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외면하고 있다. 유가족들이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드러누워 버린 지 며칠이 지나도록 한 마디 말도 꺼내지 않는 것도 모자라 “대통령님 만나주세요”라고 말을 할 때마다 자갈치 시장으로, 태릉선수촌으로 피신을 해버린다.

26일에 대통령은 국민경제자문회의라는 자리를 열었다. 이 대규모의 회의를 시작하기 직전, 최근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에 이어 새로운 또 한 사람의 부통령으로 등극한 최경환 부총리가 ‘대국민담화’를 읊었다. 경제활성화가 시급하니 국회에서 관련 법안을 빨리 통과시켜 주지 않으면 안 된단다. 국회가 세월호특별법 관련 논의로 정지돼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만 좀 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진다. 최경환 부총리에 의하면, 새정치민주연합이 방탄용(?)으로 소집을 요구한 8월 임시국회는 우리 경제를 살리는 ‘골든타임’이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판을 보면 8월 국회는커녕 9월 정기국회마저 본전도 못 찾을 위기다.

만일 경제활성화가 그렇게 시급한 것이라면 무슨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든 이 논란을 끝내면 된다. 어차피 키는 대통령에게 있다.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40일 넘게 단식을 강행하고 있는 김영오씨는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고 있다. 면담을 하고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에 전향적으로 협상할 것을 주문하면 문제는 상당부분 풀린다. 그런데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저 모른체로 일관한다.

대통령의 소극적 태도에서 많은 사람들은 ‘불통’을 떠올린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지금 대통령에게서는 조급함과 초조함 역시 느껴진다. 발목을 잡는 세월호 정국을 경제활성화를 핑계로 벗어나 어떻게든 앞으로 달려 나가고 싶다는 그런 의지가 느껴진다. 그리고 사실은 이것이야 말로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는 원흉이다.

▲ 박근혜 대통령이 2014 인천 아시안게임 개막 25일을 앞둔 25일 오후 서울 노원구 태릉선수촌을 방문, 레슬링 국가대표팀 이유미의 굳은살 박힌 손을 어루만지고 있다. (연합뉴스)

대통령이 초조한 이유는 무엇인가? 관절이 쓰면 닳는 것처럼 권력도 쓰면 닳는다. 정권 2년 차는 시기로만 보자면 대통령의 전성시대다. 1년 차에선 뭘 몰라서 못하고, 4~5년 차에선 힘이 부족해서 못 하는 일들을 2~3년 차에 모두 해치워야 한다. 대통령이 정초부터 TV에 등장해 규제완화니 통일 대박이니 꿈같은 얘기를 늘어놓은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하지만 세월호특별법으로 구성되는 진상조사위원회가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면 국정 운영 동력을 상실할만한 무슨 사건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다.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살얼음을 걷는 정국이 3년 차까지 계속되는 셈이다. 따라서 이것은 안 된다, 그런 분명한 입장을 집권여당에 표명하는 게 구중궁궐에서 벌어지는 소박한 담소들의 실제 내용일 것이다.

집권여당이 이미 마음대로 통제가 되지 않는 지경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도 대통령을 조급하게 만드는 한 이유다. 대통령의 정치적 관절은 닳아만 가는데 당 내 비주류들의 세는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집권 2년 차의 선거에서 주요 포스트를 비주류들에게 모두 내준 친박 주류는 호남에서 이정현 당선을 쟁취하면서 겨우 체면치레를 했다.

충신 이정현이 지도부에 입성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당장 지도부 내에서 대통령 역할론이 나오자 이정현 최고위원은 바로 대응에 나서 “엄마에게 떼쓰면서 장난감을 골라달라고 한다”는 둥의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충심의 표현임과 동시에 위기의식의 발로다. 하지만 이정현 최고위원의 분투도 비주류들의 거친 발언을 막지는 못했다. 일부 의원들은 아예 세월호특별법으로 구성되는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줘도 된다는 주장까지 하고 나섰다. 친박은 기득권을 지키고 비주류는 기득권을 내주자는 주장을 하는 형국이 돼버린 것이다.

세월호특별법 협상은 친박 주류인 이완구 원내대표가 책임을 지고 있지만 언론 및 정치권 여기저기서 가만히 있는 김무성 대표의 역할을 반복해서 주문한다. 아직 갈 길이 먼 김무성 대표는 일단 눈치를 살피며 몸을 낮추는 모양새지만 결국 협상의 진전이 이뤄지는 시점에 유의미한 정치적 행보를 보여준다면 언론은 지난 철도파업 이후 또 한 번의 정치적 역량을 발휘한 것처럼 마구 포장을 해댈 것이다. 비주류인 김무성 대표의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대통령은 또 다시 초조해진다. 대통령 그 자신이 이미 대통령의 영향력을 여의도에서 차단시켜 본 장본인이 아닌가?

이렇게 놓고 보면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비대위원장만 첩첩산중의 답답한 처지에 놓인 게 아니다. 박영선 비대위원장은 두 차례 유가족들의 협상안 거부 사태로 치명적인 내상을 입었다. 취임 초기 생활정치를 하겠다며 강경파의 아이콘에서 온건파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변신을 감행하려 했지만 결국 또 장외에 내몰리게 됐다. 하고 싶어서 하는 투쟁이 아니라 당 내 갈등을 관리하기 위한 투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도 똑같은 답답한 상황에 놓여있다. 세월호특별법 국면을 시원하게 완결짓고 싶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 방법이 없다.

이럴 때는 결국 순리를 따르는 게 상수다. 세월호특별법으로 구성되는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해도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십분 활용하면 살아남을 재간이 얼마든지 있다. 약간의 피해는 감수해야겠지만 대형 참사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길이 나을 것이다. 대통령이 직접 김영오씨를 만나서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서라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고 하시라. 그리고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서는 모든 것을 책임을 지겠다고 말씀하시라.

그 다음날 모든 조간신문 1면은 대통령의 위대한 결단에 대한 칭송으로 가득 찰 것이고 주류와 비주류, 여야의 구분 없이 모든 정치세력이 만 하루 정도는 만세를 불러 제낄 것이다. 김무성 대표 같은 사람들은 그저 들러리다. 대통령의 국정수행지지도 역시 대폭 상승할테니 이 여세를 몰아 지금 그토록 하고 싶은 경제활성화니 규제완화니 하는 것들을 모조리 해결해버리면 되지 않겠는가? 그 하고 싶은 일들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장담은 누구도 하지 못하겠지만 지금 그렇게 불안에 떨고 있기보다는 시원하게 상황을 해결하는 게 좋은 선택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당은 대의민주주의나 대한민국의 사법체계를 지켜야하기 때문에 세월호 유가족들의 주장을 거부하는 게 아니다. 대통령이 그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의 한 마디면 답답한 상황은 해결될 수 있다. 이런 것도 못하면 도대체 대통령은 왜 됐느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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