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어느덧 6개월이 지났다. 웬만한 사건 사고라면 ‘다이내믹 코리아’ 안에서 벌써 잊혀지고도 남았겠지만 아직도 바로 어제 일어난 사고처럼 느껴진다. 이는 세월호 참사가 우리 사회에 남긴 트라우마의 방증일 것이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다. 이 사고가 아직도 우리 기억을 생생하게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건이 벌어진 직후 제기된 여러 의문들이 아직도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있기 때문이다. 15일과 16일 국정감사장을 뜨겁게 달군 논란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해경이 구조에 완전히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지, 이런 참사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 이유가 무엇인지 등에 대해 아직도 우리는 궁금증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 뿐만이 아니다. 이런 의문들을 해소하고 책임자를 처벌해서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염원이 담겨야 할 세월호 특별법 역시 만족스러운 수준에서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배상이나 보상 등은 필요없으니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해달라는 유가족들의 요구가 여당과 청와대에 의해 사실상 거부된 이후 대안으로 제시된 특별검사를 추천하는 과정에 유가족들의 참여를 보장해달라는 요구마저도 여당의 반대에 부딪쳐 제대로 논의되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의 대한민국은 완전히 달라야 한다”던 주요 인사들의 호언장담은 정치권에서 나오는 모든 이야기가 늘 그렇듯 스르르 녹아 없어져 버릴 것이다. 아니, 어떤 점에서 보면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의 대한민국’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조차 서로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달라지고야 마는 게 지금의 상황인 것으로 생각된다.

정치권은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국무총리부터 여야의 주요 정치인들이 모두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안전한 대한민국’은 어떻게 만드는가? 해경을 해체하고 국가안전처를 신설하면 되는 것인가? 관피아들을 척결하고 관과 민이 서로 감시를 잘 할 수 있도록 해주면 되는 것인가? 카카오톡 사찰로 범죄자를 미리 선별하고 선제적 조치를 취해 비극을 예방하면,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는가?

▲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6개월을 앞둔 가운데 15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단식농성장에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너무 냉소적인 전망이라고 말할 사람들이 있겠으나 감히 예측해보자면 그렇다. 국가안전처를 신설하는 것은 윗돌 빼서 아랫돌 괴고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것밖에 안 될 가능성이 크다. 해경이 하는 일을 국가안전처가 관리한다고 더 나아지리라는 보장이 어디있나? 또, 관피아들을 척결해 관과 민을 찢어놓아도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끈끈한 관계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한국 사회 돌아가는 원리가 그렇다. 카카오톡 같은 얘기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우리가 세월호 참사 당시에 제기했던 어떤 근본적 차원에 대한 문제제기를 다시 한 번 상기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단지 안전의 문제가 아니라 체제와 체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문제라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즉, 세월호 참사를 일으킨 원인으로 지목되는 유병언 일가의 전횡, 이를 위한 청해진해운의 극단적 이윤 추구, 이 때문에 일어난 세월호의 안정성을 떨어뜨린 과도한 증축 및 개조와 습관적인 과적 등은 이 모든 것을 꿈이 아닌 현실에서 가능하게 한 바로 체제의 문제로부터 배태된 것이다.

우리는 이 체제에 너무나 익숙해있다. 효율성을 위해서라면 최소한의 안전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와 과정을 편의적으로 뛰어넘는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한국선급이나 해운조합이 아니라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라면 누구에게 연안여객선의 안전검사를 맡겨도 그 모든 과정이 유명무실해지고야 말 것이다. 선박의 안전을 검사한다는 것은 만에 하나 일어날 일을 방지한다는 것인데 9999번의 경우에 쓸모가 없을 뿐인 일을 왜 일만번이나 반복하는 비효율을 고수하겠는가?

이런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차라리 거추장스럽다. 사람들의 의견을 대의정치가 잘 반영할 수 있도록 최선의 제도를 갖추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세상은 ‘비효율’과 ‘낭비’라는 이유를 들어 늘 그것을 거부한다. 국회의원을 늘리는 것은 세비를 낭비하는 것이며 더 많은 선거를 치르도록 하는 것 역시 비효율의 대표적 사례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차라리 선하고 능력있는 사람의 완벽하고 아름다운 독재이지 내 의견을 통치에 반영하는 게 아니다.

▲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난 4월16일 이후 6개월이 지났다. 15일 오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세월호 사고 희생자 정부 공식분향소 앞에 '진상 규명'이라는 글자가 적힌 대형 풍선이 하늘에 떠 있다. (연합뉴스)

우리가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철저한 것은 오직 ‘돈’과 연관된 것들에 한한다. 일하지 않으면 돈을 주지 않는 체제에 우리는 익숙하다. 최대한 적은 돈을 들여 애초에 되지 않았을 일을 기어코 되도록 하는 데 우리는 너무나 익숙하다.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들을 돈으로 따지고 그 돈이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을 때에 목숨을 거는 세태에 우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들어있다.

세월호 참사 역시 사실은 마찬가지였다. 참사 당시 일부 언론이 세월호 참사가 보여주는 것은 ‘체제의 위기’라고 주장했지만 그것이 정말 체제의 위기였다면 체제의 기득권들이 이렇게 여유롭게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그 수많은 고귀한 생명들이 사라져간 것을 제외하면 체제의 일상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40여일의 극단적인 단식을 감행한 유가족들과 그들의 안타까운 사연에 공감한 수많은 시민들의 힘이 아니었다면 세월호 참사는 마치 예정된 사건이 일어난 것처럼 매끄럽게 처리됐을 수 있다.

해양수산부와 해양경찰이 포인트만 잡아주면 귀책사유 정리하고, 인양하고, 보험금 지급하고, 보상하고, 국가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 배상금을 남긴 채 유병언 일가는 깔끔하게 또 다른 편법을 통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급된 막대한 보상금은 ‘리스크 분산’이라는 프로세스대로 보험사와 재보험사의 재무제표 상 수많은 숫자들 그 어디에 파묻혀 버렸을 것이다. 해경의 초기대응이 구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선체의 인양을 위한 것이 아니었냐는 의심은 이런 추론을 현실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게 한다.

그러므로 ‘세월호 이전과 이후의 대한민국’이란 바로 이런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다시 규정돼야 한다. 돈에 사람이 집어삼켜지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이 돈을 통제하는 사회로 전환되지 않으면 ‘세월호 이후의 대한민국’은 만들어질 수 없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요구 역시 바로 이러한 맥락을 잃지 않고 제기돼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의 문제의식은 무뎌지고 녹이 슬 것이므로 기회가 될 때마다 더욱 더 날카롭고 새롭게 벼려져야 한다. 그 역할을 언론이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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