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대망론’이 다시 한번 등장했다. 여론조사전문기관인 한길리서치가 지난 17일과 18일 이틀에 걸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반기문 총장이 무려 39.7%의 지지를 얻어 차기 대선후보로서 압도적인 지지율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반 총장의 지지율은 1위일 뿐 아니라, 박원순 서울시장(13.5%)과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9.3%),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4.9%), 안철수 의원(4.2%)의 지지도를 다 합친 것보다 많은 수치다.

현 시점에서 반기문의 지지율은 어느 정도 의미가 있는 것일까? 정말, 반기문의 존재는 2017년 대선에 변수가 될 수 있을까?
먼저 반기문은 직선제 개헌 이후 줄곧 존재했던 ‘무당파 제3후보’의 계보를 잇는다고 평가할 수 있다. ‘1노3김’(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모두 나와 지역할거 정치구도를 형성한 1987년 대선 이후 ‘무당파 제3후보’로 나선 정치인들은 언제나 존재했다. 1992년 대선의 정주영과 박찬종, 1997년 대선의 이인제, 2002년 대선의 정몽준이 그런 이들이었다 볼 수 있다. 2007년 대선에선 고건이 그 위치를, 2012년 대선에선 안철수가 그 위치를 점유했다.
따라서 반기문 총장이 차기 대권주자로 부상하게 된 현실은 일차적으로 ‘안철수 현상’의 소멸을 공식화한 것이다. 무당파 유권자들은 ‘신상’(새로운 상품)을 선택했다. 안철수는 재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일단은 자신의 정치적 지분을 상실한 상황이다.
▲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9월 23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 공동주재로 열린 유엔기후정상회의 '기후재정' 세션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음으로 생각해봐야 할 것은 그간 ‘무당파 제3후보’들의 운명이 썩 순탄치 못했다는 것이다. 1992년과 1997년의 대선에서는 자신들이 기대한 것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고, 그후 세 번의 대선에선 아예 대선에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왔다. 2002년 대선과 2012년 대선에선 후보단일화에서 패배했고, 2007년 대선 고건은 창당을 준비하다가 대선 출마를 포기했다. 이처럼 현재 한국의 선거제도에선 무당파든 좌파든 제3후보가 선전하고 성과를 내기 힘든 상황이다. 제3정치세력으로 안정적인 지분을 확보했던 건 ‘충청도 지역주의’ 정당들 뿐이었다.
그러나 또 하나 생각해봐야 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당파 제3후보’에 대한 열망은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열망의 저변은 커져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제3후보들은 주로 ‘영남의 비여권성향 지지자’들을 지지기반으로 가졌다. 그들은 김영삼의 3당합당으로 ‘야당 선택지’가 사라진 것에 대한 불만은 가졌지만 차마 ‘호남당’(이라고 그들이 생각한 민주당)은 찍을 수 없었던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래서 1992년의 김대중은 정주영과의 단일화를 고려하지 않았고 1997년의 김대중은 이인제가 영남표를 깨주는 바람에 당선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안철수 현상’부터는 다른 현상이 감지되었다. 안철수는 한때 오랫동안 친노세력이 강세를 보였던 수도권 중간층들에게도 인기가 있었고, 무엇보다 친노세력에 반감을 가진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의 지지를 받았다. 이는 ‘수도권과 호남에 거주하는, 반새누리 성향이나 현재의 제1야당에 불만이 많거나 그들의 승리 가능성을 낮게 보는 야당 지지자’의 지지라고 해석되었다.
결국, 제대로 된 정당 조직이나 거점지역을 가지지 못한 ‘무당파 제3후보’가 한국 사회에서 성공하기 힘들다는 현실은 여전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당파 제3후보’에 대한 열망이 실체가 없다고 말하면 곤란하다.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9월 22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 사무총장 관저에서 반기문 사무총장을 만나 환담하고 있다. (연합뉴스)
‘안철수 현상’이 보여준 건 이젠 무당파가 너무 많아져 새누리당 지지자나 민주당 지지자와 비슷한 규모를 형성할 정도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한국 사회의 정당이 다수 시민들을 대의하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현실에서 ‘안철수 현상’은 자라났다.
비록 안철수 의원이 민주당과 합당하여 새정치민주연합을 만든 이후 그 정당은 이들의 지지를 붙드는데 실패했지만, 어느 쪽도 지지할 수 없는 이들의 숫자가 많은 것은 여전한 현실이다. 반기문의 39.7%라는 지지율도 이들의 총합, 즉 ‘영남의 비여권성향 지지자’와 ‘수도권과 호남에 거주하는, 반새누리 성향이나 현재의 제1야당에 불만이 많거나 그들의 승리 가능성을 낮게 보는 야당 지지자’의 합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국 사회의 시민들이 정치의 기능을 체계를 통해 복원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 수혈되어 ‘더러운 정치’를 정화해줄 ‘메시아적 개인’을 염원하는 것은 분명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을 ‘문제’라고 규탄하는 것만으로 정치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 이들의 열망을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 조직하여 정치세력이 정치권력을 획득하여 관료조직을 통제하고 이를 활용해 경제권력을 통제하도록 할지에 대한 고민이 절실히 필요하다.
‘안철수’와 ‘반기문’의 역량이 한국 정치의 문제를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검증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건 쉽지만, 사실은 기성정치인 역시 그런 부분에서 검증하는 체계가 전혀 작동하지 않은 것이 한국 정치의 서글픈 현실이다.
▲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 9월 23일 오후(현지시간) 유엔본부에서 반기문 사무총장과 만나고 있다. 이 자리에서 박 시장은 유엔 산하 노인·장애인 인권 분야 국제기구 서울 유치 방안을 반 총장에게 제안했다. 이에 반 총장은 적극 협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서울시 제공) (연합뉴스)
정치인으로서의 반기문이 권력을 획득하고 정치에 성공할 가능성은 물론 높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이 '반기문 카드'를 내세워 '무대' 김무성 대표를 길들이려 한다는 시선도 있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UN 사무총장 임기는 2016년 말에 끝나기에 그때까지 반기문은 스스로 대선주자를 자처할 수 없다. UN 사무총장에서 물러나면 그에겐 1년의 시간이 남지만, 1년은 양당 중 하나를 장악하거나 새 정치세력을 만들어내기엔 충분하지 못한 시간이다. 정치세력을 만들려면 2016년 총선에 개입해야 하지만 반기문에겐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변수가 하나는 있다. 개헌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나 우윤근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가 원하는 스케줄대로 개헌이 이루어져 2016년 총선에서 국민투표를 함께 실시하여 이원집정부제가 실시된다면 여지가 조금은 생긴다.
권력의지가 대단한 새누리당이라도 현행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대선후보를 당내 기반이 없는 사람에게 넘기긴 어렵다. 그러나 대통령과 총리의 권력이 비등하게 된다면 대통령 후보는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이에게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다면 새정치민주연합에서도 ‘반기문 카드’를 적극 고려해볼 수 있다.
그러나 개헌의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도 말하기 힘든 지금 이러한 예측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불구하다. ‘반기문 1위’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그러한 ‘시나리오’가 아닐 것이다. 앞서 분석한 바대로, 안철수나 반기문에 대한 시민의 열망을 어떤 식으로 다르게 조직해야 한국 사회의 정치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요구되는 상황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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