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개헌론이 불난 집에 연기나듯 솔솔 피어오른다. 하긴 한국 사회가 불난 집 꼴이니 그럴 만하다.

대통령이 올해 초 신년기자회견에서 "개헌은 워낙 큰 이슈이기 때문에 한번 시작이 되면 블랙홀처럼 모든 것이 다 빠져들어서 이것저것 (해야) 할 것을 (해)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 상황이다.
그런데도 여권에서부터 개헌 논의가 나오고 있다. 새누리당 비박 중진들이 그 진원지라 한다. 밖에서 보기엔 ‘대통령 시중들기’가 새누리당의 체질로 보이지만, 태어날 때부터 그게 체질인 사람은 없을 거란 짐작이 들 뿐이다.
문제는 야권 내지는 좁은 의미의 진보진영에서도 이 흐름에 묻어가려는 이들이 꽤 있다는 것이다. 가령 김두수 넥스트커뮤니케이션 정치전략연구소장은 23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야권을 재편하기 위해서 한국 정치생태계를 바꾸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라며 "87년 체제의 6공화국을 끝내고 제7공화국을 열어야 한다"라고 주장힌다. 그는 "만약 7공화국을 여는 운동이 성공해 선거법이 개정되면 다당제가 정치를 유능하게 만들고, 대화와 타협이 가능해져 극단적 정치대결이 줄어들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또 그는 "진보정당이 살 길은 제도 개선인데 왜 제도 개선에 소극적인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현 제도가 그대로 유지되고 혁신도 안 되면 새정치민주연합과 정의당이 합치는 게 낫다"라며 "냉정하게 보면 합치지 않을 이유가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이 24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중진연석회의에서 개헌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연합뉴스)
원론적으로 보면 옳은 얘기다. ‘87년 체제’ 헌법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지탱하는데 한계에 달했고, 진보정당들의 생존에도 제도 개선이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개헌과 제도 개선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걸까.
개헌론과 선거 제도 개편론은 일종의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다. 쥐는 고양이의 습격에서 몸을 피하고 싶어 방울을 달고 싶어 한다. 하지만 만일 쥐가 고양이에게 방울을 다는 것이 가능할 정도라면, 굳이 고양이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방울을 달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나쁜 선례’들이 존재한다. 지난 6월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서에서 기획한 “6.4 지방선거 결과와 진보개혁세력의 과제” 토론회에 참여한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 서복경 위원은 “향후 2년간을 예상해보면 모든 정치세력의 지도부가 무주공산이고 리더십 교체기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이런 상황에선 일종의 ‘장’이 선다. 개헌문제를 포함하여 의회, 정당, 선거, 사법, 지방자치 등에 대한 모든 제도개혁 논의가 나오게 된다”라고 전망했다.
이어서 서 위원은 “돌이켜보면 1993년에서 1994년까지의 시기가 그랬고 2004년이 그랬다. 전자의 시기에 선거법이 개정되는데 재야가 개입했고 2004년 ‘오세훈 선거법’으로 개정될 때에도 참여연대 등이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양쪽 모두 안 건드리느니 못한 개정안이 나왔다. ‘오세훈 선거법’ 때는 지구당이 폐지되었다”라고 지적했다.
서복경 위원은 “제도개혁에 있어 진보진영은 단지 발언권만 가질 뿐이다. 현실에서 제도대안의 선택은 원내 제1당과 제2당 혹은 그 정당들 내부의 분파간 협력에 달려 있을 뿐이다”라고 설명했다. 서 위원은 “참여정부 시절에도 지지기반을 훼손해 가며 몇 가지 제도개혁안을 쟁취해냈으나 정권이 바뀐 후 ‘말짱 도루묵’이었다”라면서 “지지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추진되는 제도개혁은 원하는 방향의 결과를 낳기도 어렵지만, 이루었다 하더라도 이를 유지할 수도 없다”라고 비판했다. (...) (기사 링크)
서복경 위원의 지적은 새누리당에서, 새정치민주연합에서 개헌론이 흘러나오고 진보세력의 일부가 이에 화답하게 되는 사정까지 예견한다. 그러나 이 지적을 음미한다면 진보진영은 개헌 논의에 관심을 가지는 것조차 ‘허송세월’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작금의 시점에서 한국 사회가 개헌에 착수하고 그것을 이뤄낸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아마도 대통령의 권한은 약화되겠지만 내각책임제로까지 가지는 못할 것이다. 의외로 자신이 그 ‘제왕적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거라 꿈꾸는 의원님들이 꽤 많으니 말이다. 아마도 5년 단임제가 유지될 수는 없을 것이며 4년 중임제가 될 것이다. 아마도 대통령의 권한은 국회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약화되겠지만, 그렇다고 의원님들이 자신들의 기득권까지 포기하며 지방자치단체에 권력을 분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에 어떤 것이 희생될까. 경제민주화 조항을 비롯한, 지금의 헌법에 담겨 있는 사회민주적 가치의 성격이 홍수에 나뭇잎 떠내려가듯 쉽게 쓸려나갈 것이 거의 틀림없다. 이것은 새정치민주연합과 진보정당, 또는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 혹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좋은 결말일까. 그럴 리가 없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개헌이나 선거 제도 개혁 논의에 매달려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서복경 위원은 앞서 언급한 토론회에서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 서복경 위원은 진보진영이 제도개혁 논의에 매몰되지 말고 기존 결사조직을 확대하며 새로운 결사조직을 생성하는데 주력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서 위원은 “진보진영은 지금이 밭을 갈아야 할 때다. 결사하고, 결사하고, 또 결사해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 서 위원은 “이미 드러난 사회경제적 의제들을 선점하고, 이를 중심으로 새로운 결사조직을 생성하고 기존 결사조직들을 확대하며, 이들 속에서 새로운 정치엘리트를 발굴하고 지지기반을 창출하는데 주력해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서 위원은 구체적으로 “비정규직 노조 결성 지원 및 확대, 원전이나 개발반대 주민결사 지원, 민영화 및 권경언 유착 폭로 등 공공영역 노조 결사 활동 지원 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
지금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의회권력과 정치권력 교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들의 패배의 알리바이의 목록을 ‘국정원 댓글’, ‘종편방송’, ‘카카오톡 유언비어’, ‘자꾸 선거에 출마하는 군소정당’이란 식으로 늘려가지 말고, 지역조직을 재건하고 당과 유권자가 접촉하는 면적을 넓혀야 한다. 진보진영은 서복경 의원의 제안 그대로 ‘결사’해야 한다.
자꾸 중앙정치의 차원에서 통합하고 분당하고 계파 질타하고 모바일 투표 가지고 싸우고 그래서 될 일이 아니다. ‘기울어진 운동장’ 말하고 헌법의 후진성 말하고 선거제도 말할 때가 아니다. 그것들 모두가 진실이라 해도 그것들이 알리바이가 되어선 안 된다. 나는 쥐고 상대방이 고양이라고 반복해서 말하면 고양이 목에 방울이 생길까?
▲ 새누리당 당권주자인 김태호 의원이 지난 6월 29일 국회 정론관에서 개헌 논의를 위한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설치를 주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앞선 비평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 정치영역에서 대부분의 문제는 이렇게 검증할 길이 막막하기에 옳고 그름을 확연하게 가릴 수는 없다. 그러나 ‘현명한’ 길과 ‘우둔한’ 길은 있다. 대부분의 문제는 총체적인 체질에 의해 발생한다. 현명한 분석은 그 체질을 개선할 길을 찾고, 우둔한 길은 체질개선을 대안으로 삼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원흉 내지 알리바이로 삼는다.
앞서 소개한 독일군 참모부의 경우, 총력전을 수행하기 위한 군수 보급 관리에 자신들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점을 숨기기 위해 전차 탓을 했다는 해석이 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인지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인지적 왜곡’이 된다. 트리플악셀로 주니어 시절을 제패한 한 피겨선수가 성인이 된 후 자신의 라이벌에게 자꾸 지는 이유를 “트리플악셀이 안 되기 때문”으로 생각하고 줄구장창 트리플악셀만 하다가 은퇴하게 되는 심리도 그러하다. (...) (기사 링크)
이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개헌 논의는 ‘헌법’을 1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전차’나,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조총’이나, 아사다 마오의 ‘트리플악셀’처럼 실패의 기억을 지우기 위한 변명의 알리바이로 삼을 뿐이다. 개헌도 되지 않을뿐더러 지금 상황에서 되더라도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다. 야권과 진보진영은 개헌 논의를 ‘강 건너 불구경’해야 이 불난 집에서 호떡이라도 구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