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제 입에서는 고기를 씹을 때 홍시 맛이 났는데, 어찌 홍시라 생각했느냐 하시면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데…”

한류열풍을 일으킨 MBC 드라마 <대장금>의 한 장면이다. 예민한 미각으로 홍시 맛을 알아챈 것에 놀라 정 상궁이 “어찌 홍시라 생각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장금은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라고 답한다. 그러자 정 상궁은 “그렇지! 홍시가 들어 있어 홍시 맛이 난 걸 생각으로 알아내라 한 내가 어리석었다”며 무릎을 친다.

홍시 맛이 나서 홍시가 들어가 있다고 말한 장금처럼, 회사의 보복성 인사, 즉 ‘유배’를 ‘유배’라고 표현했을 뿐인데 ‘해사행위를 했다’며 쫓겨난 이가 있다. SNS에 웹툰을 올렸다는 이유로 단번에 ‘해고’ 통보를 받은 권성민 PD다.

첫 인사위 결과가 나왔던 지난달 21일 통화부터 권성민 PD는 담담하고 차분했다. 6일 오후, 인터뷰 때문에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한 카페에서 만난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편향적이고 저속한 표현을 동원해 회사에 대한 명예훼손을 한 행위로 중징계를 받은 뒤 또 다시 같은 해사행위를 수차례 반복’했다는 MBC의 주장과는 달리, 인터뷰 내내 회사에 대한 애정도 느낄 수 있었다.

“검열하지 않겠다, ‘재기발랄한 진정성’ 놓지 않겠단 선배들 말이 좋았다”

지난해 중반부터 권성민 PD의 회사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커뮤니티 사이트 <오늘의 유머>에 <엠병신 PD입니다>라는 글을 올려 정직 6개월을 받았고, 복귀 후엔 비제작부서로 가게 됐다. 지자체들에게 협찬 프로그램을 따오는 일을 주 업무로 하는 경인지사로의 ‘유배’였다. 적성에 맞지 않는 ‘영업직’으로 지낸지 한 달이나 됐을까. 그는 지난달 30일 ‘해고’를 최종 통보 받았다. 근황을 묻자 “놀고 있죠. 6개월 동안 놀았는데 또 놀게 됐네요”라며 웃었다.

▲ 해고 17일째이던 6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한 카페에서 권성민 PD를 만났다. (사진=미디어스)

해고가 확정되고 나서 선배들이 가장 많이 한 말은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고향인 예능본부의 평PD들은 무기명 성명을 내어 권성민 PD가 돌아오는 날을 기다리겠다고 약속했다. (▷ 관련기사 : <MBC예능 평PD들 “분노 표적된 권성민PD 응원한다”>) ‘오유’ 때도 권성민 PD에게 힘을 실어줬던 이들이다. 권성민 PD는 “‘스스로를 검열하지도 않을 것이다. 재기발랄한 진정성을 놓지 않을 것이다’ 하는 부분이 좋았다. 보면서 역시 예능 선배들답다는 생각을 했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오유’ 글을 가지고 6개월의 중징계를 내려 더 큰 뉴스를 만들어 준 MBC 덕분에 한 차례 이름이 알려졌던 그는, 이번 일 이후 소위 ‘유명인’이 됐다. 해고 소식이 전해진 당일에만 300~400명 넘게 친구신청이 들어왔다. 덕분에 요즘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지지한다’, ‘힘내시라’ 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갑자기 수많은 친구들이 생겨 원래 알고 지내던 지인들과 편하게 이야기 나누기 조금 어색해진 것이 아쉽지만 다들 좋은 마음으로 응원하고 격려해주시는 것이라서 고맙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권성민 PD는 자신이 앞서 MBC에서 해고된 선배들과 비교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제가 무슨 정의의 투사처럼 회사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것처럼 알려진 것 같기도 한데, 앞에 해고된 일곱 분의 선배들은 정말 장렬히 싸우다 해고의 칼을 맞은 상황이지만, 이번에 해고 사유가 된 제 웹툰은 전혀 회사와 싸울 마음으로 그린 게 아니었다. 그래서 어처구니없다. 그런데 ‘회사 비판 웹툰’ 이런 식으로 타이틀이 달리다 보니 보시는 분들이 오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좀 더 정확한 마음은 ‘뻘쭘하다’는 것이다”

“탈권위적이고 동아리 같은 분위기의 ‘예능국’ 소개하고 싶었는데…”

입사 4년차 PD는 <예능국 이야기>라는 웹툰을 그려 해고당했다. 밖에 있는 사람들도 움츠리게 되는 ‘삼엄한’ 분위기에서 어떻게 ‘유배생활 웹툰’을 그릴 생각을 했을까. “제가 좀 나이브하게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고 덧붙이긴 했지만, 권성민 PD는 정말로 그 웹툰이 자신을 해고까지 이르게 할 줄은 몰랐다. 말 그대로 ‘예능국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웹툰에는 사춘기 소년들 같은 정서도 크고, 동아리 같은 구석도 있는 MBC 예능국의 독특한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번 편 편집은 어떻게 할까요?”라는 물음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재밌게!”라고 답하는 선배, ‘슬램덩크 명대사 모음’을 편집 때가 아닌 일상생활에서도 활용하는 선배가 등장하는가 하면, ‘편집 업무에만 매몰되는 조연출의 현실’이라는 예능국의 고질적 문제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 관련기사 : <이 만화에 대한 '판단'을 구합니다>)

“MBC 예능은 타사보다 호흡이 빠르다. 자막, 편집 등 조연출이 맡은 후반 작업에서 웃음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고, 그만큼 비중도 굉장히 커 ‘편집 기계’처럼 강도 높은 노동을 하는 건 MBC가 가장 심하다. 타사는 조연출도 촬영현장에 가서 디렉션도 보고 하지만, 여기는 조연출과 연출의 역할이 무척 다르다. 프로그램마다 차이가 있어 일부는 아이디어도 모으고 촬영현장도 가는 경우도 있지만, 자막과 편집 작업은 늘 포함돼 있다. ‘까라면 까’ 하는 쪽으로 변한 회사 분위기 속에서도 아직은 탈권위적이고 의사소통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동아리 같은 분위기’의 예능국 모습을 만화를 통해 소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 권성민 PD 웹툰 <예능국 이야기> 3편 일부

자신들의 일터가 주 배경이고 가끔씩 출연하기도 하는 예능PD들은 당연히 ‘재미있다’고 했다. 웹툰을 올린 행위 자체를 걱정하는 분위기는 결코 아니었다. 제작직군이 아닌 선후배 동료들도 그동안 잘 알 수 없었던 예능국의 ‘속내’를 알게 돼서 흥미롭게 보고 있다고 전해 왔다. 기자, 시사교양PD들이 ‘위험할 수도 있겠다’고 걱정했다는 것은 나중에 들어 알았다.

‘예능국’의 숨겨진 모습을 알리고 싶었던 권성민 PD의 의도와 달리 MBC는 단 두 컷 나온 김재철 사장과 “꼴도 보기 싫으니까 수원으로 가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유배생활’이라는 몇몇 표현에 집착했다. 권성민 PD는 “유배 맞지 않나. 자신들도 (경인지사로 보낸 게) 유배인 것을 뻔히 알면서…”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웹툰에는 회사를 구체적으로 공격하거나 비판하는 내용이 없다. 회사가 이걸 본다 하더라도 문제가 없으리라고 봤다. 그런데 그 정도로 마음이 넓지 않은 분들이라는 걸 너무 간과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경위서 제출부터 해고까지 2주, ‘일사천리’로 진행된 해고

MBC가 밝힌 해고 사유는 <취업규칙> 제3조 ‘준수의무’, 제4조 ‘품위유지’ 조항과 <MBC 소셜미디어 가이드라인> ‘공정성’, ‘품격 유지’ 조항 위반이다. MBC는 이례적으로 3차례나 보도자료를 내어 ‘해고할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했다. “정당한 인사권에 따른 전보조치를 ‘유배생활’이라며 사적인 감정을 실어 비방했고, 원칙 없는 인사를 한 것처럼 호도했다. 또 인사발령을 비난하는 과정에서 비속어를 사용해 본인의 품위와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캐리커처를 이용해 전직 사장에 대한 조롱과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권성민 PD는 “정말 말이 안 되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들이 읽고 싶은 대로 독해하는 능력을 가지셨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반박했다. <MBC 소셜미디어 가이드라인>으로 ‘해고’에 이른 것에 대해서도 “저는 SNS를 통해 특정 정파를 지지하거나 특정인을 비방하거나 회사를 공격하지 않았다. 단지 개선해야 할 점을 이야기한 것”이라며 “<소셜미디어 가이드라인>의 정당성에 대해서도 토론해 볼 여지가 있지만, 그걸 하나의 기준으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번 일이 중징계로 이어질 만한 사항인지는 회의적이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MBC는 거침이 없었다. 세월호 참사 당일부터 보험금을 계산하고, 민간잠수부의 죽음 원인을 유가족의 ‘조급함’으로 모는 자사의 ‘보도 참사’에, 권성민 PD가 반성문 형태의 <엠병신 PD입니다> 글을 올린 것이 지난해 5월 중순이었다. 이후 대기발령을 받고, 재심에서까지 해고 직전 징계라는 정직 6개월을 받기까지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노동자들에게 ‘살인’이나 다름없는 해고가 나오기까지의 시간은 더 짧았다. 1월 16일 경위서 제출, 1월 19일 인사위원회 개최, 1월 21일 해고 통보, 1월 28일 재심에서 해고 확정, 1월 30일 통보… 고작 2주가 소요됐을 뿐이었다.

“인사위가 월요일이었고, 전주 금요일에 경위서를 제출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오유’ 때는 징계 나오기까지 거의 한 달이 걸렸는데, 이번엔 경위서 얘기 나오고 바로 인사위 열리고 수요일에 해고 통보를 받았으니 사실상 1주일도 안 돼 모든 게 다 이뤄졌다. 경위서 제출 요구 때부터 ‘위에서 문제 삼으려고 작정한 것 같다’는 분위기를 전해 들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전혀 생각 못하고 있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더라.

부모님께도 미리 말씀드렸다. 해고가 나올 수도 있다고. 이후 대처는 알아서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정작 해고 통보 받은 날은 부모님도 저도 덤덤했다. 물론 부모님이 보시기에도 어처구니없고 화가 나는 상황인 건 맞다. 아버지가 MBC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뉴스를 꾸준히 따라가고 계셔서,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아신다. 제가 엄청나게 큰 잘못을 한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해고 통보에) 내색하지는 않으신다”

인사위원회에서도 불길한 분위기는 계속됐다. 회사 공격 의도가 없었다는 점이 너무나 분명했기에 바로 경위서를 제출해 주의하겠다고 밝혔지만, 인사위에서는 단 한 개의 질문도 받지 못했다. 1분여의 본인 진술이 끝나자마자 ‘나가 보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 알았다. ‘아, 이미 모든 형량을 정해놓고 인사위를 열었구나’

▲ 권성민 PD 웹툰 <예능국 이야기> 1편

MBC 내부에서 ‘견디는’ 사람들 속사정 전하고 싶어 쓴 <엠병신 PD입니다>

앞서 ‘오유’ 때 인사위원회에서는 질문을 꽤 받아 20~30분 정도가 소요됐다. 첫 질문은 “술 먹고 썼습니까?”였다. 권성민 PD는 “일을 마치고 들어와 쓰느라 새벽 4시 가까이 돼서 썼는데 그걸 보고 ‘아, 얘가 술 먹고 취해서 썼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한 인사위원은 “(경영진은) 기사의 질이나 완성도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 방송되고 있는 엠병신의 뉴스”라는 구절에 몹시 불쾌해하며 “정말 하나도 관심이 없다고 생각해요?”라고 집요하게 물어왔다.

권성민 PD는 “사실 그 글은 기존 언론보도와 내부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라며 “열심히 싸웠지만 파업 결과가 그리 좋지 않아 현직에 복귀해서 어떤 식으로든 이 시간을 버텨나가자, 하고 있었는데 이런 내부의 갈등과 어려움을 사실 외부에서는 잘 모르지 않나. 이런 것들을 대신 얘기해 주고 싶다는 생각에 썼다”고 설명했다. 이어, “누구보다 치욕을 견디면서 현직에서 버티는 선배들이 있는데 이런 마음과 상황이 밖에 공유되지 않고 있었다. 마냥 생각 없이 무력하게 손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왜 안에서는 이런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지를 상세하게 알리고 싶었다”고 부연했다.

실명을 밝히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실명을 안 쓰면 글의 신뢰성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다”는 명료한 답이 돌아왔다. 그렇다 하더라도 글을 쓰면서 ‘용기’가 필요하진 않았을까. 권성민 PD는 “저는 별로 잃을 게 없는 사람이다. 행여 문제가 돼 불이익이 떨어진다고 해도 자기 프로그램 책임져야 하고 결혼해서 가정도 있는 선배들보단 제가 낫겠다는 마음이었다. 저는 저 하나만 간수하면 되니까”라고 답했다.

황당한 최후통첩을 받은 것이 억울할 법도 한데, 권성민 PD는 무슨 이야기를 하든 예의 그 덤덤한 태도를 유지했다. 반면 MBC는 공식입장에서도 ‘격앙된 감정’을 노출했다. “언론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방송사의 예능은, 사람들 눈에서 불의를 가린 채 무통의 저주 속에 서서히 죽어가게 만드는 마약일 뿐”이라는 권성민 PD 글에 대해 “MBC가 마약제조판매회사라는 것입니까”라고 반문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의 답이 궁금했다.

“그냥 말꼬투리를 잡는 거다. 마치 말 안 통하는 친구와 싸우는 것 같은 기분이다. 언론의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 ‘마약’이라는 표현을 쓴 것인데, 그쪽에서는 ‘그러니까 마약이라는 말을 쓴 건 맞잖아. 그 말 했어, 안 했어?’ 이렇게 나오는 거다. 회사 반응을 볼 때마다 독해력을 더 키우시는 게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든다”

회사가 왜 이렇게 ‘화가 나 있는지’를 묻자 권성민 PD는 “자기들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반발을 제기하는 걸 굉장히 ‘괘씸하다’고 본다. 그런 정서가 보편화돼 있다”고 말했다.

“표창원 씨나 파업에 열심히 참여했던 아나운서를 쓰려다 섭외에서 막힌 적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예능이나 드라마국은 제작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회사 압박을 받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모두들 느끼고 있는 공통된 변화가 있다. ‘회사문화가 굉장히 권위적으로 바뀌었다’는 거다. MBC는 선후배들끼리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해서 의례적인 격식 따지는 데 들이는 시간과 비용이 적었다. 이게 바로 창의적인 콘텐츠를 만들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보는데, 지금은 (경영진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존중받는 것을 중요시하면서,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 권성민 PD는 지난해 5월 17일 커뮤니티 사이트 '오늘의 유머'에 <엠병신 PD입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MBC는 여전히 ‘마봉춘’

권성민 PD는 170일 파업 시작 바로 다음날인 2012년 1월 31일자로 입사한 ‘파업둥이’다. 그가 MBC의 문을 두드렸던 2011년에도 MBC의 상황은 쉽지 않았다. 언론학자 100명을 대상으로 한 전화 면접 결과, 68%가 MBC의 보도 공정성이 후퇴했다고 평가하는 등 MBC의 보도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고, 기자들의 제작거부는 파업으로 확산됐다. (▷ 관련기사 : <김재철의 MBC, "보도 공정성ㆍ신뢰성 후퇴했다">) ‘내부 투쟁’의 어려움이 예상되는데도 MBC에 들어온 이유는 뭘까.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도 보도에 일정 부분 문제가 있다고 했지만 이렇게까지 사람을 좌천 보내고 상식을 벗어나는 일을 하는 때는 아니었다. 정치적 맥락에 의해 때때로 부침을 겪기도 하지만 ‘주인 없는 회사’이고, 어려운 상황이 있다 해도 어떤 형태로든 정리가 될 것이라고 봤다. 또, MBC가 오랜 시간동안 쌓아온 ‘모습’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 MBC를 만들어 온 직원들은 바뀌지 않고 회사에서 계속 일할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MBC 원서 딱 하나 썼고, 만약 떨어진다 하더라도 타사에 지원할 마음은 없었다. TV를 거의 보지 않는 제가 그나마 봤던 프로그램이 MBC 프로이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제게 MBC 말고 다른 선택지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공부 엄청 열심히 하는 복학생’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학과 공부에 매진해 왔던 그는 MB 정권 이후 망가진 언론보도에도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시사교양PD나 기자에 지원했을 법도 한데, 왜 ‘예능PD’의 길을 택했는지 궁금했다. 권성민 PD는 학창 시절 그렸던 만화를 여러 장 보여주며 “어릴 때부터 항상 콘텐츠 만드는 일을 해 왔다”며 “물론 제가 입사할 때 시사교양PD를 안 뽑기도 했지만, 제가 지금까지 만든 콘텐츠를 돌아보면 ‘예능’으로밖에 분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중요한 건 ‘재미’라고 본다. 아무리 뜻이 좋아도 재미가 없으면 사람들이 안 본다. ‘재미’가 예능의 본연이니 재밌게 만드는 것 자체로도 예능은 할 역할을 다 했다고 보지만, 그동안 MBC는 <아시아 아시아>, <러브 하우스>, <눈을 떠요> 등 사회에서 주목받지 못한 소외되는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가져간 점이 인상적이었다. <무한도전>도 마찬가지다. 마냥 재미있는 것 같지만 한국 젊은 세대들에게 10년 가까이 콘텐츠를 제공하면서 가치관과 태도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계도’가 아닌, 시청자에게 ‘말 거는 작업’은 어떤 형태로든 프로그램에 담겨야 한다고 본다. 그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건 ‘예능’이라고 봤다. 문화적 자본이 부족한 사람들도 가장 편하게 접할 수 있는 ‘예능’에서, 재미를 주면서 ‘이런 것도 생각해 보면 좋지 않을까?’라며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도 공통 관심사를 잠깐이라도 교류할 수 있는 장의 역할을 ‘예능’이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드디어 마지막 질문이다. 김재철 전 사장의 말처럼 한때는 ‘사장이 싫으면 나가라고 마음껏 싸워도 되는 좋은 회사’였지만, 이제는 웹툰 하나로 목이 잘리는 일터 MBC는 권성민 PD에게 ‘무엇’일까.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네요… MBC는 여전히 마봉춘이다. 너무 많은 결정권이 소수에게 있고 그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회사를 끌고 가지만, 여전히 현직에 있는 사람들은 더 좋은 방송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힘으로 다들 버틴다. 회사는 ‘정파적인’, ‘편향된’이라는 말로 폄하하지만, 여전히 구성원 대다수가 조합원이다. 그 조합원들이 고민하고 있어서 방송이 그나마 이 정도라도 나가는 거다. 교양국이 사라져서 예능국으로 온 PD들조차 방송 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 감탄이 날 만큼. MBC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분들은 ‘마봉춘’을 위해 애쓰고 있다. 거기에 대해 몇몇이 ‘엠병신’의 가면을 씌워 욕을 먹게 만드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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