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21분이 걸렸다. 국민안전처가 주관한 제 1회 <국민안전 다짐대회>가 끝나기까지는. 뒤에 박인용 장관 등 소위 VIP들이 행사장 밖에 있는 전시물을 시찰하는 시간이 있긴 했지만 메인 행사는 30분도 되지 않는 사이 끝나 버렸다. 사전신청이 돼 있지 않다며 “기자증 없어요? 없으시면 안 돼요”라고 매정하게 말하던 이 앞에서 머리를 긁적이다, 일반 초청객 자격으로 현장신청을 따로 하는 약간의 수고를 들인 것이 조금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어린이들이 '안전한 대한민국, 우리가 만들겠습니다'라는 머플러를 들고 있는 모습 (사진=미디어스)

세월호 참사 1주기인 4월 16일 오전 10시,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국민안전처의 제 1회 <국민안전 다짐대회>가 열렸다. 하필 참사 1주기에 엉뚱한 관변행사를 벌이느냐는 세간의 비판 속에서도, 국민안전처는 그대로 진행했다. 그러나 이날 참석한 장·차관급 귀빈들, 공무원들만 1000여명에 달할 만큼 행사는 성대했다. 이미 좌석이 다 차서 맨 뒤, 좌석 끄트머리 한 자리를 겨우 잡을 수 있었다.

국민안전처는 “대형사고가 다시 재발하지 않도록 예방과 대비에 철저를 기하고 유사 시 신속히 대응하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킨다는 정부의 약속과 다짐을 갖는 행사”라며 “이번 대회를 통해 대형 재난 사고를 예방하고 국민이 안전하고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입장을 전달할 예정”이라고 <국민안전 다짐대회> 취지를 소개한 바 있다.

행사는 짜인 대로 지루하게 흘러갔다. 국민의례 후 순국선열과 호국 영령, 사고로 숨진 해경, 군인, 경찰 등과 세월호 사고 희생자들을 위한 묵념이 이어졌다. 곧바로 <영상으로 보는 지난 1년 그리고 미래>라는 짧은 영상 클립 시청이 이어졌는데 영상만 봐서는 지난해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나라는 훨씬 더 안전한 사회가 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참사 한 달여 뒤인 지난해 5월 19일, 4월 16일을 국민 안전의 날로 제정하고 2015년을 안전혁신 원년의 해로 선포했다는 이야기와, 그간 국민안전처가 추진해 온 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내용이었으나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지난해는 특히 안전사고가 잦았다. 2월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 사고가 일어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전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던 세월호 참사가 이어졌다. 전남 장성 요양병원 화제, 경기도 판교 환풍구 붕괴, 전남 담양 펜션 화재 등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러나 영상에서는 마우나리조트 붕괴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짤막한 언급만 있을 뿐, △국가 안전관례체계 근본적 개편 △신속한 재난 현장 대응 체계 확립 △국민 참여를 통한 자율적 안전관리체계 구축 △지자체의 재난 역량 및 책임성 강화 △안전교육 강화 △해양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제도 강화 △특수재난분야 안전관리 강화 △<안전혁신 마스터플랜> 수립 등 자화자찬성 홍보만이 가득했다.

그나마 기대했던 ‘국민의 목소리’조차 캠페인 영상에 가까웠다. 사전 제작된 영상 속에서 주부, 노인, 건설 노동자, 아이는 입 모아 ‘마음 놓고 안전하게’ 다니고, 일하고, 뛰어놀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안전관리헌장>, 동원된 공무원들의 공허한 외침

당초 이완구 국무총리가 참석해 대회사를 낭독할 예정이었으나, 같은 시각 그는 안산 합동분향소에 방문했다가 유가족들로부터 조문을 ‘거부’당했다. 세월호 선체 인양과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안 폐기에 대한 소신을 밝혀달라는 유가족들의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날 전명선 4·16 가족협의회 대표는 “그동안 정부는 가족들이 원하는 대답을 단 한 차례도 해주지 않았다”며 “합동추모식이 열리는 오후 2시까지 시행령안과 인양에 대한 답변이 없을 경우 추모식을 무기한 연기하겠다. 오늘은 되돌아가시라”라고 말했고, 이완구 총리는 발걸음을 돌렸다.

▲ 박인용 국민안전처 장관이 이완구 국무총리를 대신해 대회사를 낭독하고 있는 모습 (사진=미디어스)

결국 이완구 총리를 대신해 박인용 국민안전처 장관이 대회사를 대독할 수밖에 없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세월호 사고 유가족 여러분, 그리고 내빈 여러분. 1년 전 오늘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세월호 참극에 온 국민이 큰 충격과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날 참사로 운명을 달리하신 분들의 명복을 빌며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 오신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못하는 가족을 기다리는 9분의 실종자 가족 여러분께도 참으로 안타깝고 송구스러운 말씀을 드립니다. 정부는 선체인양 문제를 비롯하여 세월호 사고의 수습과 아픔을 치유하는 데 유가족과 국민의 뜻을 받들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는 4월 16일을 영원히 기억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국민 안전의 날을 제정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을 온 국민의 이름으로 거듭거듭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이 자리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안전을 위해 다시 시작한다는 뼈아픈 자성과 결의의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은 국가 존립의 근거이며 국정의 최우선 가칩니다. 정부는 그동안 안전한 나라로 거듭나기 위해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법과 제도를 정비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재난 총괄하는 국민안전처를 신설하고 종류에 따라 권한과 책임을 명확하게 정리했습니다. 재난안전의 지휘체계를 일원화하여 초기 대응 능력을 강화함으로써 골든타임에 신속한 대응이 가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또한 생활안전의 위험을 발굴하고 점검하는 국가안전대진단을 실시하고 지난달에는 안전혁신 마스터플랜을 완료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것이 부족합니다. 지금까지 크고 작은 사고가 계속되면서 국민 여러분이 피부로 느끼는 안전에 대한 체감도는 여전히 불안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정부는 앞으로도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안전 사각지대를 선제적으로 발굴하여 미흡한 안전기준을 적극 정비해나갈 것입니다. 또한 해경과 소방을 비롯하여 재난대응 일선기관의 인력과 장비를 확충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지원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안전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활안전에서 법과 제도가 얼마나 제대로 작동하느냐는 것입니다 안전에 관한 철저한 관리와 감시뿐만 아니라 교육과 훈련 문화와 의식이 더욱 중요해지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최근 한 초등학생이 불과 몇 시간 전에 배운 심폐소생술로 이웃의 생명을 살린 사례는 우리에게 값진 교훈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관심과 실천이 매우 중요합니다.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과 더불어 우리 모두의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세월호 참사의 희생을 영원히 잊지 않고 받드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참여와 협력을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2015년 4월 16일 국무총리 이완구(대독)

압권은 행사 마지막 순서였던 <안전관리헌장> 낭독 및 다짐의 시간이었다. 국민안전처 안전점검과·해양경비안전본부·중앙소방본부, 도로교통공단, 국방부 해양구조대, 국군 화생방방호사령부, 국립재난안전연구원, 안전보건공단 등 공무원들과 이 시간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던 어린이들까지 ‘안전한 대한민국, 우리가 만들겠습니다’라고 쓰인 색색깔의 머플러를 펼쳐들고 <안전관리헌장>을 소리 높여 외쳤다.

대표자 한 명이 한 문장을 읽고 마지막 ‘실천한다’, ‘배려한다’, ‘협력한다’, ‘지도한다’, ‘노력한다’를 참석자들이 따라 외치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대표자의 목소리가 너무나 비장하고 결연해서 오히려 피식 웃음이 났다. 그제야 관변행사만의 독특한 매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미 짜인 틀에 맞춰 진행하는데도 감출 수 없는 어색함,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우스꽝스러움’을 목격하는 재미 말이다.

▲ 대회 참석자들이 <안전관리헌장>을 낭독하고 있는 모습 (사진=미디어스)

‘선언’하고 ‘다짐’하면 안전해지나요?

참사 1주기를 맞고 있는 현재까지도 ‘진상규명’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당장이라도 실현될 것 같던 세월호 특별법은 참사 200일이 지나서야 수사권과 기소권이 빠진 채 제정됐고, 유가족들을 폄훼하고 세월호에 대한 루머를 퍼 날랐던 인물들이 특별조사위원회에 이름을 올렸으며,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특별법을 거스르는 시행령이 튀어나와 가족들은 ‘멘붕’ 상태다.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를 대하는 정부의 태도는 지난 1년 동안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시큰둥했다.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다시는 참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앞장서서 노력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할 정부는 일관된 무시와 침묵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여전히 9명의 실종자가 남아있는데도 선체 인양 가능성 결과를 늑장 발표하는가 하면, 진상규명 활동 주체인 특위마저 거부하는 시행령 안을 고수하는 중이다.

불과 1년 전 일어났던 ‘전 사회적인 비극’을 냉대해 온 정부다. 뒤늦게 <안전혁신 마스터플랜>을 만들고 안전교육 강화, 해양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제도 강화에 나서면 끝인 것일까. ‘다짐’과 ‘선언’은 수십 번, 수백 번도 할 수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안전’이란 말이 자주 등장했지만 <국민안전 다짐대회>는 다짐대회라는 제목 그대로 정부의 야심찬 각오만을 강조한 관변행사였다. 대회 내내 금방이라도 더 안전한 나라가 코앞에 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해 5월 19일 대통령이 발표한 대국민 담화가 어른거렸다.

“사고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최종 책임은 대통령인 저에게 있습니다”, “여야와 민간이 참여하는 진상조사위원회를 포함한 특별법을 만들 것도 제안합니다”, “과거와 현재의 잘못된 것들과 비정상을 바로 잡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저의 모든 명운을 걸 것입니다”… 원고지 44쪽에 달하는 담화에서 대통령은 잘못과 책임에 대해 이야기했고, 수많은 약속과 다짐을 내걸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그럴듯한 말과 약속들이 주는 공허함을.

▲ 지난해 5월 19일,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미디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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