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날은 차라리 넋두리가 어울린다.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40여일을 넘게 단식을 하고 있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 김영오씨에 대해 보수언론이 폭력에 가까운 방식으로 일방적인 보도를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종편에서는 이미 망언에 가까운 얘기들이 나온다. SNS 공간과 스마트폰 메신저 등에서는 김영오씨의 고향이 전북 정읍이며 그간 두 딸을 전처가 혼자 키우도록 방치했고, 민주노총 금속노조에서 쌓은 내공으로 극한의 단식을 벌여 결국 새정치민주연합의 비례대표 1석을 거머쥘 거라는 황당한 얘기들이 오가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측은 이를 집권여당의 여론조작으로 규정했다. 25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총회에서 박영선 비대위원장이 “유언비어와의 전쟁을 선포한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은 그런 이유다. 새누리당은 즉각 반발했지만 심재철 의원의 소위 카카오톡 문건 유포 의혹이나 김재원 의원의 대외비 문건 의혹 등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의혹 일부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 대한 ‘악선동’의 책임이 반드시 집권여당에 있는 것이라고 확언하기도 어려운 상황인 게 사실이다. 오히려 우리가 이쯤에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그 누군가의 공작 여부에 대한 것을 넘어서, 김영오씨를 음해하는 허약한 논리의 우격다짐에 우리 모두가 속아 넘어가고 있는 이유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간단하다. 김영오씨가 하다못해 민주노총 위원장이라고 해도 자식을 잃은 입장에서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에 돌입하는 것은 이상할 게 없는 행동이다. 그가 설혹 아버지로서 부족한 인생을 살았다고 해도 자식 하나를 잃은 입장에서 어떤 뉘우침의 계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소인배적 마음가짐으로 어떤 이득을 바라든 다른 방법이 여러 가지 있음에도 굳이 40여 일 간 단식을 하는 방법을 택해 몸을 망치기로 작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투쟁의 수단으로 단식을 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김영오씨의 육체적 위기는 육안으로도 확인이 된다. 그의 앙상하게 마른 팔다리를 보고서도 그가 어떤 ‘술수’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비합리적인 사고다. 일부 극성스런 사람들이 주장하는 대로 그를 진료한 의사가 대단한 운동권 출신이라고 가정해도 마찬가지다. 김영오씨에 대한 치료는 수치를 통해 진단된 여러 상태에 맞춰 혈당수치를 정상화시키는 방법으로 진행됐다. 그가 여전히 식사를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구태여 강조할 필요도 없다.

▲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 농성 중 건강 악화로 병원으로 이송된 '유민아빠' 김영오 씨가 22일 오후 서울 용두동 동부병원 병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있는 사실을 이리저리 끼워 맞춰 악의적 맥락에 배치한 조악한 글들을 마치 새로운 진실을 알게 된 것 마냥 돌려보며 환호한다. 그들의 그런 태도에는 두 가지 형식이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주로 노령층에 국한된 것인데, ‘반공주의에 의해 학습된 의심’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만한 사고방식이다.

과거 노령층이 반복해서 학습했던 것은 북한의 ‘의도’에 관한 것이었다. 독재정권은 북한이라는 뿔달린 미지의 공포스런 존재를 언제나 강조했다. 특히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으로부터 내려온 좌우갈등이 남긴 실제적인 상처는 북한정권 또는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의도를 추론하는 행위를 멈출 수 없게 했다. 이들은 북한 정권이 파견한 간첩이 평범한 사람으로 위장을 하고 우리 주위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일상적 불안감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이런 환경에서 사고의 근본을 형성해온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김영오씨 단식의 배후에 어떤 ‘의도’가 있을 거라는 의심을 제기하는 행위는 그다지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김영오씨의 고향이 호남이라는 것과 민주노총 조합원 신분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학습된 의심을 다시 자극하는 주요한 요소다. ‘김영오씨의 단식은 박근혜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것’이란 서사가 성립하는 데에는 찰나의 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표현만 안 했을 뿐이지, 그들이 김영오씨에 갖는 의심의 근원은 ‘빨갱이’에서 파생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들의 의심을 자극하는 방아쇠는 40여 일 간 단식을 진행한 김영오씨의 육체가 갖는 ‘숭고’이다. 숭고란 그저 멋있다는 얘기를 겉멋으로 일컫는 말이 아니다. 만일 그랜드캐니언을 방문한다면 그랜드캐니언을 좋아하는 사람이건 싫어하는 사람이건 그 협곡의 엄청난 크기에 압도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숭고란 우리가 세계의 규칙으로서 받아들인 관념적 질서를 넘어서는 어떤 현현에 대한 감상이다.

이 감상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여전히 우리의 몫이다. 예를 들어 김영오씨의 얼굴에서 예수를 보는 사람은 이 숭고를 찬양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다. 반대로 그러한 선택을 어떤 이유에서든지 강렬히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숭고함이 사실은 어떤 속임수나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왔다는 근거가 어떻게든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사람들에게 김영오씨의 단식은 더 많은 물질적 보상과 명예, 자리와 권력에 대한 갈구로 요약되는 세속적 욕망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것이 김영오씨에 대한 두 번째 종류의 악의적 태도로서 굳이 명명하자면 ‘자본주의적 냉소’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김영오씨의 육체가 갖는 숭고성은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는 장삼이사들의 차원, 즉 애초에 우리가 살고 있는 관념적 질서의 차원으로 끌어내려지며 숭고는 곧 술수가 된다.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는 체제가 잉태한 우리 사회의 집단적 사고방식으로부터 도출되고 있으며 하나의 거대한 정치적 냉소주의를 형성하고 있다. 이 정치적 냉소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오랫동안 우리 정치를 격동하게 만드는 동력이었으면서 동시에 기성정치로 수렴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냉소주의를 기반으로 현실 정치를 냉소하며 어떤 새로운 대상에 환호했다가 그 대상이 기성정치에 편입되면 다시 그에 대해 냉소적 태도를 보이는 행태를 반복해왔다. 이러한 상황은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이나 유럽의 정치지형에서 극우주의가 준동하는 이유에 대해 기성 정치가 초래한 현실에 대한 냉소가 변화의 열망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이를 뒷받침한다.

극우주의는 그 급진성 때문에 종종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보수주의자들에게도 위협적이다. 때문에 보수세력이 이런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면 극우주의의 인식론적 토양이 되고 있는 냉소주의를 제어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할 일이다. 하지만 보수언론과 종편들은 대중의 냉소를 제어하기는커녕 오히려 확산시키는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김영오씨의 단식을 둘러싼 보도 같지도 않은 보도들은 그렇게 밖에는 평가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들의 수준이 하도 저질이어서 차라리 이런 현학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당황했다면 사과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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