라는 벡터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인생의 방향타를 잡고 나아가야 하는 직장인들과, 그러한 직장인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은 취업준비생들의 모습을 그려낸 블랙코미디 게임이다. 귀엽고 경쾌한 그래픽과 쓴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많은 이벤트들은 천만 월급쟁이들의 ‘웃픈’ 현실을 정말 웃프게 경험케 해준다. 갑자기 나타나서 “돈 꿔 달라”는 상사의 부탁을 거절하면 승진확률이 떨어지는 걸 알면서도 정답을 누르지 못하는 슬픔은 웃프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하지만 게임이 가진 수많은 웃픈 상황 중에서도 가장 백미인 것은 게임의 제목이 가진 역설이다. <내 꿈은 정규직>이란 제목에는 안정된 고용에의 염원이 담겨 있지만, 게임 안에서는 정규직도 해고당한다. 이마저도 현실과 별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나는 가장 웃프다.


<Play the Game>

#01- 비욘드 어스, 인류는 어느 방향으로 진화해야 하는가

#02- MMORPG의 장르적 특성과 워크래프트의 세계관 그리고 WOW

#03- 게임 속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04- 게임에도 정당해산 따위는 없다

#05- 스타크래프트, 윙코맨더3...우주를 다룬 최고의 게임은?

#06- 상호작용의 매체, 게임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07- 나의 삼국지는 그렇지 않아!

#08- 맞고만 치던 당신, 설날 고스톱 스코어는 얼마?

#09- 괴물과 싸우기 위해 괴물이 되어가는 이야기, XCOM

#10- 새마을운동 게임으로 정신과 이념을 교육한다굽쇼?

#11- 시뮬레이션 게임의 개척자 <심시티>를 통해 본 게임의 재현력

#12- 캐쉬템의 문제, 게임 아이템은 소유 가능한 물건인가?

#13- 아이 위해 쓰여진 이야기 같은 게임, ‘LOOM’의 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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