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법 위반 혐의 유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무죄’로 요약되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1심재판에 대해 시민 사회는 우려했다. 현직 부장판사가 쓴 <법치주의는 죽었다>라는 글이 널리 회자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판결에 대해 검찰보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더 빠르게 항소 의지를 천명한 상황이다. 법원에 따르면 원 전 원장 측을 변호하는 법무법인 처음은 1심 판결에 불복한다는 내용의 항소장을 서울중앙지법에 제출했다. 원세훈 전 원장은 1심 선고 직후 국정원법 위반에 대해 "정치개입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북한에서 우리나라 국가 정책을 스스로 기만해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만 한 것"이라며 혐의를 끝내 부인한 바 있다. 원 전 원장은 "(직원들이) 구체적으로 댓글을 쓰거나 트위터를 했거나 하는 것은 알지 못했던 사항이다"면서 "항소심에서 하나하나 잘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원세훈 전 원장의 항소에 따라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은 서울고법에서 다시 재판받게 될 예정이다. 그러나 검찰이 항소 의사를 밝히지 않은 상황은 확실히 이례적이다. 검찰은 자신들이 제기한 일부 혐의에 대해 무죄가 내려졌고 피고인에 대해 집행유예가 선고됐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부담감 등을 고려해 항소 여부를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 등 18개 시민단체들은 15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서 '원세훈 전 국정원장 1심 판결 항소 촉구' 기자회견을 가지고 원세훈 전 원장에게 선거법 위반 무죄를 선고한 1심 판결에 대해 항소할 것을 검찰에 촉구했다. 검찰 수사의 결론을 검찰 자신이 아니라 시민사회 단체가 고수하기를 요구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 박근용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이 15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서 18개 시민단체 주최로 열린 '원세훈 전 국정원장 1심 판결 항소 촉구' 기자회견에서 원 전 원장에게 선거법 위반 무죄를 선고한 1심 판결에 대해 항소할 것을 검찰에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는 검찰이 잇따른 간첩 사건 무죄에 대한 대응책을 고심하고 있는 상황과는 상반된다. 대검찰청 공안부(부장 오세인 검사장)는 15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에서 공안 사건 전담 부서가 있는 전국 8개 지검·지청 검사 18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 대공전담 검사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회의에서 그들은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과 '보위사 직파간첩 사건' 등에 무죄 판결이 내려진 원인을 분석하고 향후 대책 등을 논의했다고 한다.
두 사건은 검찰이 유력한 증거로 내세웠던 자백진술에 증거능력이 부여되지 않아 무죄가 선고됐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의 경우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후 검찰 측이 항소심 재판부에 추가로 제출한 증거가 국정원 측이 조작한 것이란 사실이 밝혀져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검찰이나 법원이 조직논리로 일사불란하게 한 방향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검찰 수사나 법원 판결에 대해 정치성향이 다른 이들이 일희일비하지만, 사건의 성격에 따라, 그리고 어떤 검사나 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상황은 매번 달라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검찰이나 법원은 비록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만큼 진보적인 조직은 아닐지라도, 그간 나름의 원칙에 따라 정권의 전횡을 나름 제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원세훈 판결을 둘러싼 상황은 보수정부가 출범한지 7년이 지난 시점에서 정권에 대한 다른 권력기관들의 제어기능이 조금씩 약화되어 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시민들이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하고 권력을 감시하는 방향으로 탁월한 성취를 이뤄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의 성취를 부정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한국 사회의 법적 제도나 문화는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권장하기 보다는 제어하는 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민주화’가 일정 부분 성취를 거뒀다면, 그것은 ‘시민들의 권력기관에 대한 견제’는 성숙하지 않았어도 ‘권력기관끼리의 상호 견제’라는 측면에선 어느 정도 성과를 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역으로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보수정부의 기조가 무엇이었을지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야권은 흔히 한국 사회의 미래를 우려할 때 일본의 자민당 체제를 말한다. 그런데 이는 한국의 보수세력 역시 모델로 삼는 바다. 말하자면 그들은 일본 자민당의 장기집권과 ‘1.5당 체제’를 핑계삼아 1997년 이전의 한국 사회로, 정권교체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그 시기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1987년 체제 이후 형성되고 1997년 민주정부 출범 이후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권력기관끼리의 상호 견제’의 구조를 뒤로 돌리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 대선·정치개입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를 마친 후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원 전 국정원장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 판단을 받았으나 국정원법위반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연합뉴스)
이명박 정부 시절은 ‘방송 장악’의 시대였다. 그들은 공격해야 할 지점을 정확히 알았고, 1987년과 1997년의 유산이라 볼 수 있었던 비판적인 언론인들은 결코 만만치 않은 저항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언론지형을 지켜내지 못했다. 그 이명박 정부 시절 종종 사법부는 ‘한국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정부가 MBC <PD수첩>을 탄압할 때 <PD수첩> 보도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려준 사건 같은 것들이 특히 그랬다.
그러나 어쩌면 이제는 법조인이 타깃인지도 모른다. 널리 회자된 수원지법 성남지원 김동진 부장판사가 쓴 글에는 이러한 문단이 있다.
“(...)2013년 9월부터 올해의 이 순간까지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 현 정권은 ‘법치정치’가 아니라 ‘패도정치’를 추구하고 있으며, 그런 과정에서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고군분투(孤軍奮鬪)한 소수의 양심적인 검사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에 관하여 의연하게 꿋꿋한 수사를 진행하였던 전임 검찰총장은 사생활의 스캔들이 꼬투리가 되어 정권에 의하여 축출되었다. 2013년 9월부터 10월까지 검사들을 비롯한 모든 법조인들은 공포심에 사로잡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밝히려고 했던 검사들은 모두 쫓겨났고, 오히려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덮으려는 입장의 공안부 소속 검사들이 국정원 댓글사건의 수사를 지휘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며, 대한민국의 역사와 관련된 중요한 재판이 한 편의 ‘쇼(show)’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각종 언론은 이런 상황을 옹호하면서 나팔수 역할을 하였다. 내가 바라본 2013년의 가을은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죽어가기 시작한 암울한 시기였다(...)”
박근혜 정부 초기엔 검찰이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지고 제 역할을 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시민들은 그것은 정부의 의지가 아니라 한 검찰총장의 의지였음을, 그의 사생활이 문제가 되어 ‘찍어내기’ 논란과 함께 사임하면서 알게 되었다. 이제는 주류매체 언론인보다도 더한 엘리트집단인 법조인들에게도 정부에 대한 본연의 견제기능을 행사하는 일에 양심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민사회 단체가 검찰에게 항소를 권유하는 현재의 풍경은 정부가 공중파방송의 순치를 결심하면서 방송국 내부의 구성원들이 정부를 편드는 이들과 시민사회 단체를 편드는 이들로 양분되었던 이명박 정부 시절 풍경에 포개진다. 이제는 법조인을 기득권의 수호자라고 비판만 할 게 아니라, 법조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상식적 역할을 유지하려는 이들을 응원해야 할 시기가 왔다는 것을 ‘원세훈 1심 판결’을 둘러싼 소란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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