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력은 보통 상품은 구매에 들어가는 비용만큼의 가치가 있는 반면, 노동력은 주어진 가치이외에도 자신이 가치의 원천이기 때문에 특별하다. 시장에서 x만큼의 가치를 지불하고 노동력을 구매하는 자본가들은 그 x만큼의 가치 이외에도 영구적으로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힘(육체적 한계와 관계없이; 육체적 한계는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신축적이다)을 영유한다. 이러한 힘은 특별하다. 왜냐하면 노동의 과정에서 ‘손’을 거쳐 가는 무엇이든 그것에 새로운 가치인 ‘잉여’가치를 추가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손’이라는 말에 따옴표를 붙인 것은 어떤 형태든 손노동(육체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임금노동자는 없기 때문이다.
- 피에르 바소, <현대에 부활한 과거의 노동시간 Modern Times, Ancient Hours> 중

미궁에 빠진 유령-노동, <미궁과 크로마키>

케이블이 연결된 텔레비전. 모니터가 ‘지지직’ 하는 노이즈로 가득하고, 카메라는 아주 천천히,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모니터 후면에 연결된 TV 케이블을 따라간다. 카메라가 좇는 것은 분명 우리 삶의 일부지만 우리의 시야에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자 대상일 게다. 건물 밖으로 나온 케이블은 창문을 거쳐 얼기설기 연결된 전봇대로 이어진다. 그러면 노동자는 마치 곡예를 하듯 사다리를 타고 안전띠 하나에 자신의 몸을 의지한 채 족히 3~4층은 돼 보이는 높이의 전봇대 위에 올라 일을 시작한다. 고객과 전화 통화도 하고, 능숙하게 노동의 과정을 거친다.

▲ 차재민 작가 <미궁과 크로마키>

이는 <미궁과 크로마키 Chroma key and Labyrinth>라는 15분짜리 영상의 도입부다. 작가 차재민이 희망연대노조 소속 케이블 비정규직 노동자와 함께 만들었다. 카메라는 아직 수신이 되지 않는 텔레비전에서 시작해 한 노동자의 손-노동을 따라 두 가지 방식으로 늘어놓는다. 첫째는 쉴 새 없이 골목과 골목을 쫓아 둘둘 말린 케이블을 늘어놓는 것이고, 둘째는 ‘크로마키’를 따기 위한 초록색 화면 위에서 아무 대상도 없이 손-노동을 하는 것이다. 이는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아닌, 일종의 ‘노동'을 흉내내는 일종의 퍼포먼스이다.

손놀림은 매우 빠르다. 숙련된 노동자가 아니라면 감히 따라 하기 어려운 고난도 기교로 이루어져 있으며, 때로는 ‘이소룡’처럼 모니터 밖의 우리를 쳐다본다. 이 가상의 퍼포먼스가 일종의 무술처럼 느껴질 정도다. 공간도, 대상도 제거된 유사-노동. 크로마키 화면 위의 손-노동 흉내가 역설적으로 감추어져 있던 ‘노동'을 드러나게 한다. 노이즈 화면과 케이블, 노동하는 손의 표면 깊숙이 다가갔던 카메라는 노동하는 손의 퍼포먼스로 이루어진 일종의 무대를 거쳐 통념적인 이데올로기를 조준한다. 육체적 노동을 가리는 추상화된 노동의 과정을 벗겨내려 시도하는 것이다.

▲차재민 작가 <미궁과 크로마키>

하청 케이블 기사들의 평범한 용기, <노는 땅 위에서 파업 중>

이와 더불어 작가는 열세명의 케이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나눈 이야기를 모아 <노는 땅 위에서 파업 중>이란 제목의 인터뷰집을 만들었다. 작가는 이 책을 500부만 한정 인쇄했고, 2014년 12월 5일 지금 이 순간 서울 도심 전광판 위에 올라 농성하고 있는 두 노동자를 비롯한 케이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나누어줬다. 열세 명 중 두 번째의 주인공은 농성 중인 임정균씨이기도 하다.

“저는 데모하시는 분들을 보면 이제는 왜 데모를 하는지 알 것 같은데, 사람들은 근본적인 원인을 모르는 것 같아요. 거기서 이루어지는 행위라든지, −−경찰들이 투입돼서 물대포 쏘고 진압하는 과정, 비춰지는 그런 것들−− 어쩌면 부정적인 게 더 많은데 저는 그런 분들한테 ‘아, 노조…. 맨날 시위만 하고 철탑 올라가서 저러는구나.’ 그런 생각은 하면서 그 노동자들이 그 행위까지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사람들은 생각을 한번쯤 해 봤을까 하는 생각이 요즘 문득 들어요. 저는 항상 보기만 했지 저 사람이 왜 저기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근본적인 원인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요. ‘왜 저 사람은 저렇게 힘들게 철탑에 올라가서 농성을 할까.’ 그거에 대해서 한번이라도 고민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아, 저 사람이 너무 힘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먼저 해야 되는데, 거기서 이뤄지는 행위로만 결과를 예측한다는 거죠. 내용이나 과정은 전혀 생각 안 하고 결과로만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게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사회의 잘못된 관행이나 모습일 수도 있죠.”
- 임정균, <노는 땅 위에서 파업 중> 중

1년 반 전의 그는 스스로에게 예언하듯 철탑 위에 오른 노동자의 처지와 그를 둘러싼 상황적 딜레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그를 포함해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상황이다. 누가 이 엄동설한에 도심 한복판의 광고판 위에 오르길 원하겠는가. 노동조합을 파괴해 어떻게든 더 ‘좋은 가격'에 회사를 팔아넘기려 하는 사모펀드 투기자본이 109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하루 아침에 잘랐고, 해고된 동료 노동자들을 가슴 아프게 지켜봐왔던 임정균씨로서는 쫓기듯 그곳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여느 언론이나 정치권도, MBK와 김병주 회장도 눈길조차 보내지 않았던 상황에서 어떻게든 판을 흔들고 희망의 근거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지난 6년 간 휴가 한번 가보질 못했다. 고작해야 한 달에 이틀 정도 쉴 수 있고 하루에도 60시간, 72시간씩 일해야 하는 근로기준법도 지켜지지 않는 일터에서 노예처럼 일해야 했다. “빨간날도 휴일도 명절도 그냥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는 날짜일 뿐” 자신의 의사로 쉴 수 있는 날은 없었고, 그렇게 일을 하면서도 고작해야 최저임금을 조금 넘는 임금을 받았을 뿐이다. 우리 사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놓인 비참한 처지가 가감 없는 자기 고백들 속에 드러난다.

<미궁과 크로마키>가 손-노동의 퍼포먼스를 통해 소외된 노동을 수면 위로 올리고 드러내려 한다면, <노는 땅 위에서 파업 중>은 노동자들의 인생 이야기, 서글프지만 담담한 고백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모두 제각각의 삶을 거쳐왔지만 어느샌가 같은 자리, 보이지 않는 전봇대 위에서 끊임 없는 착취의 굴레를 뛰고 있었다. 인터뷰 전체가 고백들로 이루어져 있는 대신, 작가의 질문이나 해석은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의 개입이 없는 철저한 ‘듣기’의 텍스트다. 열세개의 삶이 케이블 비정규직 노동자의 열악한 처지와 소박한 꿈 위에 겹쳐진다. 매끈한 정리도 없다. 작가의 이전 영상 작업들이 그러했듯 풍경들을 병치하고, 어떤 기준에 의해 늘어놓았을 뿐이다. 그것은 시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철저한 건물 구조처럼 보이기도 하고, 미로 같기도 하다.

▲차재민 작가의 <노는 땅 위에서 파업 중>. (이미지=차재민 작가.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해설 아닌 감응

자본주의 체제, 특히 극심한 노동의 분할을 경과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체제의 상품 생산 공정 안에서 노동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손-노동을 하지 않는 임금노동자는 없지만, ‘손'은 점점 가려지고 있고, 삶은 있어도 사회 안에서 추호도 보이지 않는, 유령의 것으로 전락하고 있다. 자본이 구획한 밀실 안에 갇힌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여성과 남성으로, 이주와 정주로, 대졸과 고졸로, 기술직과 사무직으로, 배고픈 청년세대와 배부른 중년세대로 분할되어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도록 강요받고 있다.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조직함으로서만 계급적 위치로서의 진정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난 2년여 간 케이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마주치고 대화하며 그들의 ‘손'(노동)과 ‘말’(삶)을 영상과 텍스트로 외화시킨 <미궁과 크로마키>와 <노는 땅 위에서 파업 중> 두 작품은 인상적이다. 화이트큐브에 갇혀 작가들과 비평가들 안에서만 환류하는, 고정되어 있는 예술의 위치에서 한발자국 벗어나, 이 도시에서 가장 동시대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의 마주한 가장 본질적인 문제에 다가가, 관객 스스로 화면 위로 펼쳐지는 연쇄에 감응해내기를 요청한다. 명시적인 내용과 스토리로 적시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가깝게 다가가, 보고-읽고-느끼고-말해야 하는 것이다.

“계속 무시만 당했던 내 목소리가 조합을 통하면 위에서는 듣지 않겠어요? 그런 게 저희 노동자들에게 제일 필요했던 것 같아요. (…)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했을 때 귀 기울여주고 상생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한 일원이 된 것 같아요.” 임정균씨의 고백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그의 소박한 바램은 지금 전광판 위에 휘청거리며 서 있다.

그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전까지 우리 사회 누구도, 케이블 기사들의 이러한 처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조직했고, 보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자본의 착취에 작은 브레이크를 거는, 공동의 모험을 시작했다. 자본에 의해 가려진 우리의 ‘노동'을 어떻게, 어떠한 방식으로 드러나게 할 것인가? 차재민 작가의 두 작업을 보며 갖게 된 고민이다.

p.s. 씨앤앰 케이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인생을 가지고 장난질을 해온 사모펀드 자본 MBK의 김병주씨는 겸허한 마음으로 이 작은 책 <노는 땅 위에서 파업 중>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13명의 노동자들의 고백들로 이루어진 빼곡한 글자들 사이를 지나고나면, 자신이 어떤 인간이었는가를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그것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니다. 적어도 계속 지금까지의 고역스러운 삶을 반복하며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낫기 때문이다. 그가 읽고 싶다는 기별을 준다면 얼마든지 소포로 부쳐줄 의사가 있음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바이다.

Chroma key and Labyrinth from Jeamin Cha on Vim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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