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무지개 농성단에 함께했던 나영입니다. 저는 지금, 여전히 가슴 속을 따뜻하게 채우고 있는 무지개 농성단에 대한 감동을 안고 이 편지를 씁니다.

▲ 11일 무지개농성단 해단식에서 기획단이 인사를 하는 모습ⓒ미디어스
2014년 12월 11일, 시청 로비에서 꼬박 5박 6일의 시간을 보낸 무지개 농성단이 농성을 마무리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혹여 우리의 목소리가 또 다시 고립되거나 묻혀버리지는 않을지 걱정과 긴장 속에 시작된 농성이었지만 치열했던 6일이 지나고 농성을 마무리한 지금, 저는 바로 이곳이 성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넘어 모두의 목소리를 연결하는 역사적인 텃밭이 되었음을 느낍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함께했던 이곳은 날이 갈수록 폭력의 강도를 더해가던 극우 혐오 단체들의 행태와, 정치적 계산속에서 이들의 행동에 무책임하게 흔들리던 정치권, 공공기관들의 태도를 넘어 우리 스스로 인권의 정치성을 생생하게 살려내는 현장이었습니다. 그 의미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300여개의 시민사회단체, 수많은 개인들이 매일 이 곳에 함께했고, 우리는 더 이상의 혐오 폭력과 인권의 후퇴를 방기하지 않을 새로운 힘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많은 우리 삶의 현장들을 인권의 목소리가 살아있는 공간들로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무지개 농성단은 저에게 그런 믿음과 확신을 주었습니다.

혐오에 맞설 때마다 여러분의 얼굴을 기억할 것입니다

지난 6일 동안 우리는 정말 많은 성소수자 친구들을 무지개 농성단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얼굴들이 바로 이 농성의 가장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충주, 전주, 대전, 대구 등 여러 지역에서 온 많은 성소수자들, 소식을 듣고 친구와 함께 용기를 내어 찾아온 이들, 홀로 찾아와서 묵묵히 농성에 함께하며 자리를 지켰던 이들, 그리고 조용히 찾아와 후원금과 물품들을 건네던 손길들. 모두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을 지를 잘 알기에 더욱 그 의미가 소중했습니다.

누군가는 상상하지 못할 것입니다. 혐오의 목소리가 커지고, 차별에 근거한 낙인이 확신을 얻어나갈 때 그로 인해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수많은 개인들이 어떠한 일들을 겪게 되는지를, 학교나 회사, 지역, 가족 관계 안에서의 고립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이 낙인과 혐오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얼마나 힘겨운 폭력으로 다가오게 되는지를 말입니다. 농성 기간 동안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엄연한 이 현실들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학교에서 레즈비언이라는 소문으로 인해 교사와 학생들로부터 심한 모욕과 혐오폭력을 겪어야 했던 사람, 지역에서 일을 하던 중 다른 직장 동료의 악의적인 아우팅으로 인해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해고를 당해야 했던 사람,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많은 친구들을 떠올리며 농성에 함께한 사람들이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무지개 농성단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이런 현실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을 때, 또 다시 찾아올 수도 있는 구체적인 어려움들을 다시 한 번 마주할 각오를 하고 시청 로비로 발걸음을 옮겼던 것입니다.

▲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 행동 및 무지개 농성단 일동이 서울시청 내 3층에 내건 플래카드. (무지개 행동 제공)
우리가 서울시청 로비를 점거하던 첫 날, 난간에서 ‘성소수자에게 인권은 목숨이다’라는 문구의 현수막이 내려 떨어지던 순간을 기억하시지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공인한 박원순 시장의 사과와,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금지’를 명시한 인권헌장의 선포, 혐오를 조장하는 이들에 대한 단호한 대응을 요구하는 우리의 목소리는 이렇게 존재 자체가 투쟁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절실한 외침이었습니다.

오늘 여기, 이 자리에 함께했던 얼굴들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입니다. 언제 부딪히게 될지 모르는 차별의 위협으로 일상을 긴장 속에 살면서도 면전에서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이들 앞에 당당하게 설 용기를 낸 이들의 얼굴을, 이 혐오가 공적 기관의 방조와 용인으로 힘을 얻을 때 우리와 우리 이웃들, 차별받고 늘 싸워야 하는 이들의 현실이 어떻게 더욱 심각한 위험에 처해지게 될 지를 가장 잘 알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곳으로 달려온 그 마음들을.

그들은 혐오를 방관하고 원칙을 버렸지만…

극우-기독교 세력들이 동성애 혐오의 목소리를 높여온 지난 몇 년 동안 정치권과 공공기관은 이들의 행동을 무책임하게 방기해 왔고, 그들의 반인권적 압력에 굴복하거나 스스로 동참해 왔습니다. 민주당은 차별금지법안을 철회했고, 서대문구청은 이미 결정된 장소 사용 승인을 돌연 취소해 버렸습니다. 마포구청은 성소수자 주민들의 현수막 게시를 가로막았고, 공적 장소의 사용을 아예 불허해 버렸습니다. 성북구에서는 주민참여예산사업으로 선정된 ‘청소년 무지개와 함께 지원센터’ 사업이 무산위기에 있습니다. 전국의 수많은 지자체에서 성소수자의 인권은 껌 종이처럼 쉽게 버려져 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몇 년이 지나자 이들은 더 많은 영역에서 점점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 인권헌장 반대자들 "사회자를 교체하라" 인권재단 사람 박래군 상임이사가 서울시민인권헌장(안)공청회를 앞둔 지난 11월 20일 오후 서울 특별시청 후생관에서 발언을 하려고 하자 한 인권헌장 반대 시민이 마이크를 뺏으려 하고 있다. 반대 입장의 시민들은 "박래군 상임이사는 동성애를 지지하고 있다"며 "공청회 사회자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사진=오마이뉴스)
세월호 유가족을 위협하던 서북청년단의 등장과 지난 10일 밤 있었던 일베 회원의 사제폭탄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지난 해 성북구민 인권선언 선포식 자리에서, 올해 서울과 대구 퀴어퍼레이드에서, 서울시민 인권헌장 공청회 자리에서 혐오폭력의 실체를 계속해서 확인해 왔기 때문입니다. 혐오와 낙인을 공적으로 용인하고, 사회적 규범과 편견의 경계에서 가장 타자화되고 만만하게 여겨졌던 성소수자를 타겟으로 시작된 혐오폭력을 방관한 결과, 이제 그 폭력은 종북몰이, 이주민 혐오, 여성 혐오의 현장으로 이어지며 점점 도를 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그간의 폭력을 방관한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입으로 그들의 차별에 동조한 박원순 시장의 언행이 앞으로 이런 혐오 폭력을 얼마나 심각한 결과로 초래하게 될 지가 너무나 분명했기에, 농성을 시작할 때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절박함으로 시청에 모였습니다. 성소수자 인권이 바닥에서 막무가내로 짓밟힐 때 정치인들과 공공기관들은 혐오를 방관하고 원칙을 버렸지만, 우리는 혐오에 직접 맞섰습니다. 박원순 시장은 이들에 굴복해 이미 시민위원들이 다 만들어 낸 인권헌장을 선포할 용기조차 내지 못했지만, 우리는 인권의 가치를 스스로 다시 세우는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가장 취약한 대상을 향해 혐오폭력이 시작되었을 때, 거기서부터 단호하게 맞서고 대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의 경험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용기는 더 많은 혐오폭력의 현장에서 모일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으로 변화는 계속될 것입니다

지난 6일 동안 농성을 하며 만난 풍경들은 감동의 연속이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발걸음을 옮긴 소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난생 처음 피켓을 들고 농성장 바닥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던 모습들, 길 한복판에서 혐오발언을 들으며 캠페인을 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무관심하게 지나가는 사람들 앞에서 속상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유인물을 내밀던 모습들, 매일 틈틈이 농성장을 정리하던 손길들과, 아침과 밤에 다양한 악기와 목소리로 울려 퍼지던 음악 소리들. 예수재단과 혐오단체 사람들이 농성장을 수시로 난입할 때 한 목소리로 보여주었던 용기들. 시청 로비 곳곳을 채운 색색의 피켓들과 그 안에 담긴 기발한 문구들은 길이길이 남기고 싶을 만큼 훌륭했고, 그 어떤 유명한 전시장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농성장을 연일 방문하고 함께해 주신 많은 연대 단체 분들의 모습도 감동적이었습니다. 매서운 추위 속에 고공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씨앤앰 노동조합 분들과 세월호 유가족 분들, 광화문역에서 2년째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해 농성 중인 장애인 분들이 농성에 필요한 물품들을 지원해 주셨고, 쌍용자동차, 기륭전자, 공무원노조를 비롯해 많은 노동자 분들이 든든한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진정한 믿음과 실천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종교계의 많은 분들이 농성 기간 내내 함께해 주셨고, 무지개 농성단을 지지하며 우리의 요구를 성소수자들의 요구만이 아닌 인권의 원칙을 지키기 위한 모두의 요구로 받아 안고 직접 나서주신 많은 시민사회 단체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해외 곳곳에서 보내주신 연대와 지지의 메시지들, 박원순 시장과 서울시에 보낸 항의 트윗과 편지들에도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숱한 논란과 힘겨운 과정 속에서도 끝내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 항목이 명시된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만들어 내고 선포해 주신 여러 시민위원 분들이 있었기에 이 농성이 더욱 힘을 얻고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 무지개농성단은 11일 해단하면서 '당신의 인권이 여기에 있다'는 문구가 그려진 무지개 깃발을 높이 들었다ⓒ미디어스
12월 10일 세계 인권 선언의 날 밤, 면담 결과를 확인하고 150여명의 사람들이 분임토론을 하여 의견을 나누던 모습들은 가장 잊을 수 없는 자랑스러운 장면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서울시는 시민들의 토론을 통한 인권헌장 제정과정을 만들겠다고 해놓고도 스스로 그 소중한 과정을 무책임하게 져버렸지만, 우리는 무엇이 진정한 합의이고 민주주의인지를 이 과정을 통해 직접 증명해 보여주었습니다.

우리의 권리를 사회적 규범의 틀 속에 넣어두고자 하는 이들은 머리를 내밀지만 않으면 건드리지는 않을 테니 그냥 살아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존재를 가리고 ‘가만히 있으라’ 요구하는 그 공간에서부터 차별과 폭력이 시작됨을 알고 있습니다. 하기에 그 차별과 폭력을 무릅쓰고 스스로 머리를 내밀어 목소리를 내었던 우리 모두가 저는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우리는 이번 일을 경험하며 어느 순간 그저 평범한 관용적 표현이 되어버린 ‘보편적 인권’이라는 말이 얼마나 치열한 과정을 통해 그 의미를 지속할 수 있는 정치성을 지닌 말인지를 확인했습니다. 권리와 민주주의, 표현의 자유 같은 말들이 한낱 수사에 머무르거나 누군가를 억압하고 차별하기 위한 도구로 왜곡되고 있는 지금, 우리의 용기와 행동만이 이 말들의 의미를 생명력 있게 살려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듯해도 변화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차별과 혐오에 맞서 싸운 서울시민 인권헌장의 제정 과정과 지난 6일 간의 무지개 농성이 그 변화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당신의 인권이 그 변화의 공간에,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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