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경합한다. 우리(특히 정치인들이나 경영자들)는 그 대상을 흔히 ‘평등’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자유는 정작 자유 자신과 경합한다. 내 자유와 타자의 자유가 만나는 곳에서 자유의 경계는 그어진다. 그 경계를 넘어설 때 내 자유는 타자에게 억압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폭력이 되기도 한다. 때릴 자유, 스토킹할 자유, 약탈할 자유가 형용모순인 까닭은 자유의 이런 경합적 속성에서 비롯된다. 따지고 보면 평등-불평등이라는 것도 ‘축적의 자유’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경합의 양태에 가치를 매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언론의 자유라고 다를 리 없다. 누구에겐 언론자유가 다른 누구에겐 언론탄압이 될 수도 있다. 해마다 ‘국경없는 기자회’와 ‘프리덤 하우스’, ‘국제언론인협회’ 등이 발표하는 세계 언론자유 순위가 단체마다 제가끔인 건 통계학의 한계가 아니라 정치학의 본질이다. 누구의 언론자유냐, 누구의 자유에 더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순위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전제 하나. 여기서 ‘언론’이란 영리행위를 하는 기업(인)으로서 언론사(주)나, 거기서 밥벌이하는 직업인으로서 언론인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입 있는 자, 누구나 언론자유의 주체이자 경합자다.

▲ 조선일보 10월12일자 4면.

이런 맥락을 모르거나 애써 외면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동아투위 사건이 터진 지 30년도 더 지났다. 이 사건은, 언론자유를 얻기 위한 정치권력과의 투쟁은 정치권력과 언론사주가 스크럼을 짜는 순간 전선이 돌변한다는 교훈을 말해준다. 앞만 보고 싸우다 보면 뒤가 열리는 법이다. 그 싸움의 전리품은 누가 챙겼는가. 동아일보는 동아투위를 자신의 자랑스런 역사로 둔갑해 버렸다. 반면, 사주에 의해 강제 해고된 언론인 130여명 가운데는 더러 유명을 달리하고 대개 두 눈 부릅뜨고 살아 동아일보를 상대로 아직도 비바람 맞으며 투쟁하고 있다.

지금까지 기자실은 '누구의 언론자유를 위한 공간'이었나

언론자유의 조종(弔鐘)이 울렸다고 한다. 그 수사(修辭)는 비감하면서도 멋들어지다. 소설 제목에 더 어울릴 법한 표현이 신문 제목에 달릴 때는 사태가 그만큼 범상치 않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러나 그런 사태 앞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물음이 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이다. 이 물음은 ‘기자실’은 여태껏 누구의 언론자유를 지키는 공간이었는지를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이냐, 언론자유에 대한 대못질이냐?’, ‘기자실 폐쇄냐, 통합 브리핑룸 신설이냐?’라는 이항대립은, 경합하는 자들의 정치적 관점 차이만큼 상징표현의 차이를 드러낸 것이다.

기자실은, 주류 언론 출신인 내가 봐도, 언론자유가 제대로 경합하지 못하는 공간이다. 주류 언론의 독과점과 비주류 언론에 대한 배제가 일상적으로 실현되고, 전체 여론시장에서 양쪽의 위상을 결정적으로 갈라놓는 힘의 지렛대다. 에피소드 하나.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여자 어린이 유괴 살인사건으로 나라가 떠들썩했을 때다. 경찰이 브리핑을 하는데, 어느 방송사와 연결된 ‘아줌마가 간다’ 프리랜서 팀이 6㎜ 카메라를 들고 나타났다가 대번에 쫓겨났다. 아줌마들과 20, 30대 남성 기자들 가운데 누가 그 사건에 더 관심을 가졌을까? 그땐 미처 그런 질문을 던져보지 못했다.

기자실이 언론자유의 보루가 아니라고 단정할 재간은 없다. 훗날 한국사회의 언론자유가 (전체 경합자들에게 총량적으로) 후퇴한 것으로 나타나고, 기자실 통폐합과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음이 검증된다면, 닫힌 기자실 문을 열기 위한 기자들의 ‘노숙 투쟁’은 정당했다고 마땅히 평가받을 것이다. 그때 가서는 이미 ‘죽은 자식 ○○ 만지기’가 아니냐고? 맞다. 그래서 노숙 투쟁을 당장 그만두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다만, 언론자유의 적이 과연 기자실 통폐합 말고는 없는지, 심호흡 한 번 하고 살펴보기 바란다.

▲ 한겨레 10월15일자 7면.

기자들에게 언론자유를 위협하는 적은 한둘이 아니다. 고백하건대, 2년 전 ‘언론중재 및 피해 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 통과된 뒤 나는 한때 그 법에 적대감을 느꼈다. (지금은 정신 차렸다.) 취재와 기사쓰기는 전혀 안 하면서 선정성 하나로 사회 의제를 쥐락펴락하는 거대 포털자본은 지금도, 아니 뉴스 유통구조가 전복되지 않는 한 앞으로 계속 적대시할 것이다. 한 문화평론가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기자는 세 종류가 있었다. 기자-권력자-회사원. 그러나 이젠 권력자와 회사원뿐이다. 그나마 권력자도 줄어들고 회사원만 갈수록 늘어나는 것 같다.” 기자인 당신 스스로가 언론자유의 적이 될 수도 있다.

시대가 변해, 남들이 취미삼아 1인 미디어를 운영할 때 당신이 업으로 이 일을 할 수 있는 건 그나마 사회적 필요성을 인정받아서다. 변화에 뒤처지면 필요성도 줄어든다. 언론에 대한 사회적 태도도, 환경도 급변하고 있다. 무엇보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얻고자 하는 정보의 성격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수용자들은 당신의 출입처를 종횡무진하고, 통섭한다. 공급과 수요는 미끄러지고 있다. 당신의 출입처가 제도의 영토 안에 갇혀 있을 때 그들의 삶은 이미 탈영토의 문화에서 전혀 새롭게 재구성되고 있다.

기자실이 언론자유 수호의 최후 보루인지, 경합의 장에서 왕따가 될지는 머지않아 밝혀질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라도 되돌아봐야 한다. 당신이 언론자유를 위해 싸울 때조차 당신은 이중적 존재라는 것을. 당신의 투쟁은 누군가에게는 자유의 억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어쩌면 대못질이 끝난 기자실 바깥에 새로운 언론자유의 입구가 있을지 모른다. 그 문이 정말 있다면, 당신은 기꺼이 나 같은 신생매체 기자와 함께, 그러나 경쟁하며 그 문을 열어야 할 것이다. 그 문이 열리면 종소리가 크게 울려 퍼질 것이다. 그러려면 당신이 먼저 변화를 따라잡아야 한다.

1993년 <한겨레>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해, 줄곧 사회부 쪽에서 일했다. 지금은, 사상 초유의 정파(停波) 사태를 겪고 눈물겨운 투쟁 끝에 새 방송을 시작하는 OBS경인TV에서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모든문제연구소장’을 자처하고 산다. ‘쿨하다’를 날씨 상태에 대한 표현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송진처럼 끈적한 386의 시대적 아비튀스에 갇혀 있지만, 일상의 억압에 관한 미시담론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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