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감미로울 수도 있겠지만

"과연 남녀 사이에 친구라는 관계가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아주 케케묵어서 다시 꺼낼 필요가 있을지 의구심이 생길 정도입니다. 이 여부를 묻고자 새삼 도전한 영화가 <왓 이프>입니다. 월레스는 여자친구의 배신으로 이별하고 1년 넘게 두문불출한 채 폐인으로 지냈습니다. 다행히 친구가 연 파티에 참석해 억지로 기분을 달래다가 마침 맘에 쏙 드는 샨트리를 만납니다. 구세주가 나타났던 것 같은 순간도 잠시, 샨트리에게는 오래 사귄 남자친구가 있는 바람에 마음을 접습니다. 그러나 우연하게 마주친 두 사람은 합의(?)를 통해 친구로 지내자는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점점 어울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월레스의 감정은 커지지만 선뜻 고백할 수 없는 중에 샨트리의 남자친구는 타국으로 발령을 받습니다.

자, 여기까지만 봐도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는 훤합니다. 아니, 영화를 보기도 전에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사실 제가 <왓 이프>를 보려고 했던 이유도 이것이었습니다. 뻔한 영화가 보여주는 소박하고 일상적인 이야기가 자극적인 영화 틈에서 감성을 적셔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막상 보니 정말 너무 뻔해서 당황스러울 지경이더군요. 월레스와 샨트리의 관계는 흔하디흔하게 볼 수 있는 '친구 아닌 친구'였습니다. 뭐 이것까지는 그래도 좀 심심할지언정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으니 괜찮습니다. <왓 이프>의 문제는 월레스가 겪는 고민과 갈등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이클 도즈 감독은 내내 피상적인 관찰자로만 머물면서 영화를 그럴 듯한 로맨스로 남겨두려고 합니다.

극 중에서 월레스의 친구이자 샨트리의 사촌은 "지저분하게 시작한 관계는 지저분하게 끝난다"고 말합니다. 샨트리에게 이미 좋은 남자친구가 있으니 포기하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레스는 당연하게도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합니다. <왓 이프>를 보면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 어떤 과정을 겪으면서 어떻게 결론에 도달하는지입니다. 반면 정작 영화는 월레스의 갈등과 불안을 친구와 주고받는 단 몇 마디로, 그나마 이것도 진부하디 진부해서 안 들어도 지장 없을 대사로 처리하는 게 고작입니다. 더 가관은 결말입니다. <왓 이프>의 결말은 알고 보면 파렴치한 작태로 이루어진 관계를 시종일관 순수한 동화로 포장하다가 고질적인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현실에선 둘 다 파렴치한

앞에서 <왓 이프>는 "남녀 사이에 친구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영화라고 했지만 실상은 "남녀 사이에 친구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의 또 다른 증명입니다. 물론 불가능하다고 단정하는 건 불확실성과 예외를 철저히 배제하려는 아집이겠지만, 반대로 "남녀 사이에 친구가 가능하다"는 것도 결코 쉽게 인정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왓 이프>의 두 주인공을 한번 보세요. 월레스는 샨트리를 이성으로 좋아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친구인 척'하면서 친구로라도 곁에 있으려고 합니다. 즉 이 자체로 두 사람의 관계는 애초부터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샨트리라고 해서 다를 건 없는 걸 넘어서 어쩌면 <왓 이프>에서 월레스보다 더 뻔뻔한 인물입니다. 샨트리는 남자친구와 함께할 수 없는 시간에 월레스를 마치 대용품 내지는 대체인물로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남자친구가 타국으로 발령을 받고 난 후에는 더 심합니다. 스스로에게 "남자친구가 없으니 괜찮아"라며 환경적이고 심리적인 정당성을 부여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만나면서 외로움을 달랩니다. '친구'라는 관계의 범주는 샨트리가 죄책감을 가지지 않기 위해 손에 쥐고 있는 방패일 뿐입니다. 이것이 억지가 아니란 사실을 결말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만약 샨트리도 감정을 쌓지 않은 정말 순수한 친구로만 지낸 상태였다면 하필 결정적인 지점에서 대뜸 연인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얼마 전의 <타임 투 러브>도 그렇고 <왓 이프>도 그렇고, 대체 왜 이런 사랑을 아름답게 포장하지 못해서 안달인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습니다. 두 영화가 모두 주인공들의 사랑은 애틋하고 간절한 것으로 한껏 다루면서 정작 그들로 인해 직간접적으로 상처를 받고 실의에 빠진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영화들은 "내 사랑을 위해 다른 사람의 사랑을 파괴하고 해치는 것 따위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도 괜찮다"고 가르치는 꼴입니다. 그래서 <왓 이프>는 "사랑은 원래 지저분한 거야"라는 명언을 남깁니다. 남자친구가 있는 걸 아는 건 물론이고 만난 적도 있으면서 옆에 계속 머물며 기회를 노린 셈이나 다름없는 월레스도, "난 널 친구로 대했는데 넌 날 속였어"라고 했지만 실은 대뜸 그와 사귀는 샨트리도, 모두 지저분하기 짝이 없습니다.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예의와 양심이 있으면 미안한 줄은 알아야지!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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