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독특한 기업이다. 21세기에도 전근대적으로 총수일가가 직접 그룹을 경영하는 ‘왕국’이다. 현대 거의 모든 법인기업의 기본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인데도 삼성 임직원들의 다수는 여전히 회장님이 휠체어라도 타고 돌아와 삼성의 미래를 밝혀주길 바란다. 회사는 임금을 동결하겠단 분위기지만, 노동자들은 별 다른 반발을 하지 않는다. 노동조합이 없어도, 불만이 있어도, 입을 다물고 회사를 위해 그저 복무하는 게 삼성맨의 영순위가 된지 오래다.

▲ (사진=삼성 블로그)

최근, 삼성물산 고객만족팀의 최아무개 대리가 해 뜨기 전 새벽 다섯시부터 ‘사찰 작전’에 참여했다. 아무리 삼성 내 ‘충성’ 정서가 있다지만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행위다. 경향신문 보도로 드러난 삼성의 ‘불법사찰’은 글로벌 초일류기업을 자처하는 삼성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삼성물산만 하더라도 최소 27명이 가담했다. 이중에는 삼성물산 전무가 포함돼 있을 만큼 조직적이었다. 삼성물산은 즉각 “주주총회 준비팀의 일탈이었다”고 해명했지만 대화 내용을 보면 수상쩍은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삼성은 즉각 “사과” 입장을 밝혔지만 파문은 잠잠해지지 않을 것 같다. 이 사건에 대한 수사도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물론 첫 보도가 나온 14일, 그리고 삼성물산이 블로그에 공식 사과문을 올린 15일 MBC와 SBS는 침묵한 점에서 ‘최대광고주’ 삼성의 여론 지배력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KBS가 메인뉴스를 통해 13일 새벽 5시부터 이어진 ‘조직적 사찰’을 자세히 보도한 점은 상징적이다. 이 사건을 최초 보도한 경향신문을 비롯해 한겨레조선일보 또한 삼성을 비판하는 사설을 내보냈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사찰방’ 대화내용을 언급하며 “민원인과 노조 간부에 대한 감시·미행이 회사와 무관하게 이루어졌다고 믿기는 어렵게 됐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지난 2012년 삼성전자가 대포폰을 만들어 삼성물산에 건넸고 삼성물산 감사팀 직원들이 렌터카를 이용해 이재현 당시 CJ그룹 회장을 미행한 사실을 거론했다. 조선일보는 “회사와 마찰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상습적으로 감시·미행하는 체질을 바꾸지 않는 기업은 결국 사회로부터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혐의는 짙어지고 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대화방에는 에스원 직원도 있었다. 삼성물산은 “에스원에서 물산으로 파견한 직원”이라고 설명했지만, 이 직원이 보고한 내용은 삼성물산 주주총회와 관련한 내용이 아닌 삼성테크윈노동조합의 동향이었다. 삼성물산에 따르면 에스원 직원이 공유한 삼성테크윈노동조합 관련 정보는 외부에서 생산한 것인데, 삼성의 설명대로라면 에스원은 삼성테크윈 등 계열사의 정보를 수집하고 다른 계열사와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삼성물산은 “주주총회를 매끄럽게 진행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직원들이 무리하게 행동했다”며 27명 선에서 꼬리를 자르려 하지만 어물쩍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삼성의 사찰을 ‘미행’뿐이라고 꼬리를 잘라서는 안 된다. 물론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범죄를 입증하기는 충분하지만, 정작 경찰과 검찰이 뒤져야 할 것은 에스원이 그 동안 수집한 정보다. 에스원은 삼성테크윈노동조합 간부의 얼굴과 이름을 식별하고 그 직함까지 정확하게 파악할 만큼의 정보력을 보여줬다.

또한 삼성의 ‘사찰’이 에스원의 ‘정보수집’과 각 계열사의 ‘활동’ 투트랙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삼성그룹의 지시 또는 그룹 차원의 사찰팀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다. 사찰의 ‘컨트롤타워’가 있다는 이야기다. 한 삼성 관계자 <미디어스>와 통화에서 “그룹 차원의 사찰팀이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경찰과 검찰은 계열사와 삼성그룹을 동시에 수사해야 이번 사찰의 실체적 진실을 파고들 수 있다.

삼성은 스스로 ‘글로벌 초일류 기업’이라는 간판에 먹칠을 했다. 한겨레는 “삼성이 1월16일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자 보상기준을 공개하자, 3세 승계를 앞두고 불편한 ‘과거사’를 일정 정도 털고 가려는 전향적 의지의 표현이라는 기대를 모은 것이 사실”이라며 “하지만, 대낮에 아무 거리낌 없이 조직적인 미행·사찰을 하는 모습은 삼성이 (올해 열쇳말로) 내세운 도전과 변화에 역행하는 처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어느 누구도 이번 사찰을 ‘충성심 높은 직원들의 일탈’로 보지 않는다. 삼성물산의 고위임원은 직원들의 사찰행위를 치하했고, 보안업체 에스원은 여기저기서 정보를 수집해 퍼날랐다. 글로벌 기업의 사찰 치고는 전근대적인 방법이나,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은 빙산의 일각일뿐이고, 더 고차원적인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삼성은 ‘사찰왕’이라는 오명을 얻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 할 때다. 시민, 소비자, 언론은 지금까지 충분히 삼성을 인내했다. 한국을 떠받치는 삼성이 먼저 나서 총수일가 지배구조를 바꾸고, 직업병과 다단계하도급 문제를 개선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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