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0 재보선이 야권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할 얘기는 많고 반성은 복잡해야할 결과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향후 시계가 '제로'라는 전망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진보정치의 몰락 역시 예사롭지 않다. 당장에 진보정치가 낳은 가장 걸출한 인물 가운데 한명인 노회찬이란 이름의 재기가 불투명해 보인다. 물론, 선거 자체로만 본다면 ‘여전한 노회찬의 경쟁력’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노회찬의 경쟁력을 보여주기는 했는데…
서울 동작을 선거 결과는 46.8%라는 다른 지역구보다는 높은 투표율을 기록한 가운데 새누리당 나경원 후보가 3만 8311표(49.9%)를 얻어 3만 7382표(48.7%)를 얻은 정의당 노회찬 후보를 929표 차이로 꺾고 당선됐다. 두 후보의 표차는 929표(1.2%)에 지나지 않았다. 이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구보다 서너 배 많은 1403표의 무효표가 나왔는데, 투표지가 새정치민주연합 기동민 후보가 사퇴하기 사흘 전 인쇄돼 물러난 기동민 후보에게 찍힌 투표지가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노동당 김종철 후보의 득표 1076표(1.4%)도 두 후보 간의 격차보단 많았다.
선거 결과를 놓고 보면 만약 이 지역에서 재보선이 아닌 총선에서 위 후보들이 나왔다면 노회찬 후보가 박빙으로 승리하고 김종철 후보의 득표율도 더 올라갔으리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여름에 펼쳐지는 재보선은 청년층이 휴가나 방학 등으로 지역에서 많이 빠져나가는 관계로 야권에 불리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노동당 후보의 득표와 무효표가 아쉬울 수 있지만 이 역시 이번 선거에서 극복하기는 힘든 부분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정의당과 노동당은 각자의 사정과 실책에 의해 사실상 협력하기가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또한 노회찬 후보의 표에 김종철 후보의 표를 합쳐봤자 나경원 후보에 단지 47표 앞설 뿐인데, 설령 김종철 후보가 사퇴했다 한들 그 지지층 중 47표도 이탈하지 않았으리라 보기는 어렵다.
▲ 재보궐선거 '동작을'에 출마한 정의당 노회찬 후보가 7월 30일 오후 서울 동작구 사당동 자신의 선거 사무실에서 패배를 확인 한 뒤 지지자들에게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또 기동민 후보를 찍은 무효표는 투표는 하되 뉴스에 기민하지 못한 이들일 가능성이 크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기표 자체가 새정치민주연합 기존 지지층의 항의일 가능성도 있겠으나, 그렇게 항의할 이들보다는 차라리 투표장에 나타나지 않은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세히 따져봐야 할 것은 ‘이 선거에 참여한 결과’가 아니라 ‘이 선거에 참여한 이유’다. 재보선, 기존에 활동하고 있었던 노동당 김종철 후보, 야권연대에도 승복하지 않을 일부 새정치민주연합 지지층 등은 이미 주어진 변수였다. .
그런 점에서 볼 때 우선, 지역구를 옮겨가며 서울 동작을 선거에 참여한 정의당과 노회찬 후보의 판단이 옳았는지가 의문이 든다. 이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접근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소략하게 접근하기 위해 정의당 노회찬 후보와 노동당 김종철 후보의 그간의 선거 결과를 간단히 살펴보자.
먼저 서울 동작을에서 세 번째 국회의원 선거에 나온 김종철 후보의 득표율 추이를 보자. 2008년 18대 총선 때 해당 지역구에 처음 이사 온 그는 ‘정몽준 대 정동영’ 빅매치가 벌어지는 와중에 2.0%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지역활동이 쌓인 2012년 19대 총선에선 역시 ‘정몽준 대 이계안’의 대결로 화제가 되는 가운데 5.1%를 득표했다. 초반 여론조사에선 7.1%의 지지율을 보이기도 했다.
노회찬 후보는 18대 총선과 19대 총선에서 서울 노원병에 도전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선 야권연대 없이 진보신당 후보로 출마해 43.1%를 얻은 한나라당 홍정욱 후보에게 아깝게 밀렸다. 당시 노회찬 후보의 득표율은 40.1%로, 두 후보간 표차는 2400표 남짓이었다. 민주당 후보였던 김성환이 1만3천표가 넘게 가져가 16.3%의 득표율을 보였다.
2012년 18대 총선에선 진보신당을 이탈하여 통합진보당 후보로 출마한 가운데 야권연대를 통해 민주당 후보와의 단일화를 이뤄냈다. 이 선거에서 노회찬 후보는 57.2%를 득표해 39.6%에 그친 새누리당 허준영 후보를 일축했다.
진보정당, 지역정치와 야권연대의 딜레마
물론 돈을 들여 서로의 가설을 검증할 수 있는 수준의 각종 여론조사를 하지 않은 이상 선거 결과에 대한 해석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위 선거결과를 보고 사람들이 분석하기 위해 들이밀 요소가 무엇 무엇인지는 간략히 정리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야권연대’, ‘지역정치’, 그리고 ‘전통적 지지층의 비토’ 정도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이중에서 앞의 두 개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면, 이것은 진보정당 운동에 일종의 딜레마로 다가온다. 진보정당의 정치적 지향은 대체로 ‘지역정치’를 통해 실천되기는 어려운 것들이다. 물론 이를 통해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 중앙정치의 변혁이 없이는 뚜렷한 진전이 어렵다. 또한 진보정당 운동의 종사자들은 대부분 국회의원은 단순히 지역을 대변하는 이가 아니기 때문에 지역구 의원보다 비례대표 의원의 숫자가 더 늘어나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다. 그렇더라도 소선거구제에 비례대표가 적은 선거제도의 실상에서 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
▲ 정의당 노회찬 동작을 국회의원 후보가 지난 7월 27일 서울 동작구 흑석시장 입구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정세균 의원(왼쪽부터), 기동민 전 동작을 후보, 허동준 전 동작을 지역위원장, 정동영 고문, 정의당 심상정 원내대표, 천호선 대표와 함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연합뉴스)
‘야권연대’ 역시 마찬가지다. 진보정당의 정치적 지향이 야권연대에 썩 들어맞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소선거구제, 게다가 단순다수제의 선거제도 상황에서 당선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선거연대를 완전히 부정하기도 쉽지 않다. 이런 딜레마를 벗어나려면 결국엔 선거제도 개편이 필요하겠으나, 이 역시 현실적으로 볼 때 거대 양당이 군소정당에게 유리한 선거제도 개편에 찬성할 리 없단 점에서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일 뿐이다.
문제는 지역정치와 야권연대가 각자 진보정당 운동에 딜레마를 안길 뿐 아니라 서로 간에도 어느 정도 길항한다는 것이다. 제1야당에 대한 야권연대를 효율적으로 요구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상대적으로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지역구를 찾아 기민하게 후보를 배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당선을 기대해볼 만한 후보’와 ‘협상에 따라 사퇴를 시킬 수 있는, 캐스팅보트를 쥘 수 있는 후보’를 구별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민한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지역구를 옮기는 정치인’, 민중의 언어로는 ‘철새’를 양산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현실의 정치지형도에서 이와 같은 행위는 유권자들의 진보정당에 대한 신뢰를 깎는다. 그렇지 않다면 지역구에서 처음 출마하는 후보들이 그토록 자신과 지역의 인연을 강조하고 떠나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정의당의 실책, 중앙정치에 대한 어떤 조급증?
이번 선거에서 정의당은 야권연대를 위해 지역정치를 상당 부분 희생하는 전략의 실행을 감행했다. 2013년 4월 재보선을 통해 여의도에 입성한 안철수 의원 때문에 기존의 지역구인 서울 노원병을 사실상 상실한 노회찬 전 의원 뿐 아니라, 2012년 19대 총선 서울 은평을에서 이재오 전 새누리당 의원과 초박빙의 승부를 펼쳤던 정의당 천호선 대표도 지역구를 옮겨야 했다.
정의당은 이번 선거에서 정의당의 존재감을 높일 뿐 아니라 새정치민주연합에게 야권연대의 필요성을 알리는 것을 목표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장 새정치민주연합과의 야권연대를 복원하여 정의당 원외 정치인 중에서 가장 대중성이 높은 노회찬 후보를 의원으로 만들거나, 새정치민주연합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수도권에서의 득표력을 과시하여 적어도 2016년 총선에는 새정치민주연합이 야권연대의 협상틀에 나서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이는 설령 노회찬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전략이었다. 2014년 재보궐선거에서 야권연대가 성공적으로 작동하여 노회찬 의원은 당선되고 몇몇 후보는 사퇴했다고 치자. 정의당은 야권연대가 성사된 지역에선 새정치민주연합이 당선되기를 바라야 한다. 그래야 협상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이번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은 지역에서 기반을 닦아본들 2년 후에 야권연대에 있어 현역의원과 경쟁해야 하는 매우 불리한 상황에 처한다. 이럴 경우 이들은 해당 지역구가 야권연대 협상 속에서 전략공천지역이나 경선지역으로 배정되기 어려운 현실에 직면해야 한다.
야권연대가 그저 후보만 여기저기 꽂으면 이뤄질 수 있는 정치적 과정이 아니란 것도 문제다. 정의당은 과거의 민주노동당처럼 민주노총과 같은 몇몇 대중조직의 확고한 지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중앙정치의 차원에서 그 당의 이름으로 지역별로 고정적 지지율을 가지고 있는 상황도 아니다.
이는 정의당만의 문제가 아니라 2008년 분당 이후 스스로도 약화된 민주노총의 지지를 상실하고 최근 일련의 사건들로 대중의 호감을 상실한 제반 진보정당들의 문제인 것이 사실이다. 이번 재보궐선거에서 정의당과 노동당은 조직기반이 없는 곳에 새로운 후보를 냈을 경우 원래 갖고 있던 지지율도 채 안 나오는 경우를 수차례 체험하였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정의당이 2016년 총선에서 야권연대에 협상카드로 들이밀 만한 후보들을 양산하려면 지금부터 지역정치에라도 신경을 쏟았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 지역구가 적은 2014년 재보궐선거에서 무리하게 단일화를 하려다 보니 2016년 총선에서 ‘당선을 기대해볼 만한 후보’로 쓰여야할 천호선과 이정미 등이 ‘협상에 따라 사퇴를 시킬 수 있는, 캐스팅보트를 쥘 수 있는 후보’로 소모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 정의당 노회찬 후보가 7월 30일 오후 서울 동작구 사당3동 자신의 선거 사무실에서 천호선 대표와 악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노동당과 김종철 후보는 노회찬 후보의 결정에서 자신들이 배려받지 못 했다고 주장한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정의당의 이번 선거 전략의 핵심은 그것이 자신들끼리도 배려하기가 힘든 전략이었다는 데에 있다. 만약에 정의당이 새로운 얼굴들을 내보내도 각 지역구에서 3~5% 정도의 득표율을 기대해볼만 했다면 이런 전략을 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가정은 정의당이 처한 상황의 어려움과 함께 이번 선거 전략의 무리함도 잘 드러내준다.
그리고 이 어려움은 노회찬 후보의 낙선으로 인해 2016년 총선에서도 가중될 전망이다. 야권연대가 상시적으로 가동될 수 있으며, 가동되어야만 한다는 전제 하에 움직이는 행위는, 지금과 같이 진보정당 운동의 자산이 탕진된 시점에서는 ‘판돈’도 없이 ‘개평’받아 ‘한탕’해보겠다고 ‘노름판’을 기웃기웃하는 것에 다를 바가 없다. 그나마 지금까지 정의당이 이렇게까지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몇몇 인사들의 대중적 인지도에 힘입은 바이겠으나, 그 자산을 이런 식으로 탕진한다면 낄 수 있는 ‘판’도 몇 번 남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애초에 정의당이 이번 재보선에 개입한 것이 중앙정치에 개입해야겠다는 어떤 조급증의 발로가 아닌지 물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노동당의 실책, 어떤 안이한 운동권 논리?
그러나 정의당의 어려운 처지가 보여주는 것은 앞서 말했다시피 진보정당 운동의 전반적인 하강과 큰 관련이 있다. 5석의 의석을 가지고 있는 정의당의 처지도 그럴 진데 원외정당인 노동당의 처지는 훨씬 열악하다.
노동당은 이번 선거에서 서울 동작을에 김종철 후보를, 경기 수원정에 정진우 후보를 내보냈다. 정진우 후보야 지역구선거에 처음 나온 상황이었지만, 김종철 후보의 경우 2008년부터 서울 동작을에 출마했으므로 그동안 닦은 지역기반을 확인하겠다는 의도가 있었다. 당시로서는 정의당 노회찬 후보의 해당 지역구 출마를 예측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19대 총선 당시의 지지율(5.1%)은 물론 이 지역에서 첫 출마한 18대 총선 당시의 지지율(2.0%)에도 못 미치는 열악한 결과(1.4%)를 받아들였다. 기존의 지지율이 지역활동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진보후보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노회찬 후보가 나서자 김종철 후보의 지지층 중 상당수가 이탈한 상황이라 볼 수 있다.
김종철 후보가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출마한 이유 역시 자신에 대한 고정지지율을 만들어 훗날 야권 후보단일화를 거쳐 당선이 되겠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자꾸 지역구를 옮겨 다녀서는 그 고정지지율을 만들어내기 어렵기에 한 군데를 파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 김종철 후보와 같은 이들의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노회찬 후보가 함께 출마하고 새정치민주연합 기동민 후보 사퇴 후 ‘야권단일후보’를 자처하게 되면서 상황이 매우 어려워졌다. 노회찬 후보가 당선될 경우 지역정치를 지속하기 어렵고 노회찬 후보가 낙선될 경우엔 향후 야권연대를 추구하기 힘든 딜레마 상황에 빠진 것이다.
그와 별개로 이번 선거에서는 두 후보가 단일화할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노동당과 김종철 후보는 향후 진보정당 개편에 대한 당대당 논의가 있으면 단일화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이 논의가 이루어졌던들 양자가 만족할 만한 협의를 하고 단일화가 이루어졌을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현실은 정의당 측이 당대당 논의를 받아들이지 않아 이후 별다른 논의없이 각자 완주하는 결말이 되었다.
▲ 서울 동작을 국회의원에 도전하는 새누리당 나경원(오른쪽부터), 정의당 노회찬, 노동당 김종철 후보가 지난 7월 27일 서울 동작구 흑석동 달마사에서 만나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렇게 된 이유는 새정치민주연합 기동민 후보가 사퇴하던 그날 노동당 김종철 후보와 통일진보당 유선희 후보가 합의문을 작성하고, 유선희 후보가 김종철 후보를 지지하면서 사퇴했기 때문이다. 합의문 내용이야 어쨌든 김종철 후보는 ‘종북’이라 낙인찍힌 후보와 연대한 셈이 되었고, 새정치민주연합이나 정의당의 입장으로는 그를 연대 안에 끌어들이기가 더욱 부담스럽게 되었다.
김종철 후보가 유선희 후보와 작성한 합의문은 노동당 차원에서 충분히 조율된 것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어이없는 실수였다. 무엇보다 합의문 내용도 실책이었다. 노동당이 통합진보당에게 요구해야 할 것을 전혀 요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후보의 합의문을 보면 4항 “진보정당 간의 연대와 협조, 단합과 단결을 실현해야만 한다”와 7항 “김종철 후보를 진보정당 단일후보로 결정하였다”을 볼 때 두 후보의 선본이 서로를 ‘진보정당’의 틀 안에 넣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5항 “양 당(통합진보당, 노동당)은 당면해서 박근혜 정권의 종북공세 일환인 통합진보당 정당해산 심판청구와 소위 내란음모 사건 조작, 그리고 전교조 법외노조화 각종 민주주의 파괴에 만서 공동행동을 해 나간다”로 공동의 투쟁방향을 명시하고 있다.
이중에서 김종철 후보는 5항에 대해서만 후보끼리의 합의가 당의 합의로 나간 것은 실책이었다고 반성했다. 이는 합의문이 당론에는 어긋나지 않으며 다만 절차적 측면에서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정치세력의 연대가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고민이 매우 적었던, 관성적인 '진보진영'의 단합을 추구한 문구였다고 생각된다. 통합진보당이 아닌 어떤 정당이라도 부당하게 종북으로 몰린다거나 위헌정당으로 몰려 정당해산 심판청구를 당하고 있다면 노동당은 이에 대해 정부를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게 선거연대를 해야 할 사유는 되지 못한다.
이 합의문을 보자면 노동당 혹은 적어도 김종철 선본은 상대방에게 필요한 약조도 듣지 못한 채 섣불리 ‘공동행동’을 약속하고 상대방을 ‘진보’의 틀 안에 넣어준 것으로 보인다.
▲ 서울 동작을(乙)에 출마한 통합진보당 유선희 후보와 노동당 김종철 후보가 지난 7월 24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유 후보는 "노동당 김종철 후보를 지지하며 후보에서 사퇴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가령 ‘내란음모사건 조작’이라 명칭된 그 사건을 보자. 소위 '이석기 사건'에 대해, 노동당이 이석기와 'RO'의 위험성이 충분히 입증되지 못했으므로 이건이 법리적으로 처벌할 사안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정부와 법원에 대해서만 해야 할 말이다.
그게 아니라 통합진보당과 공동행동을 해나가겠다고 할 때엔 그들에게도 요구할 것이 있다. 그들은 이석기 등의 발언이 농담이었거나, 국정원이 녹취록을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말하는 ‘조작’은 국정원이 내란도 안 되는 행동을 내란음모죄로 과도하게 걸었단 의미의 ‘조작’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자신들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국정원이 녹취록을 날조했다는 의미의 조작이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은 사건을 파고 들어가볼 때 유병언의 시신이 가짜라는 음모론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노동당의 구성원 중 대다수도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럴 경우 노동당은 적어도 통합진보당에게 "그 집단에 대한 국가의 처벌에는 반대하지만 그 집단에서 그 녹취록을 통해 표방되는 사상이 매우 위험하고 진보도 아니며, 유권자들에게 이 부분에 대해 솔직하게 사과를 구하고 이들의 사상이 통합진보당을 대표하지 않는다고 선언해야 한다. 그래야 통합진보당이 진보정당이며 우리의 교류·협력대상임을 인정할 수 있다" 정도의 요구는 했어야 했다. 그리고 이럴 경우 유선희 후보 측은 수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부분이 생략되었을 때, 노동당은 ‘조작’이란 말의 여러 층위를 활용한 통합진보당의 ‘상징조작’ 내지는 유권자들을 향한 거짓말에 놀아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소송의 경우에도 노동당이나 시민사회가 국가를 비판할 수 있는 논거는 첫째로 'RO'의 위험성이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 둘째로 'RO'와 통합진보당의 관계가 명확히 증명되지 않았다는 것 정도가 있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해 노동당이 통합진보당에 대해 요구해야 할 것은 위에 적은 것과 동일하다. 그리고 두 번째 논거와 관련해서 두 정당의 공동대응을 말하려면 "그 녹취록에 등장하는 발언자들을 정당 운영에서 배제하라" 정도의 요구는 했어야 했다. 그리고 이럴 경우 유선희 후보 측은 결코 합의문을 발표하지 않았을 것이다.
▲ 7·30 재보궐선거 통합진보당 수원시 국회의원 출마후보들이 지난 7월 25일 새정치민주연합과 정의당의 후보단일화에 대해 비난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이처럼 통합진보당은 야권연대의 틀 안에 들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지만 다른 야당의 반응은 냉랭하다. (연합뉴스)
그렇지 않을 경우 노동당은 통합진보당 일부 구성원의 발언 내용으로 채워진 그 녹취록이 전적으로 날조라고 함께 거짓말을 하거나, 그 녹취록이 날조는 아니지만 그 사상이 자신들이 지향하는 진보의 스펙트럼 안에 포괄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는 노동당이 이와 같은 정치적 실수를 저지른 것은, 해당 국면에선 너무 존재감이 미미하여 비판받지도 않았지만 ‘안이한 운동권 논리’의 전형이라 볼 수 있다.
‘RO’ 녹취록처럼 말한 이들이 실제로 소속되어 있는 정당이라도, 내란음모죄를 적용하거나 정당해산 심판청구를 해선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런 정당이 ‘진보정당’이며 교류·협력 대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러나 노동당의 일부 구성원들은 이러한 점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당에는 역사적으로 NL운동권에 대해 비타협적이었던 이들이 다수 있음에도, 투쟁현장에서 만날 수 있는 협력자들을 ‘동지’라고 부르는 진영논리적 어법에 익숙해져 있기 떄문일 것이다.
진보정당, 파탄 위에서 다시 설 수 있나
이렇듯 2014년 ‘노회찬 낙선’을 둘러싼 정황은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민주당을 중심으로 작동했던 야권연대 전략의 파탄을 보여준다. 또한 그 파탄을 드라마틱하게 만들었던 ‘통합진보당 딜레마’ 역시 여전히 진보정당 운동을 배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십여 년 넘게 쌓아온 운동의 자산이 파탄나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보이는 관성들은, 진보정당 운동이 밑바닥을 찍고 다시 올라오는 것이 가능할지를 묻게 만들 정도다.
이번 재보선이 끝난 후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을 막론하고 새정치민주연합을 맹렬하게 비판하는 일이 유행이 되었다. 물론 새정치민주연합은 충분히 그러한 비판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다. 또한 과거 민주노동당이 가장 상승세일 때라도 진보정당을 향한 비판은 관성적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의 진보정당들은 그러한 관성적인 비판마저 생략당할 만큼 존재감이 없는 상태다. 또한 새정치민주연합과는 달리 누리는 기득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바뀌는 일이 잘 없는 집단이기도 하다.
지난 몇 년간 진보정당 운동은 ‘대중성’을 선택했을 때나 ‘선명성’을 선택했을 때나 그 나름의 파행을 거듭해왔다. 이제는 ‘바닥’을 벗어나려다 매번 ‘바닥 밑에 더 바닥’을 맛보는 조급증을 벗어나, 사회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차분하게 점검하는 시간을 가질 일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이야 언론에서 차고 넘치는 충고들을 소화를 안 해서 문제라지만, 훨씬 더 열악한 여건의 진보정당 운동은 결국 내부에서 답을 찾아갈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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