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고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좋아해 잘 알려진 이 문구의 뜻은 옳은 길을 가는 데에는 거칠 것이 없다는 의미로 늘 정도를 지키면 따로 잔재주가 필요하지 않다는 취지의 경구다. 이 문구는 최근 대인기를 얻고 있는 영화 <명량>에서 왜군 장수인 도도 다카도라가 내건 깃발에 뜬금없이 적혀있어 재조명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을 설명하기 위한 극적 장치겠지만, 과거의 정치사를 기억하는 이들의 입장에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책없는 ‘배짱’을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최근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을 보고 있노라면 이 ‘대도무문’의 경구가 다시 가슴에 닿는다. 그의 거침없는 입담이 과거의 ‘배짱’을 추억하게 한다. 박영선 비대위원장은 세월호특별법에 대한 여야 합의에 반발해 농성에 들어간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만난 자리에서 “모든 것을 다 해달라고 하면 협상이 안 된다”면서 여야 합의안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그는 왜 협상 과정에서 세월호 가족대책위와 논의하지 않았느냐는 항의에 “대책위와 논의하는 순간 협상이 안 된다”고 대답했고, 여야 합의를 무효로 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협상도 하지마라, 아무것도 하지 마라, 철회하고 나서 대안은 뭔가? 대안을 달라”고 발언했고, 가족대책위의 주장이 유족 전체의 의견이 아니라면서 “개인적으로 카톡이나 메시지를 보내는 분들 중에는 내 의견에 동의하는 분들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발언에 대해 가족대책위 측이 항의하자 “왜 저한테는 마음대로 하냐면서 대책위는 독단적으로 하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박영선 비대위원장은 이들을 만나기 전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에서 “난 애초부터 (진상조사위원회에 대한 수사권 부여) 하지 말라고 했다”고 발언하는가 하면 자신에게 재협상을 요구하는 당 내 일부 의원들에 대해 “(협상하는 동안) 자기들은 해외로 놀러 다니고 싹 다 도망간 것 아닌가, 다 놀다가 이제 재협상 쪽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 박영선 비대위원장은 다양한 언론 보도에 인용된 발언을 통해서 현재 자신이 진행한 협상의 정당성을 결국은 유가족들이 인정하게 될 것이고 국민들도 긍정적으로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위의 모든 발언들은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대학생들이 당사를 점거하고 거리에서 시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국에서 나온 것이라는 맥락을 고려하면 강한 ‘자기 확신’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가 11일 국회 운영위원장실에서 열린 세월호 특별법 관련 여야 원내대표 주례회담을 마치고 나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영선 비대위원장의 이러한 ‘자기 확신’은 지난해 ‘외국인투자촉진법’ 처리 과정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당시 민주당 소속으로 법사위원장을 맡았던 박영선 비대위원장은 당 지도부가 여당과 합의하고 박지원 의원 등 중진들이 찬성 입장을 보였던 외국인투자촉진법을 단독으로 처리하지 않아 여당과 보수언론으로부터 ‘강경파’라는 평가를 받게 됐다. 당시 박영선 비대위원장은 의원총회 자리에서 외국인투자촉진법 처리 불가를 외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데, 이런 사례를 보면 그의 ‘자기 확신’에 특출난 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회정치는 끝없는 협상과 타협의 연속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애초 진상조사위원회에 특별사법경찰관을 두는 것으로 수사권 보장을 주장했던 새정치민주연합 측 안이 사실상 수사권이 없는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으로 후퇴를 거듭한 과정을 아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박영선 비대위원장이 “협상에는 상대가 있는데, 상대가 세월호 참사를 조류독감이나 교통사고 정도로 인식하고 있고 세월호 사건이 망각의 늪에 빠지도록 세월이 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전제조건이 있다”라며 고충을 토로하는 것도 다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인의 역할은 단지 협상기술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정치인이란 후퇴하고 타협을 해 누더기가 된 대안이라도 대중들에게 그것을 지지할 수 있는 명분과 논리를 제공해야 한다. 그런데 박영선 비대위원장의 행보는 당사자들에게 오히려 자신들의 대안을 지지할 수 없는 이유만 만들고 있다.

박영선 비대위원장은 현재 여야의 세월호특별법 협상 과정을 대도(大道)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대도는 정당하니 그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거칠 것이 없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월호특별법 협상은 오히려 좁고 구부러진 산길에 가깝다. 세월호 참사는 체제와 권력에 결부돼있는 문제다. 살아있는 권력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숨기고 조작할 수 있다.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수많은 의혹이 아직도 해소되지 않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소한 인신을 구속하고 압수수색을 할 수 있어야 살아있는 권력의 치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해달라는 주장을 하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여당이 형사사법체계의 근간이 흔들린다는 둥의 주장을 하지만 최소한 수사권 부여에 대해서는 국회의 결정에 의한 특별검사나 특별사법경찰관을 진상조사위원회에 포함시키는 방법 등으로 보장할 수 있다는 게 대한변호사협회 등의 주장이다.

하지만 박영선 비대위원장은 진상조사위원회 내의 의결권 확보와 동행명령권 확대, 상설특검을 통한 중립적 수사의 보장이라는 대안을 유가족들에게 설득해내야 하는 입장이다. ‘자기 확신’을 유가족들에게 강요할 입장이 전혀 아니다. 유가족들이 소통불가의 상태를 고집하고 있는 것만도 아니다. 유가족들은 다양한 자리에서 수차례에 걸쳐 야당에 대한 미련을 언급한 바 있다. 유가족들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갖춘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주장하면서도 처음부터 기소권을 보장하지 않는 형태의 안을 내온 야당에 대해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지금 박영선 비대위원장에게 필요한 것은 대도를 걷는 호연지기가 아니라 좁은 산 길을 무사히 건너기 위한 임기응변이다.

지금 박영선 비대위원장은 외롭다. 박영선 비대위원장의 ‘결단’을 옹호하는 것은 오로지 보수언론들 뿐이고 ‘박영선의 편’이었어야 할 당 내외의 몇 안 되는 정치적 기반들은 쉽사리 박영선 비대위원장을 옹호하고 나설 수 없는 형편에 내몰려있다. 무엇보다도 사건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유가족들이 강경한 태도를 고집한다면 ‘협상’에 있어서도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누굴 속일 수 있는 잔꾀를 부려보라거나 어떤 기가 막힌 ‘퍼포먼스’를 해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잔꾀든, 퍼포먼스든, 어떤 원칙이든 뭐든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야 하고 최대의 효과를 거두어야만 한다.

지금 모든 상황이 어그러져만 가고 있다는 사실을 박영선 비대위원장이 모르지 않을 것이다. 박영선 비대위원장에게 이 국면은 정치적 시련일 수 있다. 시련을 잘 넘기면 야권의 주요한 정치인으로서 한 발 더 내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지금 필요한 게 무엇인지 좀 더 심도있는 고민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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