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다리고 기다리던 <인터스텔라>를, 그것도 아이맥스로 막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결론을 말씀드리기가 참 애매하네요. 굳이 간단하게 굿과 배드 중에서 하나만 고르라는 잔인한 요구를 하면 후자에 더 가깝습니다. 북미에서 나온 <인터스텔라>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감을 잡고 맘의 준비를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예상했던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그래비티>를 봤을 때와 비교하라고 한다면, <인터스텔라>는 그때 가졌던 환희의 3/5 가량 되는 것 같습니다.

2. 지금의 복잡한 심경을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이어서 좋았고 크리스토퍼 놀란이어서 실망했다" 왜 북미 반응 중에서 "<인터스텔라>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최고와 최악을 모두 갖고 있다"라는 게 있었죠? 제 감상이 딱 이것이었습니다. 만약 크리스토퍼 놀란이 아닌 다른 감독이 연출한 거였다면 지금보다는 만족도가 컸을 겁니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에게서 이 이상의 것을 바랐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것과는 다른 결과물을 기대했습니다.

3. 혹자는 북미 반응을 두고 평론가들이 크리스토퍼 놀란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거나 다른 부정적인 편견으로 점수를 낮게 줬다고 하시더군요. 제가 본 바로는, 아니요, 제 생각은 그 반대입니다. 오히려 크리스토퍼 놀란이라서 <인터스텔라>의 평점은 더 낮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론가들이 반길 타입의 영화는 아닌 것 같습니다.

4. 북미 반응 중 또 하나는 이랬습니다. "만약 당신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면 <인터스텔라>는 굉장한 영화일 것이다" 이 표현에도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왜 이 영화를 탐냈었는지도 이해했습니다.

5.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고요? <인터스텔라>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로는 전에 없이 감성으로 가득합니다. 즉 방금 말했다시피 만약 <인터스텔라>를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했더라도 지금과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마저 했습니다. 누군가 '신파'라는 노골적인 단어를 쓰더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연출)과 조나단 놀란(각본) 모두 다크 나이트 삼부작과는 거리가 꽤 있습니다.

6. <인터스텔라>의 틀은 논리의 정점인 과학으로 이뤄졌지만 그것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따뜻한 온도를 넘어 펄펄 끓는 뜨거운 감성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원활하게 섞여서 온전한 물체를 구성하진 못했다는 것입니다. 서로 이질감을 드러내면서 충돌하고 이성은 감성을 위해 희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생각하지 않으면 굉장한 영화"라는 표현도 그래서 나온 것 같습니다. <인터스텔라>가 계속해서 주창하는 이 감성에 휩쓸린다면 확실히 만족도는 클 것입니다. 반대로 거기에 동화되지 못한다면 실망하기 십상일 것입니다.

7. 크리스토퍼 놀란이 전작 중 하나인 <인셉션>에서 마지막에 보여준 애절한 비애를 기억하시죠? <다크 나이트>에서는 레이첼을 잃고 실의에 빠진 브루스 웨인도 있었습니다. <인터스텔라>는 그런 파장을 가진 감정이 거의 전체를 수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때때로 큰 전율과 감동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두 영화가 하나의 정서로서 이야기의 중심에 놓인 채로 무게를 잡고 있었던 것에 반해, <인터스텔라>는 내내 그것을 겉으로 표출하려고 해서 말썽이 생겼습니다.

8. 제가 알고 좋아하는 크리스토퍼 놀란은 아주 냉철하고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인터스텔라>를 보면서 그에게 이런 면도 있다는 것에 놀라고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건 제가 기대했던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인터스텔라>가 크리스토퍼 놀란의 실수나 실패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대신 그가 가진 능력을 100% 발휘한 영화가 아닌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연출의 포인트를 왜 이렇게 과하게 잡았던 것인지 의아하기만 하네요.

9. 한편으로는 "그래, 이게 인간의 본질이고 현주소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그걸 냉정하게 되짚어주고 있는 것인 동시에, 그래서 인류에게는 한계만큼이나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희망이 있다는 것 또한 전달하고 싶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사고관 때문에 감성에 초점을 맞췄을 수도 있겠고, 사실이라면 크리스토퍼 놀란다운 행동입니다.

10. 실은 <인터스텔라>에서 극 중 인물들의 태도를 보면서 "대체 저 사람들이 저기까지 뭐 하러 간 거지? 자신들이 왜 간 건지는 잊은 건가?"라는 회의적인 의문을 가졌었습니다. '인간'이 아닌 '인류'를 위해 과감한 모험을 떠난 사람들이라고 하기엔 사소하고 사적인 것에 연연하기에 그랬습니다. 결말부에 서서히 다다르면서 저렇게 생각을 바꿨는데...

11. 가장 실망스러운 결말을 보면서 다시 고개를 돌렸습니다. 이건 크리스토퍼 놀란다운 해법도 아니거니와 그 누가 제시한 결말이라고 할지라도 선뜻 동의하거나 박수를 보내기 어렵습니다. 스필버그의 영화였다면 이해했을지 모르겠네요.

12. 영상미는 큰 이견이 없을 것 같습니다. 아이맥스로 봤더니 정말 빨려 들어가는 것 같더군요. 중간중간 장대한 스케일을 전달하기도 하고, 우주선으로 벌이는 에피소드는 크리스토퍼 놀란답게 타이트한 긴장을 형성합니다. 특히 웜홀과 블랙홀의 묘사는 각본에 영감을 줬다고 하며 제작에도 직접 참여한 이론물리학자인 킵 쏜의 말마따나 상당한 위압감을 전달합니다. (킵 쏜은 그 어떤 영화보다 <인터스텔라>의 웜홀과 블랙홀이 사실에 가장 근접했다고 말했습니다)

13. <인터스텔라>를 아이맥스로 볼 이유는 충분합니다. 광활하고 암담한 우주를 담았다는 점에서는 <그래비티>로 이미 경험했던 것이지만, 타 은하계의 행성으로 설정하고 담은 이국적인 풍경도 아이맥스를 통해서만 가능한 가상의 대리만족을 선사합니다. 이왕 보실 거면 아이맥스를 택하세요.

14. 결론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감성적 호소에 동조하게 되면 틀림없이 만족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머리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매력이 반감할 것입니다. 이 역시 북미 반응 중 하나가 지적했던 것처럼 이야기에 허점이 군데군데 있습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저는 <인터스텔라>가 인류의 도전정신을 고취시킬 영화일 것으로 예상했는데 거의 다른 감정에 치우쳐져 있었다는 게 아쉬웠습니다. 맷 데이먼이 등장하는 부분이 가지고 있던 잠재력도 제대로 못 살린 것 같습니다. 그가 벌이는 일련의 행동에는 통일성이 없고 동기가 석연치 않아서 캐릭터를 낭비한 셈이 됐습니다.

15. 다행히 약 세 시간에 달하는 상영이 지루하진 않았습니다. 의외로 전반부를 빨리 마무리하고 우주로 나아가서 걱정을 덜기도 했습니다. (마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그것처럼 이 지점의 연출과 편집이 가장 좋았습니다) 하지만 <인터스텔라>에게 지금과 같은 긴 시간이 필요했는지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바꿔 말하면 긴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질 못했습니다. 지구에서 벌어지는 짜투리 장면마저 모조리 감성을 돋우는 데 쏟아붓고 말았습니다.

★★★☆

덧 1) 이번에도 아이맥스 타이틀 필름은 잘랐습니다. 그것 참 몇 초나 한다고 아이맥스를 보는 재미를 앗아가냐!? 근데 자막의 크기가 커졌습니다. 처음엔 거슬렸는데 나중에 적응을 하니까 눈이 편안한 게 오히려 보기 좋았습니다.

덧 2) <인터스텔라>에서 최고는 매튜 매커너히의 연기였습니다. 오직 그만이 심금을 울리는 요소였습니다.

덧 3) 인류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건 도전정신과 모험정신 이상으로 큰 사랑과 애정, 믿음입니다. 적어도 이것만큼은 저도 동의합니다. 표현과 묘사가 과했다는 것이 좀 불만이어서 그렇지 놀란 형제의 주장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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