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의 극우주의>(2014, 자음과 모음)라는 책 제목은 이 책이 가진 야심을 잘 설명해준다. 그러니까, ‘극우’에 대한 보편적 담론의 가치와 설명력을 경시하지 않으면서도, 한국적 특수성을 잘 버부린 분석을 하겠다는 욕망. 이런 제목을 보면 “당신들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어??”라는 호기심으로 책을 훑게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책을 한 번 통독한 감상은 필자들의 노고를 충분히 치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낡고 새로운 극우의 시대에 관한 진단서”란 제목의 머리말에서 박권일은 2014년 9월 <경향신문>이 기사화한 “극우주의 또는 극단주의 연구의 권위자로 국제적 명성”을 가진 토마스 그룸케 교수의 인터뷰에서 “사회적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저항하는게 극우주의”라는 정리를 따낸 후(p8), 한국 사회의 ‘일베’에 관해선 “(...) 일베에는 적용하기가 난감하다. 웹이라는 환경, 극우 정권, 극우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 그들만큼 적응을 잘한 집단을 찾아보기 어려우니 말이다”(p9)라고 논평한다.
그러면서도 박권일은 “극우주의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형태로 벌어지고 있는 지구적 사건이기도 하다. 일단은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극우주의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하나하나 분석하고 재맥락하는 작업이 시급해 보인다”(p9)며 보편성에 대한 시선을 놓지 않는다. 사실 유럽에서 발흥하는 극우정당과 일본의 우경화는 한국 사회 시민의 입장에서도 놓을 수 없는 관심사이며, 그들과 우리의 사회적 여건을 관통하는 보편성을 상기할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파시즘, 전근대나 일회적 사건 아닌 근대 정치의 문제
여섯 필자들의 문제의식을 느슨하게나마 하나로 관통할 수 있는 관점이 있을지는 이택광이 쓴 6장 <다시 파시즘을 생각하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이택광은 “파시즘은 극우주의의 주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반공주의와 권위주의를 골자로 하는 역사적이면서 동시에 현재적인 정치사상”(p217-218)이라 정의하면서, 여러 가지 논의를 검토하며 파시즘이 전근대적인 정치현상이 아니며, 특정 국가의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국면에 기댄 특수현상도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는 “파시즘에 대한 진지한 접근은 근대와 정치의 관계를 탐구하기 위해 필수적”이라면서, “근대라는 보편성을 토대로 전개되는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이 극우주의 정치 운동을 조명해봐야 하는 것”(p222)라 제안한다.
또, 그는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함께 전체주의로 묶는, 한나 아렌트의 논의를 반공주의로 각색한 복거일 등 자유주의자의 논변에도 반대한다. 그는 “파시즘이 국가를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의 지지를 얻어내고자 하는 정치 운동이라면, 사회주의는 부르주아의 이해관계를 해체하려는 정치 운동”이라면서, “이 차이는 전체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주장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결과를 노정한다”(p222-223)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택광은 아시아와 한국의 사례를 통해 근대 정치에서 파시즘이 갖는 함의에 관한 논의에서 한쪽 편을 들려고 한다. 그는 “유럽이라는 지역을 벗어났을 때, 특히 한국처럼 파시즘과 자유주의가 끊임없이 경합을 벌이면서 근대화를 이룩한 국가에게 파시즘은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p226)라고 말하기도 하고, “특히 민족주의가 강력하게 작동했던 20세기 초반 아시아 국가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자유주의를 우회한 아시아적인 근대화가 파시즘과 일정하게 결합되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p236)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그것을 성립시키기 위한 (역설적인!) 국가개입을 정당화하기엔 충분치 않은 정치사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자유주의가 통치술이 되기 위해선 ‘국가개입이 필요 없는 시장경제의 성립을 위한 국가개입’이란 역설적 역할을 대행해주고 자유주의만으로 이끌어내기 힘든 노동계급의 지지를 이끌어낼 파트너가 필요한 것일 수 있다.
이런 착상에서 본다면, 유럽사회가 2차세계대전 이후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파시즘과 결별하면서 ‘사상의 자유’의 시장을 넓히고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을 수용하면서 그러한 ‘계’(임의적이고 잠정적이나 어느 정도 안정성이 있는)를 만들어냈다면, 동아시아의 경우 아마도 미국의 국제질서를 위한 개입에 의해 노동계급과 사회주의가 억압된 상황에서 자유주의는 파시즘과 경합하며 그러한 ‘계’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또한 유럽에서도 동아시아에서도 그 ‘계’의 불완전성이 증대되는 후기 자본주의의 상황에서, 극우와 파시즘이 ‘계’ 바깥으로 추방되어 있던 유럽에선 새로운 형태의 극우정당이 대중성을 획득하여 이 ‘계’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면, 한국과 같은 사회에선 이미 ‘계’안의 주요 기득권세력인 새누리당도 이해하지 못할 방식으로 ‘일베’ 등의 극우정서가 출연하고 있는 식으로 보편성과 특수성이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느낌이 든다.
'일베', 부적응자가 아닌 과적응자?
박권일이 머리말에서 시사한 ‘한국에서 극우는 적응을 못한 이들이 아니라 적응을 잘 한 이들’이란 관점도 그런 부분에서 성립될 수 있다. 이미 <우파의 불만>(글항아리, 2012)에서 한국의 네오라이트 문제를 세밀하게 분석했던 박권일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1장 <공백을 들여다보는 어떤 방식 : 넷우익이라는 ‘보편 증상’>에서 ‘일베’와 이를 포괄하지만 또한 넘어서는 젊은이들의 극우의식을 세밀하게 분석한다.
그는 ‘일베’의 문화와 담론을 ‘발생적인 것’과 ‘국정원으로부터 외삽된 것’으로 나눠봐야 할 거라는 세밀한 지적을 하면서(p17-23) "국정원의 여론 개입이 드러난 건 대부분 반호남 지역주의 담론이었다. 반면 일베에서 유통되는 담론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여성 혐오의 경우 국정원과 관련이 별로 없었다. 여성 혐오 담론을 그나마 일베의 자생적 담론으로 추정할 수 있는 이유다“(p27)라고 설명했다.
이는 ‘일베’ 등의 호남차별 담론이 한국 사회 기존의 호남차별 정서에서 기인하는 것과는 다른 경로를 가졌을 거라는 심증을 정당화할 수 있는 훌륭한 설명이다. 그러나 기존의 호남차별 정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약화되거나 적어도 공론의 영역에선 밀려나가는 것으로 보였는데, 어째서 ‘일베’에선 기존의 정서에서도 용인되지 않던 수준의 거센 혐오발언이 분출되게 되었을까.
‘일베’의 지역차별 발언의 문제는 이것이 지배계급의 이해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통치를 하는 이들의 입장이라면 호남을 무작정 비난하기 보다 영남과 호남의 대립구도를 유지하고 영남인의 숫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 권력을 추구하면 그만이다. 현재에도 인구 10%, 이전 세대를 고려해본다면 거의 30%에 육박하는 자손이 있는 이들을 극한으로 자극해봐야 얻을 게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일베’는 그 선을 가뿐하게 넘어선다. 호남혐오 담론이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 외삽된 것으로 보이는 데도 말이다. 박권일은 이에 대해 “이데올로기 전략이라기보다 차라리 이데올로기적 도착이라 불러야 할 정도”(p42)라고 논평하면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 주목경제(attention economy)의 개념을 꺼내든다. “정보사회의 인간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등장(p43)한 주목경제는 ”간단히 말해 타인의 주목을 추구하는 활동이 최우선 순위를 점하게 되는 경향성 또는 사회 환경을 가리킨다“(p51)고 한다. 박권일은 주목경제를 형성하는 주목 경쟁의 결과로 ”이념을 위해 주목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주목을 위해 이념을 추구하는 전도가 일어나는 것“(p53)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후 그는 다시 보편성의 영역으로 넘어와, 다카하라 모토아키가 명명한 ‘개별불안형 내셔널리즘’의 개념을 환기하고 자신이 줄곧 논의해온 ‘상상된 착취’와 같은 개념을 끌어들이며, 이와 같은 넷우익의 의식을 분석한다. 그는 “평등의 토대가 무너진 능력주의, 그것은 최소한의 진보성이 거세된 능력주의이며 스스럼없이 인종주의와 홀레하는 능력주의”(p58)라면서, “정당정치와 분배 구조가 현실의 모순을 반영하지 못할수록, 정치는 사회경제적 불만을 생산력과 제도로 해결하기보다는 어떻게 대중에게 즉각적인 쾌락을 주느냐를 가지고 경쟁하는 게임이 되기 쉽다”(p59)고 지적한다.
극우정당이 어려운 이유, 그리고 극우의 토대로서의 기독교
여타의 글을 다소 소략하게 소개하는 것은 서평이 너무 길어지면 서평가도 힘들고 독자들도 역설적으로 책에 대한 구매의욕이 떨어지기 때문이지 다른 글들이 재미가 없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김민하가 쓴 책의 2장 <한국의 극우 정당, ‘오지 않은 미래’인가?>라는 글은 보수가 극우와 결별하지 않은 한국 사회의 정치지형과 양당제에 유리한 현행 선거제도에선 역설적으로 ‘유럽식 대중적 극우정당’이 도래하기가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다.
김민하의 글에서는 박근혜와 안철수의 역할, 한국 보수정치인들의 극우적 인식의 토대에 대한 요약, 한국의 선거법과 진보정당 운동의 고난 등 여러 가지 정보들을 얻을 수 있겠지만 마치 축구경기에서 수비수가 이선공격에 가담했다가 벼락같은 슛으로 골을 터트리는 것과도 같은 그의 번뜩이는 유머감각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김민하는 옌스 스톨텐베르크 노르웨이 총리의 브레이크비크 사건 이후의 연설을 언급한다. “그는 브레이크비크식의 테러리즘에 굴복하지 않는 방법은 더 많은 관용을 보여주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노르웨이 국민이 이러한 태도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p83)고 설명한 후 굳이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의 그런 연설은 어딘가 <다크나이트>의 배트맨을 연상케 하는 것이기도 했다. 조커에게 질 수는 없다는 식의…….”(p84)
김진호가 쓴 3장 <한국 개신교 반공주의와 ‘증오의 정치학’>은 한국의 통치체제와 이에 조응한 반공주의 주류 기독교의 형성을 다룬다. 여기서 그가 분석하는 통치체제는 권위주의 체제(미군정~이승만 정도로 추정되는), 신권위주의 체제(박정희~전두환), 포스트 신권위주의 체제(박근혜)다.
권위주의 체제와 신권위주의 체제의 차이에 대해 그는 “(신권위주의 체제) 이 시기의 증오의 감정은, 지난 1950년대처럼 공산주의자를 향해 가혹한 보복을 가하는 이른바 ‘파괴적 증오’로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개발을 위한 동력으로 전화되어 전례 없는 압축적 성장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생산적 증오’라 부를 수 있다. 이때 ‘(반공주의적) 증오’라는 감정은 ‘발전 욕구’라는 감정으로 치환된다”(p112-113)라고 설명한다. 또 김진호는 이 시기 국가의 논리에 대해 “우리가 대신 공산주의자를 척결하고 있으니 국민은 발전을 위해 총화 단결하라는 것이다. 그런 대행적 증오의 주체가 바로 국가다.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여 국민적 증오를 대행한 것이다. 이런 대행된 증오는 종종 국민에게 전시될 필요가 있다(p113)라고 서술한다.
이 ‘파괴적 증오’의 권위주의 체제에 어울리는 것이 서북 출신의 장로교도들이었다면, ‘생산적 증오’의 신권위주의 체제에 적응하여 급속성장한 것이 조용기 등의 “탈정치화 기조의 성장지상주의적 신앙”(p119)이란 것이 김진호의 설명이다. 권위주의 시대 “맥아더나 그의 장교들과 가장 닮은 한국의 사회적 세력은 개신교, 특히 서북계 월남자인 장로교 엘리트와 신자였”(p109)기에 성장한 “당시까지 개신교의 주류였던 월남자 기독교 지도자들”(p116)이 “대중이 겪고 있던 온갖 고통이 신의 심판의 결과라고 선포했고, 그것은 공산주의자 때문이라고 외쳐댔다”(p116)면, 조용기 등은 “(그 증오를) 자신의 질병에서 낫고자 하는 열망으로 전환하게 했고, 가난에서 탈출하려는 욕망으로 분출하게 했다”(p117)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민주화 이후 신권위주의 체제와 흡사해서 청산의 대상이 되고 성장이 지체된 교회가 새로이 과거의 ‘파괴적 증오’를 답습한 것이 1989년 결성된 한기총 이후 새로운 교회의 보수화 흐름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1997년 이후 두 번 민주 정부가 집권한 이후 교회와 교회가 운영하는 각종 기관에 대한 사회적 감사의 요구가 빗발치는 것에 대해 교회는 이러한 시민사회의 요구는 마치 1940년대 중반 북한에서 토지개혁으로 교회와 교인의 재산을 침탈한 것과 유사한 공산주의적 기획으로 해석했던 것”(p125-126)이라 설명하고 있는데, 개신교 극우주의의 청산과 교회개혁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시사점과 고민을 던지는 분석이다.
작은 조각 '모멘툼', 어떤 파장 던질까?
남상욱이 쓴 4장 <현대 일본의 극우주의와 생-정치>는 일본에서 300만부가 팔려나간 극우 작가 햐쿠타 나오키의 <영원의 제로>가 보여주는 가미카제에 대한 새로운 의미화의 방식을 분석하면서, “오늘날의 극우주의는, 지금 여기에 있는 생과 존재를 하찮게 여기고 국가와 민족과 전체주의라고 하는 이데아에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지금 여기의 자신의 생/유전자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의미임을 주장하는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p148)라는 매우 통찰력 있는 지적에 도달한다.
남상욱은 일본 좌우파가 ‘생/명/활’에 대한 지나친 강조와 의미부여에 천착하게 되면서 현재의 극우파들에게 무장해제가 되었다고 지적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의 연원을 다시 일본 제국으로 소급하고 만주국의 기시 노부스케, 그리고 현재의 아베 신조로 내려오는 논의는 탁월하기는 하나, ‘생/명/활’에 대한 지나친 강조와 의미부여가 한국 사회의 보수담론과 (심지어) 진보담론에서도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연계되는 분석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이 다소 아쉽다. 한두 군데의 서술은 필자가 일본은 ‘가해자’이기 때문에 그런 식의 사고를 해서는 안 되며 한국은 ‘피해자’이기에 그래도 괜찮다는 식의 편견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준다.
또 문순표가 쓴 5장 <극우와 계몽의 변증법>은 극우와 보수가 분간되지 않은 사회에서 ‘일베’ 등 극우를 계몽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과연 실효성이 있는지를 과거 안티조선 운동의 경험을 통해 성찰한다. 1990년대의 안티조선 운동과 그것을 회고하고 이어 나간 논자들의 2000년대의 글, 그리고 이를 해석하는 다양한 지적담론에 대한 매우 꼼꼼하고 흥미로운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라고 쓴다는 것은 서평자가 보기에 재미있어 보이기는 한데 1/3 정도는 이해가 안 가서 한 번 더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기획으로 돌아오면 이 책은 ‘모멘툼’이라는 제하의 무크지의 1편임을 광고하고 있다. ‘모멘툼’의 창간사에서 이택광은 “단행본과 잡지가 진지전이라고 한다면, 잡지와 단행본의 장점을 살린 무크지는 유격전이라고 할 만하다”(p6)며 창간의 포부를 밝히고 있다. 처음에는 운동 가속도의 향방, 곡선위 한점 기울기를 말하는 그 ‘모멘텀’(Momentum)인줄 알고 무심히 넘겼다가 미세한 철자의 다름에 당황하여 검색해보니, ‘모멘툼’(moméntum)은 라틴어로 움직임, 무게, 작은 분량 및 조각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서평가에겐 이 기획이 ‘지금 이 순간’이란 작은 조각을 분석하겠다는 의지와,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을 내도 양해해달라는 유쾌한 농담을 함께 품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240페이지의 분량인 이 책은 내용이 촘촘하여 막상 읽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책값이 어떤가 봤더니 만이천 원이다.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 폭등할 책의 실질가격을 생각해 보건대, 200페이지 정도의 만 원짜리 책을 기획해 보는 것이 어떨까란 잡생각도 하게 되지만, 어차피 책 좋아하는 이들은 도서정가제 시행 직전 할인판매의 대열에 향후 일이년은 책을 안 살 기세로 미칠 듯이 지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예상되는 ‘빙하기’를 얼마 남기지 않고 탄생한 이 창간호 무크지의 향후 행보에 즐거운 마음으로 관심을 기울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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