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정부 당국부터 주최 측, 개인들 모두가 인간의 생명을 지키려는 의식이라곤 갖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우리나라에선 이런 일이 한 달이 멀다 하고 터져 나오고 있고 어느 곳, 어느 시설 하나 안전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곳이 없다. 정부나 국회가 안전 대책을 세우겠다고 나서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에 국민은 절망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벤트 행사를 여는 기업들을 믿을 수도 없다. 우리 사회에 만연하는 안전 불감증(不感症)의 수렁에서 살아남으려면 각자가 모두 제자리에서 자기 목숨을 챙기는 '안전 우선(Safety First) 행동'을 하는 수밖에 없게 됐다.”
20일자 <조선일보> 사설 <환풍구 붕괴, '生命 존중'이 이토록 빈약한 나라로 머물 건가> 중에서

“그제 아이돌그룹 ‘블락비’ 공연장에선 진행자가 지속적으로 안전을 당부하고 관람객들도 호응해 질서정연하게 진행됐다. 공연장이든 경기장이든 스스로 위험한 행동을 자제하고 규칙을 지켜 안전사고를 예방하는 시민의식이 절실하다.”
20일자 <동아일보> 사설 <제2 판교 참사 예고하는 도심 속 ‘시한폭탄’ 환풍구> 중에서

“정부와 시민사회는 스스로의 안전의식에 문제가 없는지 철저히 성찰해야 한다. 특히 정부는 전국에 산재한 위험시설을 점검하고 국민에 안전 경각심을 높이기 위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민ㆍ관을 막론하고 사회 전반에 만연한 안전불감증이야 말로 각종 참사의 근원임을 명심해야 한다. 부디 이번에는 후진적 안전사고에서 벗어나 보자.”
20일자 <한국일보> 사설 <변함없는 안전불감증, 시민의식도 문제다> 중에서
▲ 20일자 조선일보 1면 기사
‘참사’는 현재진행형이다. 18일 판교 환풍구 붕괴 사고에 대한 일부 보수언론의 반응이 이렇다. 이들도 구조의 문제를 모르기 때문은 아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신문 지면에선 판교 환풍구 붕괴 사고를 둘러싼 각종 구조적 문제들이 지적되어 있다. 위에 인용한 사설들에서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각성과 주의집중을 요구하는 언설이 난무한다. ‘시민의식’이란 단어로 외피를 둘러봐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이와 같은 반응을 예상했던지 같은 날 <한겨레> 사설에는 미리 이와 같은 태도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환풍구 위에 올라선 게 부주의한 행동이었다며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른바 ‘합리적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인데, 이는 위험하고도 무책임한 발상이다. 우리 주위에 도사린 모든 위험을 일일이 헤아려 행동하는 합리적 인간이란 이상적인 관념일 뿐이다. 환풍구만 해도 도심 곳곳에 쉽게 올라갈 수 있는 형태로 설치돼 있고 아예 인도처럼 사용되는 곳도 많다. 구조 자체를 수평이 아닌 수직으로 설치하든가 눈에 확 띄는 경고 문구를 붙여놓는 등 사전에 강구할 안전조처가 얼마든지 있는데, 이를 외면한 채 피해자의 부주의를 탓하는 건 본말 전도다. 선진국에서는 길거리 공사나 미끄러운 바닥 등 우리가 보기에 ‘사소한’ 위험요소에도 과도해 보일 정도의 경고문을 붙이고 차단장치를 설치한다. 유명한 ‘맥도널드 커피 소송’에서 보듯 경고 의무를 소홀히 한 쪽에 막중한 책임을 묻기 때문이다.”
20일자 <한겨레> 사설 <‘안전사회’ 만들라는 엄중한 경고> 중에서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구조’보다 ‘개인’의 책임을 먼저 보는 한국 사회의 오랜 보수성의 발현일 것일까. 차라리 그와 같은 것이라면 잘못된 관점을 비판하며 향후 태도의 개선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 보수언론들은 사회구조의 문제를 충분히 지적하고 한탄하면서도 굳이 위와 같은 당부를 덧붙이고 있다.
▲ 20일자 한겨레 3면 기사
그런 면에서 볼 때, 이것은 일종의 체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세월호 참사와 그에 대한 대처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어느 쪽을 편들었든 간에, 우리는 모두 한국 사회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조차 어떠한 정치적 전망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시민들을 질타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무지한 시민을 계몽한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당부는 부모가 자녀를 밖에 내보내며 “세상 험하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쯤 되면 공론의 역할을 포기한 셈이다.
<시사in> 369호에 기사로 실린 한 강연에서 <대한민국 부모>의 저자인 정신분석가 이승욱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고향 친구들과 모임을 갖는데, “우리가 공범이다”라는 얘기들을 해서 놀란 일이 있다. 대구에 사는 평범한 50대 가장들이었는데, “우리라고 선장이랑 달랐겠냐” “우리라고 배에 과적하는 것 막고 불법 증축하는 걸 막을 수 있었겠냐”라고 너나없이 한탄하는 거다. 이걸 보면서 세월호가 엄마들한테는 ‘굉장한 슬픔’으로 다가왔지만 아빠들한테는 ‘굉장한 죄책감’으로 다가왔구나, 싶기도 했다. 그렇게 부정과 비리에 눈감은 게 자기 한 몸 때문이었나? 아니다. 다 자식들을 위해 참은 거라 생각하며 살았을 텐데 그 자식이 죽어버렸으니, 가장 핵심적인 알리바이가 처참하게 사라져버렸으니….
<시사in>369호, <바로 그 '남들처럼'이 문제라니까> 중에서
그런 면에서 각성된 개인이나 시민의식을 강조하는 보수언론의 태도는 “이것이 구조의 문제인 것은 알지만 이제는 누구도 이 구조를 바꿀 수 없을 것 같다”는 직감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자 <중앙일보>의 사설 제목은 <판교 참사 … 소 잃고 외양간도 안 고친 대한민국>이었다. 이 사설의 말미는 “그만큼 소를 잃었으면 이젠 외양간도 좀 고치자”로 끝나고 있지만, 이 말이 이제는 매우 공허하게 들리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 20일자 중앙일보 3면 기사
20일 오전, 인터넷으로 <조선일보>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상단에 <中 여성 관광객, 명동역서 치마를 손으로 누르며… '기겁'>란 제목의 기사가 떠 있었다. 클릭을 해보면 20일자 3면에 실린 <人道가 돼버린 환풍구… 안전규정·경고문도 없다>란 제목의 기사다. 기사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거기 있으면 위험해요. 내려오세요!"

19일 오후 3시 5분쯤 서울 지하철 4호선 명동역 9번 출구 앞에서 관광 가이드가 놀라 소리쳤다. 그 직전 중국인 여성 관광객 8명이 지하철 환풍구 위로 올라갔다. 이들은 치마를 손으로 누르며 미국 여배우 메릴린 먼로 흉내를 내며 사진을 찍고 철제 덮개 위를 왔다 갔다 했다. 환풍구 덮개가 지지대와 부딪쳐 '탕탕' 소리가 나자 가이드가 기겁을 한 것이다.
이 기사의 ‘리드’는, 마치 인터넷판의 선정적 제목을 예상하고 쓰여진 듯하다. 현재 판교 참사와 관련해, 행사 주체가 누구냐는 문제에 대해선 성남시와 <이데일리>사가, 그리고 행사 안전 관리의 주체가 누구냐에 대해선 소방방재청과 문화체육관광부가 책임을 떠넘기는 중이다. 신문사 사람들은 “우리라고 그들과 달랐겠는가. 우리라고 끔찍한 사건났다고 해서 ‘낚시’ 제목 안 쓸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20일자 조선일보 3면 기사
<조선일보> 기자가 명동에서 관광객들을 관찰한 19일 오후엔 MBC 방송 <서프라이즈>에서 방영한 ‘잭더리퍼’의 정체에 관한 뉴스기사(?)가 모든 매체에서 쏟아지는 중이었다. 뉴스로선 한참 전에 나온 사안이, 재연방송 이후 누리꾼들의 관심이 쏟아지니 수십 개 매체에서 일정 시간마다 조회수 잡아채는 기사로 수백 개가 생산이 됐고 이 추세는 현재진행형이다.
'낚시'가 완료됐기 때문인지, 최소한의 양심이 작동했기 때문인지, 인터넷 <조선일보>의 <中 여성 관광객, 명동역서 치마를 손으로 누르며… '기겁'>란 제목의 기사는 오래지 않아 정상적인 제목으로 바뀌었고 뒤이어 기사 역시 탑에서 내려갔다. 이러한 언론의 모습 역시 ‘참사’겠지만 이를 ‘기자정신’만으로 바꿀 수는 없다는 걸 모두가 안다. 하지만 대책을 마련하는 게 아니라 “우리라고 달라겠나”라고 한탄만 하는 정서 속에서, 우리는 각자에게 조심할 것만을 당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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