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따뜻한 이해준

이해준 감독의 영화를 참 좋아합니다. <김씨표류기>는 물론이고 데뷔작인 <천하장사 마돈나>도 기발한 아이디어로 시작한 참신한 이야기가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결정적으로 좋았던 건 두 영화가 모두 다른 인간과 섞이지 못하고 사회에서 격리된 자를 소재로 했다는 것입니다. 공통적으로 결코 함부로 접근해선 안 될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음에도 현실을 조명하는 동시에 따뜻한 시각으로 품었다는 점에서 쉽게 잊을 수 없었습니다.

세 번째 영화인 <나의 독재자>도 그럴 것으로 예상하고 관람했으나 안타깝게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무명의 연극배우가 남북공동회담을 앞두고 김일성의 대역을 준비한다는 아이디어는 여전히 돋보였습니다. 이것을 한 남자가 짊어진 아버지로서의 정체성 고민을 위한 고군분투로 연결시켰다는 것도 시도는 좋았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시도는' 좋았습니다. 이해준 감독답게 <나의 독재자> 역시 별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두 갈래의 이야기를 자연스레 겹쳐서 하나의 주제로 이끌어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독재자와 아버지라는 소재를 한데 녹이고 균형을 잡는 데 실패했습니다.

<나의 독재자>에서 이해준 감독이 아버지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택한 독재자, 구체적으로 북한의 김일성은 무게감이 지나치게 컸습니다. 더욱이 배경은 우리나라에서도 유신독재가 일어나 정치적으로 한창 시끄러웠던 1970년대입니다. 왜 굳이 그 시대로 돌아가서 김일성을 불러들였는지는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아마 격동의 시대를 살아왔던 지금의 아버지 세대를 위한 작은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잘 표현된 장면이 버스를 타고 돌아가던 김성근(설경구)가 최루가스로 가득한 거리를 지나면서 창밖을 보다가 환상에 빠지던 것입니다.

과도한 애정은 독으로 작용하고

<나의 독재자>의 가장 큰 패착은 바로 이것입니다. 전반부는 김성근이 무명배우로 시작해 실패를 겪고 김일성의 대역으로 캐스팅됐으나 역사의 농락에 또 한번 휘둘리기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필요 이상으로 상당히 컸습니다. 시간으로 봐도 그렇고 이야기로서의 기능으로 봐도 그렇고, <나의 독재자>는 무기력했거니와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던 아버지의 자화상을 이해준 감독 특유의 측은지심으로 에워쌌습니다. 의도는 좋았으나 워낙 가볍게 볼 수 없는 인물과 시대를 공유했고 설경구의 명연기까지 더해져 마치 전반부만으로 영화가 끝날 것 같았습니다.

반면 중반부에 바통을 이어받아 등장하는 아들(박해일)의 에피소드는 톤이 극명하게 달라져서 순식간에 관객의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이미 <나의 독재자>는 '아버지'라는 이름의 기성세대에게 가진 애착이 다소 과한 바람에 결과적으로 전체 이야기의 균형을 잃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아버지가 이른 시점부터 한껏 절정으로 끌어올린 페이스를 아들이 나오자마자 바닥으로 끌어내렸으니, 설경구의 연기가 주도하는 마지막 몇 분의 클라이막스까지 가는 과정은 내내 지루했습니다. 내적으로는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희생했지만 외적으로는 그 반대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설상가상 <나의 독재자>는 수도권 재개발 바람이 불었던 1990년대 안에서 자본주의의 난립과 부권의 몰락을 연계하고, 그 은유로 허허벌판 한가운데 남은 낡은 집을 중심으로 펼친 중반부에서는 재치와 유머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독재자>는 결국 소외된 자들에 대한 영화고 그들의 자아를 찾는 여정이었습니다. 아울러 관객을 향해 당부도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대 아버지들의 비애를 헤아려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나의 독재자>는 셰익스피어의 이른바 4대 비극 중 하나라는 <리어왕>으로 문을 열고 닫습니다. 이 장면에서는 공통적으로 "나를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라는 그 유명한 대사가 나왔습니다. 이것은 아첨한 두 딸에게 모든 걸 내줬으나 끝내 버림받고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고 마는 리어왕이 남긴 말이었습니다. 과연 우리 중에 우리의 아버지가 누군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요? 여러분은 종종 독재자와 권위주의의 상징으로 떠오르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비록 실망스러웠지만 아마 <나의 독재자>를 보면 많은 분들이 아버지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은 얻을 것 같습니다.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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