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사가 기업을 비판하는 보도를 준비하거나 내보내면 기업 관계자들은 부리나케 편집국과 보도국을 찾아온다. ‘제목이 좀 세다, 톤다운(tone down)이라도 부탁한다’는 경우도 많고 알게 모르게 광고와 기사를 바꾸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특히 한국의 재벌은 회장님과 본사 이름이 나오는 것에 민감하다. 가까운 예를 들자면, ‘SK텔레콤의 단말기를 유통·판매하는 계열사 SK네트웍스가 대구·경북지역에서만 대포폰 십만 대 이상을 개통해 검찰이 이를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하려던 JTBC 보도국에는 SK텔레콤 임원이 찾아가 ‘SK텔레콤’이라는 이름만 빼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기업의 보도국 방문에 손석희 보도부문 사장은 대노했고, JTBC는 리포트 순위를 끌어올린 것으로 전해졌다.

아무리 “관계가 팩트보다 더 중요할 때가 있다”고 하지만 기자가 작심하고 발로 뛰어 사실을 확인한 보도에서 기업 이름이 빠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만약 언론이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발생한 백혈병 환자에 관한 소식을 “한 대기업 반도체 공장에서~”라고 보도한다면 독자와 시청자는 그 문제적 기업이 어딘지 알 수 없다. 다른 매체의 후속 취재에서 이름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지만, 만약 그 기사가 단독기사라면 ‘물 먹어 자존심 상한’ 다른 매체 기자들은 받아쓰지도 않는다. 물론 해당기업은 적극적으로 기사 확산을 막는다. 독자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에 돌고 있는 정보로 기업을 알아내고, 이름을 가린 언론사를 두고 ‘광고나 협찬 같은 딜이 있었겠지?’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 JTBC 리포트 갈무리.
▲ JTBC 리포트 갈무리.

6일 밤 언론사와 광고주의 ‘딜’을 의심하게 하는 보도가 있었다. JTBC와 LG유플러스 이야기다. JTBC <뉴스룸>은 이날 <“노동청에 알려달라”…이통사 고객센터 상담원의 죽음>이라는 제목의 리포트에서 회사의 노동착취와 수당미지급 등을 폭로한 유서를 남기고 지난달 21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상담사 이아무개(30)씨의 이야기를 보도했다. 이씨는 회사의 부조리를 꼭 노동청과 미래창조과학부, 방송통신위원회에 알려 달라 부탁했다. JTBC는 <뉴스룸>을 시작하며 세 번째로 이 리포트가 나갈 것을 예고했다. 신문으로 따지면 사회면 머리기사다. 리포트 역시 5분28초로 길었다. 이호진 기자는 유가족과 지인은 물론 이씨의 전 직장동료와 관리자를 만났다. 이씨가 고발한 내용은 사실로 보였다.

그런데 리포트 어디에도 이씨의 직장이 ‘LG유플러스 고객센터’라는 사실이 없다. 손석희 앵커는 이 리포트를 소개하며 ‘LG유플러스’를 ‘한 통신 대기업’으로 표현했다. JTBC는 이씨 친구의 말에 나오는 ‘LG’를 ‘○○’으로 처리했다. “저희도 알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에요. 진실된 것은 OO만 알고 있겠죠.” 고객센터가 있는 전북 전주를 직접 찾아가 촬영했는데도 해당 업체의 이름이 있는 곳을 전부 ‘블라인드’ 처리했다. 어이없는 해명을 늘어놓는 관리자가 나오는 대목에도 ‘LG’는 없다. “00고객센터 관계자 : 개인적으로 남아서 일하는 경우가 있어요. 가라고 했는데 안 가는 걸 어떻게 합니까.” JTBC는 시청자가 문제기업의 정체를 절대 모르게 리포트를 편집했다. LG는 불끄기에 성공했다.

JTBC는 고발내용을 알려달라는 이씨의 ‘부탁’을 져버렸다. 기자에게 유서를 건네고 “자기가 목숨을 끊을 정도가 됐으면 뭔가 이유가, 깊은 내막이 있을 것”이라며 아들의 뜻에 따라 노동청에 진정을 낼 계획이라는 고인의 아버지의 심정은 또 어떨까. JTBC의 수상한 비판보도로 기분이 좋은 사람들은 LG그룹과 LG유플러스 경영진과 홍보팀뿐이다. 손석희 앵커와 이호진 기자가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한 배경에는 ‘깊은 내막’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발’을 준비 중인 아버지가 ‘LG’를 빼달라고 부탁했을 리는 없다. 전적으로 손석희 보도부문 사장과 JTBC 보도국의 판단이다. LG유플러스가 어떤 ‘딜’을 제안했는지는 모르겠다. LG유플러스 비판보도에 LG유플러스는 없었다는 결과만 남는다.

▲ JTBC 리포트 갈무리.
▲ JTBC 리포트 갈무리.

더구나 JTBC는 또 다른 기업의 이름도 가렸다. 씨앤앰텔레웍스다. JTBC는 LG유플러스 리포트에 이어 <‘미소’ 부족하면 감점…상담원들, 회사 감시 속에 고통>이라는 제목의 앵커-기자 대담 리포트를 내보냈다. 고객센터 상담사들이 회사의 일상적인 감시를 받으며 일하고 있고, 부당한 상품판매를 강요받고 있다는 내용이다. JTBC는 “한 통신회사의 근무 평가” 자료를 공개했다. “생동감이 부족한 음성”으로 응대하거나 “반론을 극복하거나 재권유를 하지 않고 고객의 의사에 따라서 평이하게 가입으로 연결이 되면” 평가에서 5점을 감점하는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황당한 내용이다. 문제는 이 기업이 종합유선방송사업자 씨앤앰의 계열사인 씨앤앰텔레웍스인데 JTBC는 ‘한 통신회사’로 처리했다.

기자는 며칠 전 JTBC가 LG유플러스와 씨앤앰을 취재 중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전해 들었다. 다른 언론사가 ‘단독’ 취재 중인 사안에 대해서는 취재원도 잘 알려주지 않을뿐더러 불완전한 정보로 대충 기사를 내보내 다른 언론사가 발로 뛰어 만든 단독을 가로채는 것은 도리에도 어긋나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다. JTBC를 인용하거나 추가 취재해 기사를 쓸 생각이었다. 그런데 6일 밤 JTBC 리포트는 매체비평지 기자가 보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기업의 보도국 방문에 대노했다는 손석희 사장은 직접 기업 이름을 가렸고, 시청자에게 문제적 기업의 실체를 알 수 없게 했다. “더는 타협하지 말라”는 말을 조언이랍시고 건네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할 말은 이것뿐이다. 더는 타협하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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