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3일, 뉴욕 현대 미술관(MOMA) 별관(PS1)에서 사이먼 데니의 ‘혁신가의 딜레마’ 전시가 열렸다. 사이먼 데니는 뉴질랜드에서 태어나고, 현재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작가다. PS1의 소개에 따르면 전시 제목은 클레이튼의 경제 순환 이론서에서 발췌한 것이다. 혁신가의 딜레마란 선두에 선 기업들이 시장을 뒤흔드는 신기술을 발빠르게 선보이면 전락하게 된다는 설이다. 그리고 이 이론이 맞아 들어가는 걸 확인할수록, 우리는 점점 불안한 글로벌 세계에서 살게 된다는 것. 사이먼은 체제전복이든 새 휴대전화 모델의 출현이건 간에 변화는 무자비하고 급속하게 일어나야 한다는 이데올로기, 이 불안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가상한 노력에 형상을 부여하는 작업을 해 왔다고 한다.

▲ ⓒ사이먼 데니, 모마 PS1 (사진=Pablo Enriquez)

미술이라 하면 조각 하나, 그림 한 점을 떠올라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테지만 사이먼의 작업이라면 ‘무대 하나’ 혹은 ‘방 하나를 통째로’ 소개해야 할 것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기업 박람회나 산업 기술 엑스포에 온 듯하고, 그런 ‘분위기’가 그의 작업 일부이기도 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드문드문 한국어가 쓰여져 있고, 삼성 휴대전화도 보이고, 신라호텔에서 가져온 비누랑 샴푸가 액자 안에 놓여 있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미술관에서, 이 주목받는 젊은 작가는 어째서 ‘삼성’을 이야기 하는 걸까.

전시장에서 가장 눈길을 이끄는 작업은 <뉴 매니지먼트>, 마치 제단처럼 보이는 한 덩어리의 무대다.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의 어느 호텔을 재현한 세트라고 한다. 이건희가 삼성의 새로운 성장과 정신적 가치를 선포했다는 호텔, “아내랑 자식 빼고 다 바꾸자” 했던 그곳 말이다. 그 방을 조사하기 위해 작가는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고 한다. 최고 임원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작가는 어렵게 구한 사진과 비교해 꽃과 방 안에 있던 그림을 똑같이 만들었으며, 알 수 없는 부분은 작가의 상상으로 채워 완성했다. 게다가 삼성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라고 쓰인 현판까지 가져다 놓았다. (이것도 아마 작가가 재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 (사진=차재민)
▲ (사진=차재민)
▲ (사진=차재민)
▲ (사진=차재민)

한쪽에서는 삼성 에어컨 실외기가 후텁지근한 공기를 섞으며 느리게 돌아가고 있다. 실외기 표면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스마트한 변환기’ ‘그룹이 변화할 때 사회도 변할 수 있다’ ‘결점은 암과 같은 것’ ‘100%를 향해 정진하자’ ‘우리는 여전히 이류다, 우리는 변해야만 한다, 살아남기 위해’…. 또 다른 한쪽에는 포장을 뜯지 않은 갤럭시노트3가 <일류가 아니면 포기하라>는 이건희 신경영 철학서를 짓누르고 있다. 그리고 고개를 들면,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발간한 <나부터 변하자>라는 책이 멀끔한 액자 속에 박혀 있다. 이제 이쯤 되면 작가가 주는 힌트들이 조각 퍼즐 맞춰지듯 윤곽을 드러낸다. 작가는 이 세계를 아주 ‘심플’하게 재현해 놓고 우리에게 보라 한다. 그간 삼성에서 발간한 책과 사용했던 슬로건을 적절하게 배치함으로, 한편의 ‘스마트’한 코미디를 펼쳐 보이는 셈이다.

▲ ⓒ사이먼 데니, 모마 PS1 (사진=Pablo Enriquez)

이 전시의 절정은 1994년에서 2014년까지의 삼성 휴대전화 모델을 진열한 유리 박스가 아닐까 싶다. 얼핏 보기엔 어느 대리점에서나 볼 법한, 휴대전화 기종 변화를 설명하는 모형이다. 그런데 이 유리박스를 전시장에서 쳐다보고 있으면, 핸드폰 기종이 어떻게 변했는가 말고, 기종과 기종 사이가 도드라진다. 그 빈 공간으로 만인의 축적된 생활을 생각하게 된달까. 이를 테면, 피곤, 복통, 코피, 급하게 먹은 점심, 셀카 찍는 사람들, 깨진 액정 AS, 반도체, 또 하나의 가족 아니 또 하나의 약속 같은 것.

사람마다 떠올리는 게 다르겠지만, 이 전시는 압축된 생각이 스르륵 풀리는 경험을 하게끔 한다. 휴대전화의 의미가 무엇일까? 소통, 변화, 혁신을 의미하는가? 이런 생각에 빠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부디 질문의 시작이 ‘이 휴대전화 모형을 왜 전시장에 가져다 놓았을까’이었으면 한다) 반복하는 이야기지만, 옆에는 공회전하는 실외기가 있고, 이건희의 책이 있고, 또 연보라색 테이블보도 보인다. 작가는 이런 맥락과 분위기 속에 이 핸드폰 모형을 가져다 놓았다. 이게 기술 발전을 비판하는 건가요? 찬양하는 건가요? 삼성이 좋다는 건가요? 나쁘다는 건가요? 와 같은 질문은 작가에게 치욕일 것이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저 지금부터 풍자합니다, 이 부분을 비판합니다, 라는 신호를 생략하고 있으니까.

▲ (사진=차재민)

사이먼은 아트 넷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삼성은 누군가 의문을 제기할 만한 시행 관습을 가지고 있지만, 놀라운 성과, 흥미로운 추진력과 문화적 힘을 가진 것도 사실입니다. 좋든 나쁘든 간에 이것은 문화에 대단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화를 선택할 수 없고, 문화가 우리를 선택합니다. 삼성은 저를 선택했고, 저는 삼성의 팬입니다. 저는 삼성 물건을 사용하지요. 그런데 거기에는 분명 삼성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떤 문화적 역사 같은 게 있을 거예요. 이 세계에서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이야기죠.”

이 인터뷰를 읽으며, 사이먼 데니의 전시가 서울에서 열린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기술, 문화, 사회가 어떻게 엉켜있는지, ‘삼성’을 통해 말하려는 이 작가에게 한국만큼 강렬한 맥락과 분위기가 또 있을까. 항상 새로운 것을 요구하고 혁신적인 기술을 주장했다는 삼성의 CEO가 몇 달째 병원에 있다는 뉴스가 쏟아지는 곳. 그가 온전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는 이 나라에서, <뉴 매니지먼트> 라는 작업은 어쩌면 생의 헛헛함을 자아내는 감정적인 작업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사이먼은, 디지털 기술과 휴대전화를 너무너무 좋아했던 한 사람으로서, 감회에 초연한 태도로 작업을 만들기에, 아마도 이런 풍부한 해석을 환영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서 한국은 그의 작업의 종착역으로 좋을 법하다. 지금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 같다. 전시장에 놓인 물건들은 철과 플라스틱으로 만든 껍데기일 뿐이요, 우리를 짓누르는 건 불안이라는 유령의 목소리이리라.

*사이먼 데니의 전시에는 미국에서 체포된 킴닷컴, 테드 강연과 관련한 작업도 있습니다. 이 지면에서는 삼성과 관련한 작업만 언급했습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