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이 뿔났다. 비상대책위원장은 물론 원내대표까지 사퇴해야 한다는 초재선 강경파 의원들의 요구에 새정치연합 박영선 의원이 결단을 내리기 직전이다. 결단의 내용은 원내대표 사퇴를 넘어 탈당, 심지어는 정계은퇴가 될 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나온다.

차기 비대위원장을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로 내정했다는 언론 보도로부터 다시 촉발된 박영선 비대위원장의 리더십을 둘러싼 갈등은 이제 계파투쟁을 넘어 정념과 정념의 정면대결로 흐르는 모양새다. 다소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강경했던 초재선 의원들의 반발에 맞서 이제 박영선 위원장이 초강수를 두고 있다.
양비론을 넘어 세밀한 판단을 해보자면 이번에는 박영선 위원장보다 새정치민주연합 내 강경파 의원들의 처신을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의 비대위원장 선임을 반대하는 이들의 논거는 “당 정체성에 맞지 않는다. 비대위원이면 괜찮지만 비대위원장으로선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국민공감혁신위원장 겸 원내대표가 12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정치 관련 언론사 보도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에 비상대책위가 필요했던 이유는 이 정당이 민심과 여론을 수렴하는 방식이 철저히 고장나 있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앞선 선거의 패배가 그 증거다. 물론 당내 강경파는 당이 좀 더 선명성 있고 강경한 투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 되었다 믿을 수 있고, 그런 견지에서 그들의 신념에 맞는 비대위원장을 원했을 수 있다.
하지만 정반대의 입장도 엄연히 가능한 상황에서, 비대위원으로선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 성향의 인물이 비대위원장으로 올라서는 것만은 결사반대하는 것이 능사일까. 2012년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체제의 새누리당 비대위원에게 가진 반감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자. 당시 새누리당 비대위 멤버 중 최연소였던 이준석만이 새누리당서 일종의 혁신위원장을 하고 있는 상황, 김종인은 박영선에게 조언을 하고 이상돈은 야당의 비대위원장이 되는 상황은 ‘박근혜 혁신의 실패’를 보여주는 상징이 아닌가. 새정치민주연합은 늘상 박근혜 정부와의 투쟁을 소리높여 외치지만, 유권자에게 ‘박근혜의 실패’를 보여줄 기회마저 걷어 차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현재의 상황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지금 새정치민주연합의 상황은 비상대책위조차 기능을 못하는 비상한 상태다. 물론 이는 박영선 비대위원장의 실책이었다. 원내대표를 맡은 그는 비대위원장을 덜컥 수락하기보다는 애초 외부인사를 비대위원장으로 삼고 자신도 비대위원이 되는 비대위부터 제대로 구성하는 것이 옳았다. 정국 교착의 가장 큰 원인인 세월호 특별법 협상에 대해서도 유족 여론과 당내 중지를 폭넓게 반영하여 신중하게 처신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박영선 위원장은 이름만 비대위원장일 뿐 비대위원 한 명도 선임하지 못하는 ‘나홀로 비대위’ 속에 갇혔다.
▲ 세월호 광화문 단식 농성장에서 22일째 단식 중인 새정치민주연합 정청래 의원이 12일 국회 정론관에서 "이상돈 교수는 단독 비대위원장이든 공동 비대위원장이든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차기 비대위원장의 전횡에 대해 크게 우려할 필요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비대위원장의 역할이란 당내 분란과 갈등을 수습하는 것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당장 이상돈 명예교수의 비대위원장 선임에조차 수십 명의 의원이 난리칠 수 있는 것이 새정치민주연합의 의사결정 구조다. 그런데 이상돈 명예교수가 비대위원장이 되면 새누리당 성향의 인물이 이 당의 점령군인 것마냥 처신할 거라는 우려는 어떻게 합리적인 근거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같은 당 의원이며 의원 선거로 뽑힌 원내대표인 박영선 의원이 비대위원장이 되어도 누릴 수 없었던 그 권력이 무슨 수로 이상돈 명예교수에겐 갈 수 있었단 것일까.
매우 아쉬운 것은, 이상돈 명예교수는 점령군처럼 처신하기는커녕 자신의 역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상돈 명예교수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비대위원장은 무슨 벼슬이 아니다. 내년 초 치러질 것으로 예상되는 전당대회까지 4~5개월간 당을 관리하는 자리다. 나는 이 당의 미래를 위해 당 대표를 뽑는 경선 룰만이라도 잘 만드는 게 비대위원장으로 할 일이라 생각했다. 새누리당이 경선 룰 하나만큼은 잘 만들어 놨다. 책임당원·대의원 투표에다 여론조사를 섞어 공정성 시비가 적은 편이다. 반면 야당은 제대로 된 경선 룰이 없어 늘 사고를 친다. 나는 새누리당에서 경선 룰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이용되는지 경험해 본 데다 새정치연합과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 그래서 박 위원장이 나를 택한 것 아니겠나. 내가 비대위원장이 되면 새정치연합은 새누리당 경선 과정을 비롯해 온갖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될 것 아니냐. 누구에게 이런 얘기를 듣겠나.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란 말도 있는데 새정치연합 사람들이 이상한 자존심 때문에 기회를 놓친 게 안타깝다”라고 설명했다. 당의 정체성과는 비교적 상관이 없는 기술적인 부분에 자신의 역할을 한정했다는 것이다.
물론 강경파 의원들은 이상돈 명예교수의 의중을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박영선 위원장과 이상돈 명예교수로부터 충분한 설명을 듣지도 않고 연판장을 돌리고 ‘단식’ 운운하는 것은 합당한 대응인가. 서로의 말이 어긋나기는 하지만, 박영선 위원장은 이상돈 명예교수 내정을 두고 문재인 의원 등과도 교감을 했다고 주장한다. 이로서 새정치민주연합은 계파정치당도 아니고 계파수장이라 알려진 사람도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는 ‘따로 국밥’당이란 것이 증명된 셈이다. 의원 개개인의 자율성을 평가할 수도 있는 일이긴 하나, 적어도 지도부는 구성해놓고, 지도부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를 가지고 자율성을 발휘할 일이다.
▲ 새정치민주연합은 11일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를 비대위원장으로 영입한다는 소식에 벌집을 쑤신 듯 들끓었다. 이 교수는 지난 2011년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비상대책위원, 2012년 대선 직전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 등으로 활동해 보수정권 재창출에 기여한 인사라는 당내 반발이 거세다. 사진은 지난 2012년 1월 24일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에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 정치쇄신분과 위원장을 맡은 이상돈 비대위원장이 정당구조 개편 기본 방향 등에 대해 기자회견하는 모습. (연합뉴스)
이상돈 명예교수는 “새정치연합은 (나를 영입하려는) 박 위원장 같은 전략가 집단과 탈레반식 강경세력으로 쪼개져 있음이 이번 파동을 통해 확실히 드러났다. 계파 갈등이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적이 또 있을까 싶다. 같은 야당 사람들끼리 이렇게 견해 차가 크다면 뜻 맞는 이들끼리 갈라서는 게 낫다는 목소리가 커질 듯하다”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제3정당’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열망은 일단 안철수 의원이 제3정당의 실험을 폐기하면서 그 흐름이 꺾인 상태다. 제1야당, 새정치민주연합은 새누리당보다도 더 심하게 양당제의 지대를 누리는 정당이 되었다. 제1야당이 예뻐서가 아니라 새누리당에 반대하는 이들 중에 가장 덩치가 크고 힘이 세기 때문에 선거 때가 되면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로 지지가 몰린다는 식이다.
새정치민주연합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 그룹에서는 “이제야말로 새정치민주연합을 해체해야 할 때다”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역시 “2000년대 초반 민주노동당과 같은 대안정당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이제는 새정치민주연합 바깥에도 대항마가 없다”고 한탄한다.
▲ 외부인사의 비대위원장 영입 무산 파동 등으로 사면초가에 처한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국민공감위원장 겸 원내대표가 소속 의원들로부터 공개 퇴진압박을 받고 있는 가운데 1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회의실이 텅 비어 있다. (연합뉴스)
‘제3정당’이 가능하지 않은 곳에 자꾸 선거전략적 사고에 의해 등장하는 것이 ‘제3지대정당’이다. 이상돈 명예교수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 말미에서 “만일 박 위원장이 분당해 딴 살림을 차린다면 그 당의 진정성과 철학을 따져 보고 (합류를)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라고 말했다. 열린우리당 이후 재합당을 전제로 이렇게 분화하는 정당을 흔히 ‘제3지대정당’이라 불렀다.
그러나 ‘제3지대정당’으론 제1야당이 개혁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분당과 합당의 과정에서 주체들 간의 감정의 골만 깊어져 현재의 지리멸렬을 강화했던 측면조차 있다. 외부의 도전(제3정당)도 없고, 파괴를 단행하는 개혁의 시도(제3지대정당)조차 번번이 좌절해왔던 정당, 한국 사회의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의 현실태다. 강경파든 온건파든 이 엄중한 현실태를 인지한 연후에 혁신을 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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