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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파 이득 위해 '물타기'로 부추긴 냉소주의, '나쁜' 정치'모두의 잘못' 떠들며 '반정치적' 여론 만들어낸 언론
김민하 기자 | 승인 2015.04.29 22:18

'냉소주의'는 한국사회를 설명하는데 동원되는 가장 유력한 키워드 중 하나다. 한국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냉소주의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일상생활에서조차 우리는 냉소주의적 표현들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오늘날 이 냉소주의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공간은 정치적 공간이다. 이에 대한 가장 표준적인 판본의 언명은 “정치인들은 다 똑같다”는 것이다. 이 말은 정치인들이 겉으로는 어떤 그럴듯한 말을 하더라도 속으로는 더러운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진리(?)를 가리킨다. ‘남민전’의 전사로 유명한 시인 김남주는 “사람들은 맨날 밖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적었다. 안치환이 노래로 만들어 더 유명해진 이 싯귀는 정치에 대한 일반 여론의 냉소주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2012년 대통령 선거 국면의 ‘안철수 열풍’은 이러한 냉소주의가 정치적 요구로 변화하는 하나의 계기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여론조사 등을 되돌아보면 당시 안철수 교수가 정치인으로 변신하기를 바라는 열망은 크지 않았다. 오히려 ‘깨끗하고 순수한’ 안철수 교수가 정치권에 투신해 평범한 정치인들처럼 오염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더 높았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안철수 교수를 지지하는 대중들은 그가 대통령이 됐으면 하는 여론을 형성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 이중적인 모습이야 말로 냉소주의가 구체적인 정치적 요구로 전화(轉化)하는 하나의 순간을 나타낸 것이라고 평가할만했다. 한국정치에서 이러한 현상은 종종 정치신인에 대한 무모한(?) 대중적 기대로 나타나곤 했다.

이러한 냉소주의의 ‘이면’은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에도 기여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조선왕조 600년 동안 우리는”으로 시작하는 명연설을 통해 정치개혁의 당위를 소리높여 외쳤다. ‘정치개혁’이란 썩어빠진 기성 정치권을 뒤엎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해 ‘없는 사람’도 당당하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이었다. 물론 이후 참여정부 5년에서 그러한 정치가 우리 사회에 착근하였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크지만 어쨌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했던 대중들을 추동했던 에너지가 ‘기성 정치권에 대한 거부’로 상징되는 일종의 냉소주의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물론 ‘노풍’으로 외화됐던 냉소주의와 ‘안철수 현상’의 그것을 동렬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비록 기성정치권에 대한 냉소주의가 작동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이의 정치적 결론은 노무현 당시 후보에 대한 강력한 조직적 지지기반 형성으로 귀결됐다. 안철수 의원의 경우는 이것보다는 한 발짝 더 깊은 냉소주의로 옮겨가 있다. ‘정치인들은 다 똑같은 존재’이지만 이들과는 다른 존재라고 공인된 정치 신인에게도 의심의 눈초리를 완전히 거두지 못한 상황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2012년 대선 당시 안철수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가졌던 ‘순수한 마음’, 즉 ‘안철수’라는 사람이 정치에 오염되지 않기를 바랐던 마음은 2002년 이후 10년 동안 우리 정치가 냉소주의의 영역으로 상당부분 더 침잠하게 됐음을 드러내는 하나의 지표이다. 순전히 정치권에서 작동하는 냉소주의만을 놓고 본다면 이 10년 동안 상황은 더 악화됐다.

2012년 대선 국면에서 ‘나는 꼼수다’가 위력을 발휘하였던 것도 이런 현상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나는 꼼수다’는 이명박 대통령을 ‘공적 책무를 사적 이득을 챙기기 위해 자기 좋을대로 이용하기만 하고 최대한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하는 비겁자’로 규명하면서 그 반대편에 있는 ‘공공선’을 상징하는 인물로 문재인 당시 후보를 상정했다. ‘나는 꼼수다’가 제기한 문제의 정치적 정당성이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러한 프레임이 당시에 먹혔고 일종의 대세를 형성했다는 사실은 정치권을 향한 대중의 냉소주의가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즉, ‘나는 꼼수다’는 많은 사람들이 은연중에 상정하고 있는 ‘나쁜 정치인’의 전형에 이명박 전 대통령을 위치시킴으로써 대중의 정치적 냉소주의를 ‘작동’하도록 만드는 방아쇠가 됐던 것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오늘날의 정치적 냉소주의는 또다른 판본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최근 ‘성완종 리스트’ 사건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개혁론’이 대표적이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남긴 ‘금품메모’에서 친박 실세들의 이름이 나왔고, 이것이 박근혜 대통령 대선자금에 대한 문제를 나타낸다는 것은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만큼의 상식적 추론이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과 여당은 이를 뒤집어서 오히려 ‘야당이 잘못한 사안’으로 ‘물타기’를 감행하고 있다.

   
▲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오후(현지시간) 브라질 상파울루 한 호텔에서 열린 K팝과 함께하는 한·브라질 패션쇼에서 양국 패션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이 과정에 동원된 사례는 성완종 전 회장이 기업을 운영하면서 광범위한 정치권 인사들을 대상으로 돈을 뿌려왔다거나 참여정부에서 두 차례나 특별사면을 받았다는 것 등이다. 최근에는 박상옥 대법관 임명 지연 문제까지 언급되면서 ‘9억원 받은 의혹을 받는 한명숙 전 총리와 3천만원 받은 의혹을 받는 이완구 전 총리’라는 구도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물타기’를 넘어서 정파적 이득을 위해 정치적 냉소주의를 부추기는 ‘나쁜 정치’의 대표적 사례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실제로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정치인들이 성완종 전 회장에게 금품로비를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보수언론이 군불을 때고 있는 것처럼 야당 의원들이 일종의 입법로비 등에 연루됐을 가능성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정치권의 부패를 보여주는 수많은 사건들과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자금 문제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국회의원은 수사를 받고 법적 책임을 지며 끝내 의원직을 상실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자금 문제는 정권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문제이며 ‘친박 핵심’으로 표현되는 권력의 심부가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는 문제이다. 이런 심각한 문제를 ‘우리 모두의 잘못’ 수준의 정치개혁론으로 눙치려고 하는 것은 우리 정치의 후진적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꼴불견에 불과하다.

이렇듯 ‘성완종 리스트’ 사건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대응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치적 냉소주의를 심화시키는데 역할을 하고 있다. 책임있는 정치인이라면 이러한 냉소적 에너지를 기성 정치권으로 흡수해 생산적인 에너지로 전환시키려 하겠지만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정확히 이 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유럽의 경우 정치적 냉소주의의 만발은 극우정당 등 급진적 정치세력에 대한 불안정한 지지로 이어져 전체 정치환경에 대한 악조건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즉,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성완종 리스트’ 사건을 무책임한 방식으로 감당하려 하고 있다.

그렇잖아도 부정적인 정치환경의 개선을 위해서는 국민들이 이러한 기득권의 전략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한다. ‘성완종 리스트’ 사건에는 실제로 야당이 연루됐을 가능성이 있으며 참여정부 시기의 특별사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의혹이 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물타기에 나선다고 해서 “역시 여당이나 야당이다 똑같다”고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진상을 쫓고 이에 기반한 판단을 내려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 문제들을 섬세하게 분리해서 사고할 수 있어야 하고 오히려 ‘반정치적’ 여론을 부추기는 ‘정치적’ 행위들에 속아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대중에게 이러한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것은 언론의 본래적 기능으로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성완종 리스트’ 사건을 다루는 보수언론들은 사실상 이런 기능 따위는 내팽개치고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정략적 행보에 충실히 발을 맞추거나 오히려 한술 더 떠 정파적 조언을 내놓는 모습까지 보였다. 검찰총장이 물러나고 대통령이 대국민사과를 해야 될 일이 언론의 맹활약 덕분에 함께 망하는 길로 향하는 이정표가 돼버렸다. 지금 상황에서는 이 언론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후회하는 날이 과연 올지도 의문스럽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언론환경의 가장 큰 비극이다. 그리고 이번 재보선 결과에 그 비극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김민하 기자  acidkis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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