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8일 <세계일보>의 폭로 보도로 시작한 ‘정윤회 문건’ 정국이 문화체육관광부 국과장 인사 전횡 논란으로 번진 상황이다. 4일 <한겨레>가 1면에 정윤회 씨 부부가 승마선수인 딸의 전국대회 및 국가대표 선발전 등의 결과에 불만을 품고 문체부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한겨레>는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수첩을 보면서 문체부의 누구누구는 나쁜 사람이더라 라고 발언한 걸로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이어서 5일에는 <조선일보>가 4면에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말을 받아 “대충 정확한 정황이다”라고 확인하며 일이 커졌다. 김종덕 현 문체부 장관이 기자회견을 열어 사실무근을 주장하고 김종 문체부 차관이 반박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러나 여전히 ‘소설’의 느낌도 있는 박관천 경정의 문건과는 달리 문체부 파문은 정황이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8일 아침에 나온 SBS 권종오 기자의 취재파일은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를 오랫동안 출입하며 취재해온 저로서는 유진룡 전 장관의 주장에 대한 청와대의 해명은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라고 적었다.
지난 2013년 8월에 있었던 노태강 (당시) 체육국장과 진재수 체육정책과장 경질은 대통령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것 같고,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은 이에 대해 저항하다 수용했다는 흐름이 뚜렷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권종오 기자는 “익명을 요구한 문체부 고위 관계자는 ‘노태강과 진재수 두 사람이 승마 파문으로 경질됐다는 것은 체육계가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니냐?’고 말했습니다”라고 적었다.
▲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5일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로 문화체육관광부 국·과장 교체가 이뤄졌다는 주장을 하면서 큰 파문이 일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청와대에서 열린 한-라오스 참파삭 유적 보존복원을 위한 양해각서 체결식장에서의 박 대통령과 유진룡 장관. (연합뉴스)
8일 아침 라디오에서도 야권 인사들은 문체부 국과장 경질 파문의 뒤에 대통령과 정윤회가 개입되어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거라는 정황들을 주장했다. 여당 인사들은 다른 사실관계에 대한 정황을 제시하지 못하고 문제를 희석시키기에 급급했다.
MBC 라디오 <신동호의 시선집중>에 출연한 설훈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노태강 국장이 굉장히 일을 잘하는 사람이다. 공직자 평가할 때 SABC 이렇게 4등급으로 나눈다. 그런데 노태강 국장은 2012년도에는 S등급을 받았다. 굉장히 일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2013년 작년엔 박근혜 정부 들어섰는데 A등급을 받았다”라며 노 국장과 진 과장에 대한 인사에 외압이 개입해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했다.
설훈 의원은 “노태강 국장이 작년 8월 달에 ‘스포츠비전2018’을 발표했다. 스포츠비리 등등을 다 포함해서 스포츠계를 정리할 수 있는 그런 걸 발표했는데 그 발표하고 얼마 안 있어서 열흘도 안 된 상황에서 그만두게 된다. 그러니까 이게 앞으로 체육계가 가야 할 큰 대강을 밝혀놓고 있는데 그걸 주무한 사람인데, 주무자를 갑자기 갈아치운다. 그 다음에 그 양반만 갈아치우는 게 아니라 그 다음에 이어서 진재수 과장도 같이 갈아치웠다. 이런 내용 등등이 앞뒤가 맞지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SBS 권종오 기자 역시 이 정황을 말하면서 “만약 유 장관이 박 대통령의 말을 듣고 노 국장을 경질시킬 의도가 처음부터 있었다면 그 직후에 열린 주요 행사에 함께 참석하고 기자회견장에서 정부 정책을 공식 발표하도록 시키지 않았을 것”이라 지적했다. 즉 ‘스포츠비전2018’ 발표 전 대통령의 ‘나쁜 사람들’ 발언이 있었고, 그럼에도 유진룡 전 장관은 노 국장 등을 보호하려 했으나 대통령의 결심이 확고해 인사가 관철되었을 거라는 추리다.
KBS 라디오 <안녕하십니까 홍지명입니다>에 출연한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역시 “유진룡 장관은 제가 문화관광부 장관을 할 때 공보관을 시킨 사람”이라면서 유진룡 전 장관의 증언에 무게를 실었다. 박지원 의원은 유진룡 전 장관에 대해 “대단히 강직한 사람”이라 평하면서, “제가 문화부장관을 하면서 문화부 일 40%, 청와대 일 40% 했다. 그래서 제가 급하면 청와대 일을 좀 시키면 그 유진룡 공보관은, 장관님, 이건 우리 부처 일이 아닙니다, 하고 딱 거절하는 사람”이라며 일화를 소개했다. 박 의원은 “직접은 못 들었지만 언론보도를 보면, 저는 유진룡 전 장관의 말에 신뢰를 두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새누리당 의원들은 청와대의 ‘물타기’ 성 해명발언 이상을 말하지 못했다. 7일 청와대 오찬에 다녀온 인사 중 한 명이었던 김재원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는 8일 KBS 라디오 <안녕하십니까 홍지명입니다>에 출연해서 “사실 저도 체육관계단체장을 맡고 있어서 당시 분위기라든가를 그런 내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 물론 전직 장관으로서의 무게감 있는 발언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대통령의 조치가 잘못된 것인가. 또는 오히려 그 담당자들의 직무태만과 나태 때문인가. 그리고 그때 빚어졌던 여러 가지 체육단체들의 문제점에 대해서 해결이 되지 않은 것이 또한 문제가 아닌가 하는 점을 앞으로 밝혀야 될 문제라고 생각한다”라고 애매하게 답했다.
김재원 의원은 이어서 “이것이 지금 아무리 대통령이 물론 국·과장 인사에 대해서 언급했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이 가장 당시 사회적 이슈가 되던 문제에 대해서 해결을 지시하는 것이 과연 꼭 잘못된 것인가, 이 문제도 이야기를 한 번 허심탄회하게 나눠볼 상황이지 무조건 그것이 잘못됐다든가 또는 어떤 한 쪽의 주장이 일방적으로 맞다든가 하는 것은 사실관계를 밝히는 데는 크게 도움 되지 않는 접근방법이 아닌가 생각한다”라고 설명했다. 인사가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으니 유진룡 전 장관과 언론보도가 꼭 사실일 수는 아니라고 말하는 수준의 ‘물타기’ 발언이었다.
같은 날 YTN 라디오 <신율의 출발 새아침>에 출연한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의 발언 역시 이와 흡사했다. ‘친박핵심’이라 평가받는 홍문종 의원은 “지금 장관하고 차관하고 진실공방을 하고 있지 않느냐”라고 물으면서, “저도 그 주변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단 체육계의 방대한 비리, 만연되어 있는 비리를, 대통령께서 척결해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계셨고, 또 내용을 확실하게 더 파악해봐야 되겠지만, 태권도도 마찬가지이고 몇몇 체육 분야에서 판정시비가 있었고, 그것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어왔지 않느냐”라며 문제제기를 희석하는 쪽을 택했다.
홍문종 의원은 “그래서 고강도의 구조계혁을 하고 있고, 인적 청산을 하고 있고, 그런 측면에서 생각을 하셨으면 좋겠다. 유진룡 장관도 이야기를 들어보면, 본인에 속해 있는, 그 줄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 관해서, 인사불이익을 당한 것에 대한 약간의 억하심정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이야기들이 주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라며 유진룡 전 장관의 발언 의도를 폄하했다. 홍 의원은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분 역시도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장, 차관의 이야기가 갈리고 있고, 그 이야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기 때문에, 제가 보기에는 유진룡 장관이 그만둔 장관으로서는 상당히 부적절한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억울한 심정을 이렇게라도 토로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한 것 같다”라며 유진룡 전 장관의 발언 내용이 아니라 발언 의도를 비판했다.
하지만 여권 인사들은 ‘대통령의 문체부 국과장 인사 개입 의혹’에 관련해서 다른 정황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변인의 보고를 따로 받은 대통령이 공직 인사를 자의적으로 단행했을 우려를 전혀 불식시키지 못했다.
권종오 기자의 기자 수첩은 “대한민국 체육 정책을 관장했던 노태강-진재수 두 사람은 현재 체육과 아무 관련이 없는 부처에서 은둔하듯 조용히 살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핵심 당사자인 노태강 전 체육국장은 자신의 휴대전화 전원을 꺼놓은 채 일절 외부와 연락을 끊었습니다. 청와대의 해명이 국민을 설득시키고 공감을 주려면 노태강, 진재수 두 사람의 죄와 실책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증거를 제출해야 합니다. 죄인 10명을 잡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1명의 억울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라고 끝난다. 정윤회-박지만 권력다툼 의혹보다 더 확실한 정황으로 드러난 이 인사권 남용 사건을 무시한다면 박근혜 정부는 의외의 곳에서 강력한 저항을 맞이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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