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언론과 기자는 저마다 객관성과 팩트를 강조한다. 그래도 독자는 안다. ‘그들은 하고 싶은 말만 한다’는 사실을. 자신을 능동적 수용자라고 생각하는 많은 시민들은 선호하는 방송뉴스를 직접 찾아본다. 스마트폰으로 매체를 직접 선택한다. 한마디로 자발적으로 뉴스를 읽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신문 하나 읽던 시절보다 시사문제에 더 깜깜해졌다. 기사를 읽고 나면 누군가를 욕하기는 쉽지만 제대로 된 비판은 못하는 그런 스마트한 시대다. 뉴스를 솎아주는 ‘큐레이팅’ 매체들도 많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페친, 트친이 좋은 뉴스를 공유하지만 사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도대체 뉴스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답은 현장에 있다. <미디어스>는 뉴스를 직접 생산하는 현직 기자들에게 뉴스 읽는 방법을 물어보기로 했다. 4편은 학술·책 기사 읽기다. 이 기사들은 첫인상부터 어렵다. 언론사 내에서는 ‘가장 안 팔리는 기사’ 중 하나다. 간혹 쉽게 풀어내겠다며 대담 기사가 나오기도 하지만 결국 제목만 눈에 들어온다. 독자들은 피케티 관련 기사를 어떻게 읽었는가. 지난 24일 한겨레 최원형 기자를 한겨레 6층 인터뷰룸에서 만났다. 기사는 최원형 기자가 사전에 정리한 답변과 대면 인터뷰 내용을 종합해 정리한 것이다.

▲ 최원형 한겨레 기자. (사진=미디어스)

미디어스) 소개를 부탁한다.

2006년 한겨레 입사해 9년째 기자 일을 하고 있다. 이중 3년을 학술담당으로 흔치 않은 경력을 갖고 있다. 지난 4월부터 노동조합(전국언론노동조합 한겨레지부) 상근자로 미디어국장을 맡고 있다. (미디어스- 지금도 그렇고 학술담당이 아닐 때도 책 기사를 쓰고 있다.) 한겨레에는 책 지면이 많다. 책·지성 담당 기자들이 모두 소화하기 어려워 내부 발주를 하는 편이다. 지금도 계속 동원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웃음).

미디어스) 학술, 교육, 책 지면은 속칭 가장 팔리지 않는 지면이다. 그래도 신문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지면이다. 특히 담론을 소개하는 기사는 첫인상부터 끝인사까지 어렵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부의 흐름을 분석한 토마 피케티는 여기저기 언론에 등장한다. 그런데 사실 제목만 읽고 마는 독자도 많은 것 같다. 22일자 한겨레와 경향신문에 피케티 대담 기사가 실렸다. 인내심을 갖고 천천히 읽어봤다. (인터뷰어) 기자 포함 ‘한국사회도 부의 불평등 문제가 심각하다’는 메시지만 얻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피케티 기사를 어떻게 읽는 게 좋나.

어떤 학자가 주목을 받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학자가 주목받을 경우는 대체로 학술연구의 결과나 내용, 그리고 책이다. 거기에 어떤 메시지를 담았는지다. 그 메시지가 적절하고 지금 필요로 하는 내용이면 인기가 급증한다. 피케티의 경우, 기사에도 등장하는 것처럼 책에서 주장한 내용이 사람들에게 소구력이 있기 때문에 인기를 얻은 것이다. 바로 ‘불평등’ 문제다.

한국사회는 지금 불평등에 대한 인식과 감각이 예민해져 있기 때문에 피케티가 소구력이 있다. 그래서 대대적인 인터뷰 기사를 내보낸 것으로 생각한다. 기사에 나오는 핵심 메시지는 간단하다. ‘한국사회도 부의 불평등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피케티는 이를 실증적으로 밝혀냈다고 한다. 이것만으로 던지는 메시지가 강력하다.

▲한겨레 2014년 9월22일자 피케티 대담 기사.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미디어스) 피케티 기사를 어떻게 읽어야 하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과거에도 비슷한 형식의 기사를 여러 차례 써봤다. 한국사회에서 열풍을 일으키는 국외 학자에 대한 정형화된 기사형식이 있다. (‘정의’에 대한 질문을 던진) 마이클 센델이나 슬라보예 지젝, 그리고 <피로사회> 한병철 교수도 그렇고, 이 사람들의 메시지가 사람들의 인기를 불러 모으면, 방한이 이어진다. 그리고 많은 매체들이 인터뷰 기사를 내보낸다. 이 같은 모습이 반복된다.

기사 내용은 단순하다. 언론은 이 학자가 한국사회에서 인기를 끈 이유를 궁금해한다. 센델 같은 경우 그 사람의 배경도 한몫을 했다. 일단 기사를 보면 내용을 소개하고, 한국사회에 특화된 질문을 던진다. 대담기사(또는 인터뷰)에 나오는 질문은 보통 이렇다. ‘당신이 왜 인기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핵심 메시지는 무엇이냐’ ‘당신에 대한 비판을 알고 있느냐’ ‘당신 이론에 따르면 한국사회는 어떤 것 같으냐’는 것이다. 대개 책에 드러난 부분이라 대답이 달라지지 않는다. 매체별로 비슷한 기사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매체들도 모르지 않는다.

디테일이 아니라 형식 자체에서 차별화를 꾀하는 경우도 있다. <피로사회>를 쓴 재독철학자 한병철씨가 방한했을 때, 중앙일보는 동양철학자 김용옥과의 만남을 주선해 두 사람의 짧은 대담을 기사로 다뤘다. 마이클 센델이 방한했을 때 매일경제는 박원순 시장과 대담 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이런 경우 예측 가능한 고정답변을 벗어난 뉴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

(피케티로 돌아가서) 기사를 읽으며 주목해야 할 것은 질문에 자기 매체의 시각을 드러낸 질문이 꼭 하나씩은 있다는 점이다. 기사를 보면, 한겨레는 피케티에 대한 비판을 특화했다. 피케티는 자신에 대한 한국 보수진영의 비판에 대해 “불평등 문제를 부정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탈냉전 세대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냉전시대에 살고 있다. 아마 (북한과 냉전 중인) 한국에선 그럴 수도 있다. 그런 태도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가 앞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고 대답했다. 이 말은(또는 이 말을 끌어낸 것은 한겨레가) 한국 보수주의자의 피케티 비판이 굉장히 엉성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 피케티에게 뚜렷한 메시지를 이끌어내려는 시도도 있었다. ‘한국사회도 세금을 강화해 늘어난 재원으로 복지를 늘려야 한다’는 메시지다.

▲경향신문 2014년 9월22일자 피케티 대담 기사.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경향신문의 경우, 이정우 경북대 교수를 인터뷰어로 내세워 한국사회 특유의 ‘부동산 문제’를 특화했다. 중앙일보는 목적의식적 질문이 많지는 않았다. 폭 넓게 질문하면서 이론에 대한 우려를 전달하는 데 집중한 것 같다. 매체별로 특화하는 질문이 있는데 독자들은 이 부분을 눈여겨 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그 동안 매체들이 (관련 문제를) 다뤘던 입장과 연결된다. 한겨레의 피케티 기사는 ‘소득주도성장론’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미디어스) 매일경제도 인터뷰를 해서 1면 머리기사로 내보냈다. 제목이 <“부자증세만큼 성장도 소득격차 해법”>이다. 매일경제의 스탠스가 잘 드러나는 제목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중앙일보도 그 부분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정보통신기술 산업이 성장의 동력인데 이에 대해 동의하느냐는 질문이 있다.

▲매일경제 2014년 9월17일자 피케티 인터뷰 기사.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기사를 보면,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과)는 “한국의 강점인 정보통신기술에 집중하는 게 경제성장을 위한 자연스러운 방향이라는 데 동의하는지” 물었고, 피케티는 “한국의 개발 정책에 대해 내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내 딸도 삼성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한국의 강점이 정보통신기술이라는 데 의문의 여지는 없다. 그러나 한 분야에만 집중하기보다는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는 게 필요하다”고 답했다. 비교적 짧은 양의 질문과 대답이었지만 중앙일보는 이를 강조해 편집했다.

▲중앙일보 2014년 9월24일자 피케티 인터뷰 기사.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피케티 기사에서 특이한 점은 비판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센델 같은 경우, 비판도 많이 나왔다. 피케티에 대해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자들이 일부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각을 세우는 부분이 있는데 이런 부분이 상대적으로 소개되지 않은 것 같다.

미디어스) 저명 학자들의 대담 기사나 학술기사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방법이 있나.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나.

기자가 기사로 말하듯 학자는 연구결과나 저술로 얘기한다. 이 메시지에 대한 전제는 그래서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는 것뿐이다.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학술기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기자와 기사의 역할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다.

나는 학술담당을 맡기 전까지 책을 거의 안 읽었다. ‘지식의 백지상태’에서 학술을 맡았다. 세 가지 문제와 맞닥뜨렸다. 일단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감이 없었고, 읽을 게 너무 많았고,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이 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게 책 기사, 학자들 소개기사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이라도 기사를 읽으면 ‘이게 이 사람의 주된 주장이구나’ ‘이렇게 입장이 달라서 논쟁을 했구나’ 하고 알 수 있다. 나는 기사가 지식을 습득하는 중간경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사를 쓸 때도 그렇게 썼다. ‘전문가와 지식인, 애서가와 독서인처럼 책을 가까이 하고 저자의 배경을 잘 알고 있는 분들에게는 그런 가이드가 필요 없겠지만 나처럼 배경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기사가 지식의 중간경로로 활용될 수 있겠구나.’

미디어스) 특히 근현대사 등 역사는 기자의 밑천이 드러나는 분야다. 사료도 잘 확인해야 하고, 관점도 옳아야 한다. 역사문제를 취재하는 기자들과 이 기사를 읽는 독자들에게 해줄 조언이 있다면.

가급적 역사문제를 피하려고 노력했다(웃음). 한국현대사에 대해서는 입장이 명확한 부분이 있고, 한겨레라는 조직이 공유한 부분이 있다. ‘최대한 낮은 시각’이다. 2000년대 들어와 현대사를 두고 정권의 개입이 심해졌다. 역사를 다뤄온 시각이 아니라 역사학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역사학을 장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래서 입장이 뚜렷했다.

기사를 쓸 때는 신뢰할 수 있는 학자들에게 충분한 자문과 검증을 거친 뒤 판단한다. 내가 다룬 문제에서는 큰 논쟁이 벌어지거나 그렇진 않았다. 만약 기자가 자기 취향을 내세우면 벌어질 수 있는 부정적인 결과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학자들의 역사 고증에도 편향성이 있다고 생각할 여지가 많다. 그래서 기자 입장에서는 더욱 신중하게 보도할 수밖에 없다.

일례로, 최근 백범 김구에 대한 비판서가 나왔다. 재야사학자가 쓴 책이다. 한겨레 내부에서도 이 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논의가 있었다. 국민일보는 이 내용을 굉장히 크게 소개했다. 그 책의 의도는 한국의 진보파들이 백범 김구라는 인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김구를 확대해석했다는 것이고, 출판사의 소개자료에도 그런 입장으로 나와 있다. 매체에서는 이 책이 저자의 의도와 다르게 소비될 수 있다는 점도 고민해야 한다. 김구를 깎아내리는 게 이승만을 편드는 결과를 낳을 수 있고, 이런 효과를 노리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람의 문제제기를 묻어버리느냐? 이럴 경우, 다루되 신중하게 다룰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주장에 손쉽게 동의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독자들은 안다. 기자가 이 저자의 편을 들었다는 것을. 특히 역사문제를 다룬 기사는 더욱 그렇다.

▲한겨레 2014년 9월5일자 27면.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미디어스) 학술 담당 기자의 고충도 있을 것 같다. 에피소드가 있다면.

지젝이 방한했을 때다. 이틀 삼일 동행취재를 하면서 지젝이 쌍용차 지부장을 만나 했던 이야기 중 한 대목을 강조해 쓴 기사(2012년 6월30일자 8면 기사)가 있다. 당시 지젝은 “나를 거리낌 없이 활용하라”고 했다. 나는 이걸 앞세워 기사를 썼다. 그런데 전임 학술담당이었던 이세영 기자는 한겨레21에서 다른 각도로 취재했다. 한국의 지젝 열풍이 갖고 있는 부정적 함의와 지젝이 소비되는 방식에 대해 주목했다(한겨레21 918호 기사 <지제크 현상, 삐딱하게 보기>). 한겨레와 한겨레21은 물론 나눠져 있지만 같은 한겨레에서 다른 접근법이 나와서 당황했던 적이 있다.

▲한겨레 2012년 6월30일자 8면.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피한 이야기가 있다. 알랭 바디우 방한 전에 사단이 있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프랑스에 계신 월간 <객석>의 파리통신원인 김나희-아델라이드씨가 바디우를 만날 기회를 잡았다. 생각해보니, 국내매체에서는 바디우의 육성을 한 번도 전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런 부분에 대해 질문해 달라’고 한 뒤 기고를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지면이 대선날에 잡힌 것이다. (한겨레 2012년 12월19일자 24면 기사 <“정치란 더 많은 평등의 기회 줄 방법을 찾는 것”>)

인터뷰를 한 분은 우리나라 선거에 대해 얘기해주길 바래서 질문을 집중적으로 했다. 그런데 바디우 같은 경우, 서구식 대의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이다. 고민을 많이 했다. 바디우와 나눴던 얘기 중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선거를 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 없고, 선거가 끝나더라도 우리의 정치는 끝나지 않는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는데 기사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기사가 나간 뒤에 항의가 쏟아졌다. ‘바디우를 한국 정치에 이용했다’는 지식인들의 비판이 있었다. 바디우의 제자이기도 한 서용순 교수(당시 영남대 학술연구교수)는 “바디우 논의의 핵심을 뺐기 때문에 (기사는) 왜곡”이라고 했다. 곧바로 AS했다. 서 교수에게 기고를 부탁했고, 서 교수가 써주셨다. 비난은 가라앉지 않았고, 두고두고 욕을 먹은 적이 있다.

▲한겨레 2012년 12월19일자 24면.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미디어스) 경험적으로 기자들이 어려워하거나 다루기 힘든 주제를 잘 처리해주는 외고자가 고마운 적이 많다. 주제에 따라 추천한다면.

외고자를 섭외하는 데에는 조직적 역량과 개인적 역량이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매체도 마찬가지겠지만 한겨레 책지성팀의 경우 ‘어떤 영역에 대해서는 누가’에 대한 노하우가 쌓여 있다. 예컨대 ‘남미 관련 이슈에 대해서는 우석균 교수 등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교수들에게 부탁하면 좋다’는 식이다. 그리고 취재를 통해 새롭게 만난 취재원들이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재독철학자 한병철씨의 책 <권력이란 무엇인가>가 출간됐을 때 번역자인 김남시 당시 연세대 HK교수(현 이화여대 조형학부 교수)의 친절한 해제를 보고 마음에 담아뒀는데, 나중에 독일의 저명 출판사 ‘주어캄프’에서 경영권 분쟁이 있었을 때 기고를 부탁드려 받은 적이 있다. 저마다의 영역이 있고 그에 맞는 외고 필진을 항상 찾아야 하기 때문에 특별히 주목할 사람을 지목하긴 쉽지 않다. 다만 철학의 경우, 책을 펴낸 출판사에 제일 잘 알고 잇는 경우가 많다.

미디어스) 한겨레는 학술기획을 꾸준히 했다. 지금도 진태원 고려대 교수의 서양철학사 강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지면을 내고 있다. 어려운 지면을 계속 내는 이유는 뭔가.

▲한겨레 2014년 9월29일자 31면.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진태원 선생의 경우, 서양철학사 전반을 꿰뚫을 수 있는 분이다. 한겨레에는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의 사상사 시리즈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 같은 학술지면이 계속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보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한겨레에는 어려운 꼭지들이라도 고정적으로 내보내는 전통이 있다. 물론 이 시리즈를 두고 ‘계도적이다’ ‘주입식 교육을 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한겨레가 지키고 싶은 전통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겨레 독자들뿐 아니라 요즘 시민들은 학술계간지를 사서 보지 않는 이상 이런 글을 읽을 통로가 없다. 한겨레는 이 통로를 열어두자는 생각이 크다.

미디어스) 이제 책 리뷰 기사 이야기를 해보자. 경향신문은 데일리로 책을 소개하고, 많은 언론은 요일을 정해놓고 책 소개 지면을 내보낸다. 한겨레도 월요일자에 서너 면을 할애한다. 한겨레가 책을 고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시기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우선 시스템을 말하면 한겨레는 다른 매체보다 책 지면이 많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거의 2백여 권의 책이 온다. 한국에 나오는 신간은 거의 다 온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팀원들은 이중 어떤 책이 있는지 살펴보고, 후보를 선정한다. 그리고 이중 커버로 쓸 책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지면을 안배한다. 때에 따라 개인의 평가기준과 취향이 반영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독자들이 어떤 책을 보고 싶을지, 우리는 어떤 책을 소개해야 할지 고민한다. 커버의 경우, 우리가 힘을 주고 싶은 책들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그 주의 ‘탑’ 책으로 결정한다. 다만 한겨레의 경우, 과거사나 철학 등 다른 매체에서 거의 소개하지 않는 것에 집중하는 특징이 있다.

미디어스) 책 지면의 사이클을 설명해준다면.

책 회의를 매주 화요일에 한다. 이날 회의에서 책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날 저녁부터 책을 읽기 시작하고,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에 걸쳐 마감한다.

미디어스) 이틀이면 다 읽고 쓰기 힘들 것 같은데.

물론 원칙은 ‘최대한 읽고 쓴다’는 것이다. 그런데 3백 쪽이 넘는 책, 특히 철학서는 다 읽고 쓰기 불가능하다. 그래서 ‘최대한 읽자’는 것이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출판사 보도자료’다. 보도자료를 우습게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떤 출판사의 경우 정말 잘 쓴다. 최악의 상황에 보도자료를 보며 읽어야 할 대목을 발췌해 읽기도 한다.

미디어스) 책이나 저자를 소개하는 기사를 많이 썼다. 노동조합 상근자인데도 기사를 쓰고 있다. 책을 고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고르지 않는다. 팀에서 결정해 건네주면 쓰는 편이다. (웃음) 개인적으로는 필요하다 싶은 책들이 있다. 굳이 얘기하자면 기획시리즈와 비슷하게 사람들이 안 볼 것이라는 책을 버리지 말자는 생각이 있다. 사람들이 많이 읽지는 않겟지만 신문에 기록을 남기면 사람들이 찾아볼 때 레퍼런스(참조)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피케티가 쓴 책이 예전에 나왔는데도 읽지 못했다라고 하면 매체와 기자가 그 책의 진가를 몰라봤다는 것이다. 센델 같은 경우도 <정의란 무엇인가>가 히트를 치기 전에 한국에 한 번 온 적이 있다. 그리고 그의 논의가 철학계에서 논의된 적이 있었다. 당시 그 책에 대한 소개가 없었다면 결과적으로 기자들이 임무를 소홀히 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캐치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미디어스) 언론사에 들어와 놀란 점 중 하나는 읽지 않을(?) 책을 꾸준히 보내주는 업체들이 있고, 심지어 서평기사 중에는 아예 책을 읽지 않고 속성으로 쓴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는 점이다. 아니면 보도자료를 짜깁기한 것으로 의심되는 서평도 꽤 봤다. 책 전문 기자가 보기에는 어떤가.

한겨레는 4개면이다. 다루는 책 종수도 많지만 기자가 다루는 것도 열 꼭지가 넘는다. 다른 신문들이 1~2면인 곳도 있다. 그런 경우, 충분히 다 읽고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대 매체들이 역량을 충분히 투입하지 않는 부분도 많다. 책 지면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희박한 것 같다.

때로는 반대 경우도 있다. 기본적으로 서평과 책 소개기사는 구분이 된다. 서평을 쓰는 곳이 많다. 평론을 쭉 쓰는 것이다. 그런데 이럴 경우 소개를 충실하게 하지 못한다. 오히려 보도자료를 베끼는 것이 책 소개기사 본연의 목적에 맞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소개를 잘 못하는 기사가 많다. 물론 역량을 투입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

미디어스) 책 기사의 경우, 협찬을 받고 쓰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협찬이라면 광고협찬을 말하는 것일텐데, 미안하게도 한겨레의 경우엔 기사 생산과 광고 유치가 연결돼 있지 않다. 가끔 광고를 많이 하는 출판사들이 자기 책들을 너무 소개 안 해준다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다른 매체들의 상황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책을 소개하는 뚜렷한 기준이 있는지 여부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매체들이 가끔 눈에 띈다.

미디어스) 철학서도 많이 소개해왔는데 어렵지 않나.

<진리와 방법>이라는 책이 있다. 정말 학자들도 머리를 치며 읽는 책이다. 이걸 소개해서 하는 일이 있었다(한겨레 2012년 11월7일자 24면 기사 <가다머 누구길래…5명이 15년 걸려 번역>). 아무리 읽어도 이해를 못할 지경이었다. 이런 경우, 내용 자체를 전달하기보다 이 책의 배경을 설명하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핵심내용을 장악하고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의 이런저런 내용이 쟁점이 돼 논쟁이 있었다’ 하는 식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한겨레 2012년 11월7일자 24면.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미디어스) 신문을 활용해 자사에서 펴낸 책을 파는 언론이 많다. 물론 의미가 있다고 판단해 책을 펴낸 것이지만 퇴직기념으로 칼럼집을 내주는 경우도 잦다고 알고 있다. 또 자사 출판사의 책을 도가 지나칠 정도로 홍보하는 것 같은 지면도 있다.

한겨레의 경우, 자회사로 한겨레출판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한겨레출판에서 펴낸 책을 얼마나 어떤 크기로 소개해야 할지가 늘상 고민거리였다. 팀 회의를 거쳐 책 내용이 괜찮다 싶으면 그 정도의 기사로 ‘대접’을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싶으면 단신으로 들어가거나 아예 소개되지 못한 일도 많았다. 기본적으로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일주일에 평균 200여 권 가량 되는 책들이 책지성팀으로 온다. 지면에 소개되는 책은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살아남은 책들인데, 그렇다고 경쟁에서 떨어진 책이라고 해서 지면에 실리지 못할 책들도 아니다.

미디어스) 일간지의 홍보효과가 실제 있나. 있다면 얼마나 있는지 궁금하다.

홍보효과? 없다. 과거 일간지의 책 소개기사가 홍보기사로 유용했고 출판사들도 일간지에 어필을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상황은 변했다. 5~6년 전부터 책 홍보 플랫폼은 일간지에서 ‘인터넷서점 첫 화면’으로 넘어갔다. 경험 상 이제 일간지의 홍보효과가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신문을 안 볼뿐더러, 뉴스소비 행태가 바뀌었고 인터넷에서 책 기사를 소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마 미디어 환경이 변하면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지면이 책 지면일 것이다.

인터넷서점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 공정거래위원회가 인터넷서점에 시정조치를 내린 적이 있다. 첫 화면에 나온 책들이 객관적인 지표인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출판사의 돈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게 가장 안타까운 지점이다. 지금 책과 관련해 신뢰할 정보가 어디 있느냐. 사람들이 이용하는 인터넷서점은 상업화의 창구가 됐고, 이제 책 지면을 찾아보는 사람도 거의 없다.

미디어스) 과거부터 있었지만 최근 들어 CEO 인문학 열풍이 다시 불고 있다. 언론 덕이 크다. 스마트한 사람들의 00가지 습관, 이런 류의 책도 잘 팔린다. 우리는 이런 흐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다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이 질문은 언론이 책을 다루는 태도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CEO 인문학은 2000년대 초반부터 일었는데, 90년대 중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당시 조중동에서도 책 지면을 한겨레 못지않게 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매체별 시각이 발현돼 있긴 했지만 책 소개 기사가 정말 많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오면서 책 지면이 줄었다. 그리고 책 기사도 트렌드 기사로 바뀌었다. 조선일보가 선도했다. 예를 들면 ‘지금 광화문 교보문고에서는 어떤 책이 잘 팔리는지’, ‘어떤 사람들은 어떤 책을 찾고 있다’는 기사가 책 소개 기사를 대체했다. 이런 흐름과 연관이 있다. 이제는 책이 지식을 접하는 창구가 아니라 단순 소비재가 됐다는 느낌이다. 알기 위해서, 습득하기 위해 보는 게 아니라 필요하기 때문에 읽는 느낌이다. 인문학 열풍을 얘기하면서도 인문학은 가장 쓸 데 없는 취급을 받는 ‘극단적인 반응’이 한국에 있다. CEO 인문학 열풍은 ‘필요에 의한 인문학’에 대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문학이 자기계발과 출세, 처세와 연관된 것은 1990년대 말부터 심화된 것으로 본다.

미디어스) 한국경제 사설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 없다. 한국경제는 23일자 사설 <인문계 졸업생 홀대 이유 아직도 모르나>에서 “반시장주의, 반자본주의를 인문학으로 위장하는 강남좌파식 교수들”이 인문학을 버려놓은 탓에 인문계 졸업생들의 반기업 정서를 갖게 됐고, 그래서 인문계가 취업이 안 된다는 놀라운 논리를 펼쳤다. 따지고 보면 한국경제가 비난하는 인문학은 ‘한겨레의 학술, 책 기사’로도 볼 수 있다.

나는 인문학이라는 지칭에도 거부감이 있다. 굳이 얘기하면 ‘지식’이다. 그리고 지식에는 앎이나 앎의 체계 두 가지가 있다. 이걸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세계관에서도 차이가 난다. 한겨레 책 지면이 필요하다고 보는 사람과 필요 없다고 보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아마 한국경제의 사설은 한겨레식의 책 지면은 필요 없다는 입장일 것이다.

낡은 신자유주의적 발상이다. 지금은 아예 신자유주의자들도 피케티까지 껴안는 추세다. 지금 말하는 ‘CEO 인문학’은 이제 피케티를 알아야 한다는 시대의 반영이다. 앎과 앎의 체계조차도 자기계발 또는 경쟁과정에서 보유해야 할 자원이라는 게 신자유주의적 발상이지만 지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한국경제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경제는 시대적 조류마저도 못 따라가는 것이다. 본인이 보유한 지식이 많으냐 적으냐는 문제가 아니다. 앎이나 앎의 체계를 존중하고 그게 필요하다고 인지할 수 있느냐 아니냐 문제다. 이걸 공급하는 책 소개기사 학술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미디어스) 기자와 독자에게 책을 몇 권 추천해 달라.

우선 기자들에게. 개인의 취향이나 입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단행본 추천보다는 계간지 구독을 추천하고 싶다. <역사비평> <창작과비평> <황해문화> <말과활> 등의 계간지들은 나름의 성격을 가지고 일 년에 네 차례 시의성 있게 관련 학문 담론들을 끌어모아 제공해준다. 그 영역이 꽤 넓기 때문에 꼭 학술 담당이 아니더라도 기자들이 각자의 취재 영역에서 참고할 대목들이 많다.

독자들에게는 <위기의 경제학>(신희영/이매진, 2013)을 권한다. 우리 시대의 중요 분기점인 미국발 경제위기와 이를 둘러싼 경제 사상의 흐름에 대해 탄탄하게 정리한 책이다. 미국발 경제위기와 유럽 재정위기 등의 현상에 대해 조목조목 분석하며 주류 경제학 담론의 약점을 공격할 뿐 아니라, ‘실현 가능한 사회주의’의 물꼬를 실질적으로 트기 위해 다양한 경제사상적 자원들을 모색했다.

질문을 받고 가장 먼저 떠오른 책은 전남대 위상복 교수가 쓴 <불화 그리고 불온한 시대의 철학>이다. 꼼꼼하게 읽지는 못했지만 내용은 이렇다. 이 책은 경성제대의 마지막 세대, 마르크스주의자로 해방공간에서 활동하다 빨치산이 돼 사라진 박치우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이 분에 대한 논의가 오랫동안 끊겨 있었다. 위상복 교수는 남아 있는 자료를 수집해 박치후라는 인물을 재조명했다. 위상복 교수를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에는 지적 전통이 유실된 부분이 많다. 특히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묻힌 부분이 많다. 이 책은 이런 지적 전통을 잇고 되살리려는 결과물이다.

▲한겨레 2012년 2월18일자 15면.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미디어스)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이 있다면.

학술담당 시절, 농담으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 기사는 사내독자도 거의 없고 전국에 100명이나 읽을까?’ 그런데 가끔 취재를 가면 소수독자를 발견한다. 놀랄 정도로 학술기사를 읽는 분들이 있다. 이것저것 비교해서 읽는 분들을 만나면 뿌듯하더라. ‘이런 분들이면 100명만 되도 기사 쓸 만하겠다.’

이밖에도…

미디어스) 노동조합에서 자사 보도를 감시하는 공정보도위원회 간사를 맡고 있다. 한겨레 읽기의 달인일 것 같다. 한겨레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콘텐츠는 뭔가.

미디어국장을 맡은 뒤 생각해보니, 한겨레에서 가장 중요한 콘텐츠는 ‘경제정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겨레 경제면은 면이 적기도 하고, 내용도 많지 않아 풍부하지 않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런데 종합면에 경제정책을 다루는 기사가 많다. 다른 매체에서도 기획기사로 소화하지만 한겨레의 차별성은 경제정책 기사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정치와 사회분야도 있지만 경제정책 기사의 차별성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이를 테면 경제정책과 관련된 부분은 가장 독특한 위상이 있는 것 같다. 조중동(조선·중앙·동아일보)에서 이야기하는, 정부의 메인스트림에 대한 비판을 고민하고, ‘비판만 쉽다’는 지적을 넘어서려는 내용이 많다. 눈여겨보면 다른 매체와 다른 시각을 느낄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진보적이지 못하다, 허무맹랑하다고 비판할 수 있지만 경제정책은 가장 치열한 대목이다.

미디어스) 인상비평이지만 ESC, 토요판 인기가 전보다 덜한 것 같다. 다른 매체들이 모두 따라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주목해 읽을 만한 코너가 더 있다면.

토요판이 주목을 받은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토요판에 있는 ‘친절한 기자들’은 SBS 취재파일 같은 것이다. 기자들이 이슈를 넘어서는 인사이트를 담으려고 노력한다. (역시 토요판에 실리는) ‘다음주의 질문’도 주목하면 좋을 기사다.

미디어스) 미디어국장으로서 어떤 지면에 주목하고 있나.

역시 1면이 가장 중요하다. 내부적인 약속을 지키는지 아닌지 이런 것들에 관심이 있어 콘텐츠 비판에 신경이 덜 쓰이긴 하지만 한겨레가 터무니 없는 보도를 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이런 부분은 있다. 한겨레가 더 나은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 한겨레는 잘 하던 것을 계속 잘 할 수 있는 튼튼한 구조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다른 부분에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 같다. 잃어버린 것도 있는 것 같다. 사회부의 생생한 현장 기사들이 예전에 비해 줄었다. 기획기사도 남발하는 경우가 있다. 노동정책 기사에서는 경향신문이 나은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겨레 기자들이 노력하는데도 아직 조명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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