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깔린 밤, 순찰을 돌던 경비 앞에 수상한 생명체가 등장한다. 생각지도 못한 명태의 등장에 “며...명태? 한국에서 사라진 줄 알았는데?”라고 되묻는 경비. 오랜 시간 헤엄쳐 한국까지 건너 와 거친 숨을 몰아쉬던 명태는 자못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꼭 알릴 것이 있소. 그들을 불러주시오”

▲ 지난 4일 공개된 경향신문 디지털스토리텔링 <원전 회의록>

<경향신문>이 지난 4일 공개한 디지털스토리텔링 <원전 회의록>(바로가기)은 공개 당일부터 SNS상에서 빠르게 퍼져나가며 화제를 모았다. 명태와 양, 개, 호랑이, 황새, 찬조출연 햄스터까지 여러 동물들이 한국의 원전정책을 두고 벌이는 난상토론을 웹툰 형식을 빌려 풀어낸 <원전 회의록>은 단순히 지금 이 순간 필요한 이야기를 충실히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심결에 웃음이 터지는 ‘재기발랄한 유머’를 섞어 주목도를 높였다.

원전 건설 및 확대를 지지하는 호랑이, 긴가민가하면서도 원전 확대에 거부감이 적은 양, 원전의 위험성에 불안감을 느끼는 개, 풍부한 자료를 토대로 원전 확대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학, 일본 해역에서 직접 건너와 가장 생생하게 원전의 위험성을 알리고 국내 원전정책 변화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명태… 이렇듯 <원전 회의록>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원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첨예한 입장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원전 회의록>은 다양한 주장을 보여주면서도 한편으로 풍부한 자료를 통해 정보를 채워주는 것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다. <원자력신화로부터의 해방>,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 등 단행본에서부터 <원전의 드러나지 않는 비용>, <읍천단층의 제4기 역단층운동 특성>, <제2차 국가에너지 기본계획> 등 학술 자료 및 공개된 정부 정책 계획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많은 자료를 썼다.

<원전 회의록>은 <경향신문> 미디어기획팀의 세 번째 작품이다. 미디어기획팀은 상시적인 SNS 관리에서부터 <원전 회의록> 같은 디지털 콘텐츠 제작까지 ‘디지털 특화 콘텐츠 마련 및 유통’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지난달 한국온라인편집기자협회가 주최하는 제3회 <한국온라인저널리즘어워드>에서 멀티미디어스토리텔링 부문을 수상한 <그놈 손가락, 국가기관 2012 대선개입 사건의 전말>(이하 <그놈 손가락>)도 미디어기획팀의 작품이다.

11일 오전 서울 중구 <경향신문> 편집국에서 만난 미디어기획팀 최민영 팀장은 <원전 회의록>을 만들 때 가장 염두에 두었던 것은 ‘재미’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 “작품을 의뢰할 때부터 ‘경향이 미쳤어요!’ 컨셉으로 그려달라고 했다. 남의 시선보다는 만드는 기자들과 작가부터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만드는 사람이 재밌으면 당연히 읽는 사람도 재미있게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신문조직은 매일 지면에 중력이 잡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중력을 줄이고 신문을 디지털 부문으로 좀 더 날아오를 수 있게 해야 한다. 미디어기획팀은 선도적으로 나서서 길을 닦는 역할을 한다. 쉽게 말하면 맨땅에 헤딩하는 것”이라면서 “기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실패’지만, 저희는 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깨지면서 배우는 것이 디지털의 매력인 것 같다”고 전했다.

최대의 고민,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까?”

- 보통 디지털스토리텔링 콘텐츠를 보면 좋은 기획이지만 왠지 따분하다는 인상을 받은 경우가 많은데 <원전 회의록>은 정말 재미있게 봤다. ‘이런 드립을 어떻게 다 준비했지? 트잉여인가?’ 하는 생각도 했다. 자료양도 만만치 않아서 만드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을 것 같은데 어떤 계기로 만들게 됐나.

재밌게 봐 주셔서 고맙다. (웃음) <원전 회의록>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지난 8월이다. 당시 산업, 환경 담당 기자들이 ‘원자로 폐로’ 관련 기획을 하고 있었다. 해외취재도 다녀왔고. 그 콘텐츠를 디지털스토리텔링 형식으로 바꿔보려고 했다. 그런데 소재도 그렇고 내용 자체가 너무나 전문적이다 보니 고민이 많이 됐다. 원전 얘기를 하면 근엄한 표정으로 ‘원전 큰일났다, 문제다’라고 하는 경우가 많아 독자들은 이미 원전 콘텐츠를 ‘재미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일단 독자들이 읽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미디어기획팀 송윤경, 김향미 기자 두 사람이 취재를 맡았고 그 자료를 어떤 방식으로 녹여낼지 작가와 계속 논의했다. 텍스트와 사진만 싣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최대한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다. 자료 찾고 구성안 놓고 고민하다가 미술 담당하는 윤여경 아트디렉터가 웹툰 방식으로 만드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그걸 계기로 일러스트레이터인 김번 작가를 섭외해 작업을 시작했다.

의뢰할 때부터 ‘경향이 미쳤어요!’ 컨셉으로 그려달라고 했다. 남의 시선보다는 만드는 기자들과 작가부터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만드는 사람이 재밌으면 당연히 읽는 사람도 재미있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웹툰 옆쪽에 있는 인포그래픽이 메인 내용이었을 거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전달력이 떨어질 것 같아 결국 웹툰을 택했다.

- 지금 시점에 <원전 회의록>을 공개한 이유가 있나.

해를 넘기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내년에 정부에서 <에너지기본계획>을 만든다. 국내에서 전기 생산할 때 원자력, 화력 등 에너지 비율을 정하는 플랜인데, 우리가 쓰는 전기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는지를 알리고 원전 문제를 이슈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공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제작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

만드는 과정에서 제일 어려웠던 건 역시 ‘어떻게 하면 재밌게 만들까’ 하는 부분이었다. 8월부터 기초취재를 했는데 원전 관련 내용이 워낙 전문적이어서 애를 많이 먹었다. 방사선과 방사능은 다르다는 것 아시나? 베크렐(방사선 측정 국제단위) 등 용어부터 까다로워서 후배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전문가들에게 일일이 논문 받고 인터뷰하느라 뒤에서 벌어진 취재가 엄청났다. 8월부터 10월까지 세 달 정도 취재에만 몰두했다. 원전 이야기를 가장 쉽게 전달하려면 우리가 가장 많이,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 <원전 회의록>은 웹툰을 큰 줄기로 하고 있고, 왼쪽 옆에 관련 정보를 실는 방식으로 구성돼 있다.

- 디지털스토리텔링 콘텐츠는 미디어기획팀에서 제작하지만 결국 <경향신문> 이름을 걸고 나가지 않나. 결재라인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

지난해 10월 <그놈 손가락>을 만들고 나서 디지털스토리텔링 콘텐츠가 외부에서도 굉장히 좋은 평가를 많이 받았다. <그놈 손가락>만큼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올해 여름에 공개한 <우경본색>이라는 작품이 있다. 일본의 우경화 흐름을 통시적으로 볼 수 있는 콘텐츠가 필요한 것 같아 만들었는데, 이런 것들은 <경향신문>에도 필요하지만 한국사회에도 필요하다고 봤다. 회사에서는 미디어기획팀에 ‘일단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어 봐라’ 하면서 용인해 주는 분위기가 있다. 이번에 <원전 회의록>을 웹툰 형식으로 할 거라서 고료가 필요하다고 청구하니까 처음에는 약간 난감해 하셨지만, 완성되고 나서는 회사 윗분들도 ‘웹툰으로 해서 더 좋았던 것 같다’고 하신다.

- <원전 회의록>은 트위터, 페이스북에서 특히 많이 공유된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 조회수는 어느 정도 나왔나?

조회수는 아쉽지만 공개할 수 없다. <그놈 손가락>만큼은 나온 거 같다. <그놈 손가락>은 지난해 7월 처음 구상했는데 그때는 국정원 대선개입 이슈가 수그러들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런데 저희가 공개하고 나서 국방부 사이버사령부의 대선개입 실체가 드러나서 마침 바람을 잘 탔다. 지금은 원전이 큰 이슈가 아닌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 반응이 나와서 놀랐다.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한 나라가 운용이 되는지에 있어서 에너지 운용방식도 중요한 부분이 될 텐데, 미래 에너지 정책을 먼저 알아본다는 차원에서 대한민국 초중고교 학생들이 <원전 회의록>을 다 보았으면 좋겠다.

- <원전 회의록>에 대한 가장 기억에 남는 반응이 있다면?

구성원들이 정말 잘 봤다고 고생 많았다고 해줄 때 가장 기쁘다. 완전히 다른 방식의 기사쓰기에 대해서 조직원들의 공감을 샀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하다. ‘이런 콘텐츠가 하나쯤은 필요했는데 나와서 다행이다’라는 얘길 들었는데 ‘기다려주셔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분은 우리에게 수고했다며 탁배기 한 잔 사주고 싶다고도 했다. 디지털스토리텔링은 사실 수치적인 관점으로만 접근하면 힘들다. 클릭수만 놓고 보면 제목으로 낚시질하는 기사를 쓰는 편이 훨씬 낫다. 공들인 콘텐츠와 낚시 기사가 클릭수가 비슷하게 나와 인생이 허망해지는 경험을 많이 했다. 어쨌건 가장 중요한 건 이 사회에 필요한 콘텐츠를 만들고 있느냐인 것 같다. 조직에서 철학을 갖고 오래 기다려줘야 한다고 본다.

“디지털 콘텐츠 만들기는 회사의 ‘디지털 체력을 쌓는 일’”

- <미디어스>는 지난 6월 <경향신문> SNS지기 ‘향이’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 관련기사 : <“암울한 시대, 경향의 짤방정신 이어가겠습니다”>) 그때 ‘향이’가 미디어기획팀 소속인 것을 알게 됐는데, 생각보다 많은 역할을 맡고 있는 것 같다. 미디어기획팀은 언제 만들어졌고 주로 무슨 일을 하는지?

그때(‘향이’ 인터뷰 때) 저와도 인터뷰했었다. (기자 : 헉, 정말요?) 지금 네 사람이 미디어기획팀 소속이다. 최근 한 사람이 늘어서 네 명이 된, 초초 미니미니한 팀이다. 아직은 신문사 내 움직임이, 특히 디지털 대응이 전반적으로 느리다. 실제로 그 업무를 하는 사람들은 지금 속도에서 2~3배속 빨라져야 하는데 기존에 있던 신문 중심 조직이 워낙 덩치가 커서 변하기가 쉽지 않다. 새로운 직무를 배워서 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점이 있다.

미디어기획팀은 2010년 여름쯤부터 시작했다고 보면 된다. 그때 칸(http://khan.co.kr)이 다른 회사에 가 있다가 합치면서 신문과 온라인에서 어떤 방식으로 융합을 할까 고민했다. SNS와 블로그 관리에서 출발했고 이제는 좀 더 차별화되고, 좀 더 디지털에 맞는 콘텐츠를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지에 주력하고 있다. <그놈 손가락> 이후부터 미디어기획팀 존재가 알려졌는데 그 전부터 수면 아래에서 저희들끼리 복작복작 이런 저런 작업을 하고 있었다.

- 디지털 콘텐츠에 대한 <경향신문>의 방향성은 무엇인가.

타사 동료나 후배들을 만나서도 하는 얘기가 있는데 이런 작업을 하는 건 ‘결국 한 회사가 디지털 체력을 쌓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를 만들 때마다 이걸 어떤 방식으로 취재해서 어떤 방식으로 구현을 해야 할지 집중적으로 고민하게 되기 때문이다. 악기를 하나 배울 때도 중간에 발표회 한 번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숙련도 차이가 크다고 한다. 자꾸 만들어 보는 게 각 사의 역량과 철학을 실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생각을 한다. 저희도 기존에 나온 뉴스 말고 어떤 방식으로 차별화된 콘텐츠를 만들지 고민하고 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다루되, 언제든지 레퍼런스가 될 수 있고 한국사회의 맥락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을 시도하려고 한다. 앞으로도 가능하면 1년에 4번 정도는 콘텐츠를 만들 계획이다.

- 혹시 관심 있게 보고 있는 타사의 디지털 콘텐츠가 있나.

여전히 ‘디지털 콘텐츠’에 대한 정의가 확실히 내려져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멀티미디어가 많고 보기에 화려하면 그게 디지털 아닌가 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다. 가장 ‘잘 대응하고 있는 곳’을 말하자면 SBS를 들 수 있다. SBS는 자신들이 파고들어갈 수 있는 최적의 지점을 포착하는 데 성공했다. 아주 신선한 방식은 아니지만 디지털 콘텐츠를 생산했을 때 가장 많이 읽을 수 있는 방식을 택해 <취재파일>을 히트상품으로 만들었다. <한겨레>의 ‘The 친절한 기자들’도 눈여겨보고 있다.

- 디지털스토리텔링 제작 말고도 최근 여러 가지 실험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요즘 <경향신문> 페이스북에서 카드뉴스 형식 뉴스도 봤다.

슬라이드 넘기는 형태의 짤방뉴스 등 이래저래 실험을 하고 있지만 저는 포샵고자(포토샵을 능숙하게 못하는 사람)란 소리를 듣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런 글씨체를 쓰셨어요? 파란색 바탕에 흰 글씨를 써 놓은 걸 보고 블루스크린인 줄 알았다고 하는 소리도 들었다. (기자 : 사실 저도 그 생각했다) 나중에 김번 작가한테 이런 얘기를 들려줬더니 배꼽 잡고 웃으면서 웃기려고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건 줄 알았다고 하더라. 사실 저도 포토샵 깐 지 얼마 안 됐다. (웃음)

디지털 디바이스에 맞는 콘텐츠를 만들려고 매일 실험하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죄송하다. 망한 음식을 많이 만드는 것 같아서. 그래도 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하다 보면 나아지리라고 본다. 기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실패하는 건데, 저희는 일단 저지르고 본다. 깨지면서 배우는 게 매력인 것 같다.

▲ 왼쪽부터 송윤경 기자, 윤여경 아트 디렉터, 김향미 기자, 최민영 팀장, 이고은 기자 (사진=경향신문 이준헌 기자)

- 미디어기획팀의 역할 중요성이 날로 높아질 것 같은데 인력은 계속 4명으로 가는 건가?

1월 중에 디지털 부문 확대 쪽으로 조직개편을 한다. 올해 가을에 기자들이 다 모여서 신문의 디지털 전략을 고민해 보는 총회를 열었는데, 회사는 어떤 정확히 어떤 플랜을 제시할 것인지 다들 궁금해 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회사도 조직개편의 필요성을 느낀 것 같다.

전체적으로 우수인력을 디지털부문에 전진배치한다고 한다. 아마 모바일 대응에 집중하게 될 것 같다. 신문조직이라는 게 매일 지면에 너무 중력이 잡혀 있어서 높이 날아오르려고 해도 힘이 드는 상황이다. 중력을 제거하고 디지털 부문으로 신문이 좀 더 날아오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단은 디지털편집국과 미디어기획팀에서 선도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저희는 길 닦고, 맨땅에 헤딩하는 역할이다.

- 차기작에 대해 살짝 귀띔해 달라.

내년에 국내에 몇 주년, 몇십 주년 하는 행사가 많더라. 아마 다음에는 한국의 60~70년 역사를 통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콘텐츠를 선보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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