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이 국내외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조현아 부사장은 지난 5일 뉴욕에서 인천공항으로 돌아오는 항공기 1등석에 탔다가, 승무원이 ‘규정에 어긋난 서비스’를 했다는 이유로 안전 문제시에나 시행되는 비상조치인 ‘램프 리턴’을 시행 항공기를 탑승장으로 돌린 후 사무장을 비행기에서 내리게 했다. 그녀의 비상조치(?) 탓에 250여명의 탑승객들의 출발이 11분 정도 늦어지는 불편을 겪었다.

이 사건은 영국의 BBC와 <가디언>, 프랑스 AFP 통신, 독일 DPA 통신,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WSJ)>지 등에 잇따라 보도되었다. ‘땅콩 회황’이 국제적 문제로 비화되자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가 나서서 조사하겠다고 나선 상황이다.
문제가 커지자 대한항공 측은 8일 저녁 "조현아 부사장은 승무원이 규정에 어긋난 서비스를 했다고 보도 사무장에게 매뉴얼을 가져올 것을 지시했으나,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 객실 안전을 책임질 준비가 안돼 있다고 판단한 것"이라며 "조현아 부사장이 비상상황이 아닌데도 비행기를 돌리게 한 것은 지나친 행동인 만큼 사과드린다"라는 공식 해명을 내놓았다. 이 해명의 내용은 문제를 수습해야 하지만 차마 오너를 비판할 수는 없는 회사원들의 애환을 담뿍 담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이 미국 뉴욕 JFK 공항에서 승무원 서비스에 불만을 품고 비행기를 탑승구로 돌려 승객들이 불편을 겪은 것과 관련 8일 국토부가 사실조사에 들어갔다.지난 9월 조 부사장이 인천시 중구 그랜드 하얏트 인천 웨스트타워에서 열린 개관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문가들의 비판도 잇따랐다. 9일 YTN 라디오 <신율의 출발 새아침>에 출연한 정윤식 청주대 항공운항과 교수(전 아시아나 기장)은 “서비스 차원에서 근무지 배제는 일면 타당한 내용도 있지만, 항공 승무원은 사실 서비스는 부가적인 임무다. 기본적으로는 항공업무주요종사자라고 항공운항기준에 명시되어 있다”라며 조현아 부사장의 처신과 대한항공의 해명을 비판했다.
정윤식 교수는 “(항공운항기준의) 그 내용에 따르면, 실제 승객을 안전하게 관장하고, 또 탈출을 돕고, 이런 전반적인 항공 안전에 우선적인 임무가 있다. (그리고) 그 부차적인 임무로, 기내식을 제공한다든지, 면세품을 판다든지, 이런 서비스 임무는 사실 부가적인 임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서 정 교수는 “비행 전에 기장과 승무원이 모두 모여서 금일 어떻게 임무를 하고, 어느 사람이 어떤 위치에서 탈출을 도와야 하고, 이런 것들을 전부 브리핑 한다. 결국 그런 곳에서 배제가 되었다는 것은 업무 분장이 변경되었다는 것”이라면서, “그러면 새로 맡은 사무장은 다시 전체적으로 모여서 재 브리핑을 하고, 업무 분장을 다시 하고 해야 되는데, 아마 그렇게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지적했다.
▲ 8일 오후 서울 김포공항 계류장에서 대한항공 비행기가 이륙을 위해 활주로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를 요약하자면 조현아 부사장은 자기 편리의 문제에 해당하는 서비스의 문제를 과잉지적하면서, 전체 승객의 안전을 내팽개쳤다는 것이 된다. 이윤을 위해 안전을 희생하여 수백명의 사상자를 낸 세월호 참사가 8개월 밖에 안 지난 한국 사회에서 또 다시 벌어진 일이다.
물론 청해진해운과 대한항공을 동렬선상에 두고 비교할 수는 없다. 대한항공은 그 규모와 업종의 특성상 연안항해에 과신하고 안전문제를 도외시한 청해진해운에 비해서는 안전 문제에 있어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특히 대한항공은 사고상황에 대한 예방과 대처를 위해여 항공기 내부의 의사소통에서 권력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조차도 ‘오너 일가’를 만나면 무위에 돌아가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조현아 부사장의 자질을 비판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이것은 오너가 선량하기를 바라는 것 밖에 답을 찾을 수 없는 한국 사회의 성격을 드러낸다. 제각기 영역에서 ‘골목대장’들이 공적 책임은 도외시하고 마치 자신이 관리하는 조직이 자신의 명에 절대복종해야 하는 사유물인양 ‘갑질’을 해댄다.
▲ 대한항공 조현아 부사장이 이륙 전 자사 기내 서비스에 불만을 품고 승무원을 내리게 한 일과 관련해 국토교통부는 법 위반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고 8일 밝혔다.국토부 관계자는 조 부사장의 행동에 대해 "법에 저촉되는지 검토할 것"이라면서 "초유의 사례라 관련 법 조항을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사진은 이날 오후 서울 중구 서소문동 대한항공 빌딩. (연합뉴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선 그에 저항하지 못한다. 그나마 인터넷에 ‘대나무숲’ 등을 개설해 ‘갑질’을 하는 누군가를 숨어 비판하거나, 언론 보도에서 그 갑을 만났을 때 맹렬한 비판을 할 뿐이다. 하지만 작년 ‘라면 상무’ 논란을 만들어낸 게 사실상 ‘땅콩 회항’의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이었을 거란 점을 떠올려 본다면, 권력관계 구조의 변동 없이 조직화되지 않은 분노를 격발시키는 것은 ‘갑’들끼리의 분쟁에 처량하게 들러리를 서는 꼴 이상이 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우리는 재벌‧사학‧언론사와 같은 권력집단으로부터 작은 중소기업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무소불위의 ‘골목대장’들이 촘촘히 즐비하게 자신들끼리 갑을관계를 형성해 서로를 뜯어먹는 나라를 살고 있다. 소위 ‘87년 체제’ 이후 우리는 사회의 각 부문영역에서 이와 같은 ‘골목대장’들에 대항해 가령 노동조합과 같은 카운터권력으로 제어하는데 실패했고 상당부분의 역량이 소진된 지금은 여전히 막강한 대통령제 정치권력이 이를 통제해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2012년, 박근혜 대통령조차 ‘경제민주화’ 공약을 내걸어야 했던 이유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모습은 어떠한가. 박근혜 대통령이 문화체육관광부 인사에서 유진룡 전 장관을 무시하고 일개 국장과 과장을 콕집어 ‘나쁜 사람들’로 지목하여 날려 버리는 상황은 어떠한가. 언론의 이목이 집중되는 정치권력의 영역에서만큼은 저 ‘골목대장’ 스타일의 ‘갑질’이 완화되고 있다고 느꼈던 우리의 마음을 처참하게 배반한다.
▲ 박근혜 대통령이 9일 오전 청와대 위민관 영상국무회의실에서 열린 청와대-세종청사 간 국무회의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 뒤 자리에 앉고 있다. (연합뉴스)
항공법이라는 규율이 있냐 없냐의 문제일 뿐, ‘땅콩 회항’이란 사건은 박근혜 대통령의 문체부 국‧과장 인사 개입과 비슷한 사태다. 이는 박근혜 정부 청와대가 ‘골목대장’들에 대한 최소한의 견제를 포기하고 자신마저 ‘골목대장’ 스타일로 통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박 대통령이 보여준 모습은 청와대에 ‘통치’가 아닌 ‘거주’를 하러 들어간 이란 조소에 어울리는 것이었고, 본인이 ‘청와대 골목대장’ 이상의 어떤 역할을 할 생각이 없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머리 위로 ‘골목대장’들이 촘촘한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보다 한 칸이라도 아래에 있는 ‘병’이나 ‘정’이 없을지를 두리번댄다. ‘갑’들에게 받은 손해를 ‘병’과 ‘정’들의 ‘무임승차’를 화내면서 보상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동은 당장의 임시방편이나 궁여지책이 간신히 될 수 있을 뿐 문제의 해결책은 될 수가 없다. ‘조현아’와 ‘박근혜’의 나라에서 살아가게 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다음 두 가지여야 한다. 하나는, 정치권력의 최소한의 역할을 아는 정치인을 선출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둘은, 정치권력이 아무리 강해도 그것만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으며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의 저항이 중요하다는 것 말이다. 당장 대한항공 노동조합 게시판을 보게 된다면, 우리가 이 ‘골목대장’의 사회에서 노동조합을 함부로 욕해서는 안 될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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