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화 리더십’이 화제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화합과 타협의 리더십을 구현해 정치가 파탄에 빠지는 걸 막았다는 얘기다. 세월호 특별법의 여야 합의가 이뤄지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는 평가다. 직접적으로 협상에 개입하지 않았음에도 국회의장이라는 직위를 활용해 탁월한 정치적 묘수를 보여줬다고들 말하고 있다.

이 묘수의 시작은 지난달 26일 본회의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자신이 이미 확정한 일정대로 26일 본회의 개의를 선언했다. 본회의를 왜 시작하지 않느냐고, 어서 90여개에 이르는 법안들을 처리하자고 새누리당 소속 의원들이 주장하고 주장하고 또 주장한 결과였다. 하지만 개의 9분만에 30일 본회의를 다시 열겠다는 정의화 의장의 일방적 선언으로 이날 본회의는 싱겁게 끝났다.

여당인 새누리당은 그야말로 ‘뒷통수’를 맞았다는 분위기였다. 158명의 소속 의원 중 구속됐거나 해외 체류 중인 몇 명의 의원을 제외한 전원을 대기시켰던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비상의원총회에서 ‘사의’를 표명했다. 이완구 원내대표가 그만두면 아무래도 곤란해질 수밖에 없는 김무성 대표는 재빨리 사의를 반려했고, 의원들은 박수로 이를 추인했다. 분위기가 이렇게 되자 바쁘신 의원님들을 본회의장까지 헛걸음(?)하게 만든 이완구 원내대표 대신 정의화 의장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김재원 원내수석부대표가 장단을 맞췄다. “지금 정의화 의장님이 국회를 떠나셨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폭발 직전의 분위기였다. 일부 의원들은 국회의장 사퇴촉구결의안 발의를 입에 올렸다.

▲ 박근혜 대통령이 1일 충남 계룡시 계룡대에서 열린 건군 66주년 국군의 날 기념 경축연에서 정의화 국회의장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새누리당의 배신감은 정의화 의장이 새누리당 내 비주류 출신이라는 데에서 비롯됐다. 정의화 의장은 지난 5월 치열한 접전이 예상됐던 새누리당 국회의장 후보 경선에서 황우여 의원을 싱겁게 꺾고 승리했다. 황우여 의원은 친박 주류, 정의화 의장은 비주류로 분류됐기 때문에 이는 ‘이변’으로 받아들여졌다. 6월 지방선거 후보 경선에서도 당내 비주류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비주류 출신인 김무성 대표도 등장했다. 비주류의 세상이 오는가 싶은 시점에서 비주류 출신인 국회의장이 정부 여당이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만들었다. 친박 주류인 이완구 원내대표 입장에서는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만하다.

그리고 나서 다시 30일 본회의의 시점이 왔다. 새누리당 원내지도부의 입장에서는 26일에서 크게 변화를 맞지 않은 상황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 26일에 하지 못한 일들을 30일에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정치권을 향한 직접적인 비판 발언을 내놓은 것은 여당과 국회의장을 입장에서는 일종의 ‘압박’으로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비주류 출신인 정의화 의장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30일 본회의의 경우 아무리 정의화 의장이 정치의 달인이래도 안건을 처리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정의화 국회의장은 5시간을 버텼다. 애초에 30일 본회의 연기는 세월호 특별법에 대한 여야의 합의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최대한 시간을 주겠다는 게 정의화 의장 측의 입장이었다. 여야 원내대표와 유가족의 3자회동 이후 다시 유가족 측이 입장을 정리하고 새정치민주연합이 의원총회를 진행하는 동안 새누리당 소속 의원들은 끊임없이 본회의 개의를 압박했다. 말이 압박이지, 반은 애원이고 반은 협박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 정의화 의장의 ‘뚝심’이 정치를 복원했다는 언론들의 평가가 적절한 것 같다. 당내 친박 주류들은 박근혜 대통령을 닮아 앞뒤가 꽉 막혔지만 그래도 비주류들은 말이 통하는 데가 있는 것 같다는 얘기가 일부 네티즌 등을 통해 나오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정의화 의장은 18대 국회에서는 하반기 국회 부의장이었다. 의장은 당적을 버려야 하는 것과는 달리 부의장은 당적을 유지할 수 있다. 당시에는 국회선진화법이 지금처럼 무소불위(?)의 효력을 갖기 전이었기 때문에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권한이 살아있던 시기다. 하지만 아무래도 정치적으로 민감한 법안에 대한 일방처리를 입법부의 수장이 직접 결정하긴 어려우니 보통 이런 형태의 ‘날치기’는 의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여당 측 부의장이 총대를 메는 형식으로 귀결되곤 했다. 이 때 정부 여당이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하도록 망치를 휘둘러 준 사람이 바로 정의화 부의장이다.

오늘의 ‘뚝심의 정의화’와 ‘날치기 정의화’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었던 걸까? 그냥 단순비교하면 답은 쉽게 나온다. 첫째, 날치기 정의화는 집권 여당의 주류인 친이계 소속이었으나 뚝심의 정의화는 비주류 소속이다. 둘째, 날치기 정의화의 시대엔 의장의 직권상정 권한이 강했으나 뚝심의 정의화 시대는 상임위에서 여야가 합의하지 않은 법안을 직권상정시킬 수 없다. 정권의 요구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정치적 부담과 권한의 약화가 뚝심의 정의화를 만들었다는 아이러니다. 옛 공무원들이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들 했다는데 딱 그 꼴이다. 똑같은 개념을 김문수, 홍준표, 나경원, 원희룡 등 보수의 혁신을 책임질 사람들에게 적용해보자. 뚝심의 정의화와 혁신의 책임자들은 과연 세상을 더 살기 좋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