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대1로 질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제 한 군데 한 군데 계산해보니 우리가 이길 것도 같다."

새누리당 관계자의 말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역시 ‘동아리’나 ‘클럽’ 수준이었다는 평가도 들린다. ‘문창극 쇼크’ 이후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 하락에 고심하던 새누리당이 새정치연합의 ‘공천 내홍’에 안도하는 분위기다. 마침 중국 시진핑 주석 방한을 계기로 대통령 지지율도 반등세로 돌아선 모양새다.
정가에서 7.30 재보선은 새누리당 전당대회와 더불어 박근혜 정부 레임덕의 유력한 계기로 평가되었다. 재보선에서 야권이 대승하고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김무성 의원이 당대표로 선출될 경우 지금껏 ‘콘크리트 지지층’을 유지해왔던 박근혜 정부 역시 수렁에 빠질 수 있다는 전망이었다. 하지만 이 땅의 제1야당은 다시 한번 새누리당 ‘콘크리트 지지층’과 함께 새누리당 존립의 기반이며 막강한 우군임을 입증했다.
"민주화운동 세대 전체가 시험대에 올라 있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 그대로 밀어붙이면 국민들에게 심판받습니다“
기동민 전 서울정무부시장의 동작을 전략공천에 반발하여 기동민의 후보수락 기자회견장에 들어온 허동준 전 동작을 지역위원장의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기동민 전 부시장은 1966년생, 허동준 전 지역위원장은 1968년생이다.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이들이다. 1990년대에 386이란 이름을 획득했고 2000년대엔 486이라 불린, 이제는 586으로 진입하기 시작한 그 세대다. 이들은 국회의원은 물론 당관료의 차원에서도 새정치민주연합의 ‘주류’라 불린다.
▲ 7·30 재·보선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서울 동작을(乙) 후보로 전략공천된 기동민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오른쪽)이 8일 국회 정론관에서 출마회견 하던 중 허동준 전 동작을 지역위원장의 거친 항의에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공천 내홍’이 ‘민주화운동 세대 전체를 시험대에 올린 사건’이라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미 시험대에 오른지 오래인 민주화운동 세대의 자성이 부족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공천의 세 가지 방법, 제각각 장단점 있어
‘기동민 전략공천’은 오류고 허동준을 선택하는 것만이 정답이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공천은 어느 정당에서나 어려운 문제고 명확한 기준도 없다. 진성당원제 정당이 아닌 다음에야 해당 지역에서의 오픈프라이머리 경선, 여론조사를 통한 경쟁력 있는 후보 선택, 참신하고 능력있는 후보에 대한 전략공천 중 무엇이 나은 선택인지는 판가름하기 어렵다.
오픈프라이머리, 시민참여 경선을 할 경우 시민들은 오히려 인지도가 높은 후보를 지지하기 쉽다. 현역 의원이었던 이가 계속해서 후보로 나오는 식이 된다. 2012년 총선 후보를 결정할 당시 허동준 전 위원장은 이계안 전 의원과 경선을 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지역에서의 꾸준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2014년에도 가령 금태섭 같은 이와 경선을 했다면 결과를 장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여론조사의 경우도 아전인수의 온상이 된다. 서로 다른 여론조사 결과를 들이밀며 상황에 따른 ‘표의 확장성’을 따지지만 곰곰이 본다면 모두 가정법이다. 기동민 후보와 허동준 전 위원장의 경우도 두 사람다 대중에게 인지도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기동민 후보의 경우 ‘박원순과 연계해서 선거운동을 한다면’ 이란 전제가 붙었다. 이런 전제가 허동준 전 위원장에게 매우 억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다. 한편 여론조사를 포함한 야권연대 경선이나 여론조사만을 토대로 한 단일화의 경우 사실상 ‘주사위 굴리기’라는 비판도 받아왔다. 의미가 없지는 않지만 한계도 많은 ‘여론조사 정치’의 딜레마다.
전략공천의 경우도 그 기준을 어떻게 잡을 것이며 누가 평가했느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다. 지역의 헌신성을 평가할 경우와 기타 다른 능력을 평가할 경우가 다르다. 여론조사 결과를 내세운 승리 가능성 전망까지 끼면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그럼에도, 전략공천은 ‘자기 사람 밀어넣기’의 위험을 가진 반면 정치권에 새로운 인물을 수혈하는 역할을 해왔다. 486세대의 상당수는 강력한 공천권을 가졌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의해 등용되었다. 이런 실정은 미국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가 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새누리당이 더 잘 단합하는 이유는?
새누리당이 제1야당에 비해 ‘공천 내홍’에 휩싸이는 경우가 적은 이유도 반드시 긍정적이지는 않다. 새누리당은 공천 낙선자에게 공기업 사장 같은 ‘낙하산 자리’를 더 잘 제공하는 세력이라 평가받는다. 미국에 비해서도 당관료가 의미가 없는 한국의 허약한 정당 정치 체제에서 공천 탈락자에 대한 배려의 능력은 부패와 연결되어 있기 십상이다.
또 새누리당은 대체로 재산이 많은 엘리트를 정치인으로 섭외하기 때문에 공천에 탈락한다 해도 반발해야 할 유인이 적다고 볼 수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공천 내홍’ 과정에서 금태섭 전 대변인은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동작을 공천에서 탈락한 후 수원 출마를 권유받았고 이에 대한 당내 반발로 ‘공천 내홍’이 확산되는 기류가 일자 출마할 생각이 없다고 물러섰다. 금태섭 전 대변인의 처신은 훌륭하지만 그도 허동준 전 위원장처럼 한 지역에서 14년을 생활정치했다면 쉽게 승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새누리당의 경우 정치를 젊을 때부터 전업으로 한 이들이 적기에 이런 문제가 덜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구조적 문제들이 산적해 있고 새정치민주연합이 억울한 지점도 있지만 문제의 핵심은 이익집단인 새누리당과 차별화된 가치연합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김근태 등 야권의 거두들이 차례로 사망한 이후 제1야당은 민주적 리더십도 규율도 없는 계파정치의 이전투구의 진흙탕에 빠진 상태다.
'새정치'에 부족한 '가치'의 실종
서로가 납득하는 가치에 대한 합의와 그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한 정치적 승리의 필요성과 전망이 공유될 때에 이권을 배분하는 새누리당과는 다른 방식으로 당내 갈등이 관리될 수 있다. 가치에서 정책을, 정책에서 전술을 도출해내고 서민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권정당임을 입증해야 한다.
도덕성 문제 역시 과거 민주화운동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도덕적 우월의식에서 빠져나와 구체적인 실무문제에서 보수정당의 관료 및 정치인들보다 상대적으로 도덕적인 모습을 보이며 공공선을 실현할 수 있음을 사례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번 재보선 공천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내홍이나 파행 뿐 아니라 이른바 ‘새정치’의 실종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당명의 줄임말을 새정치연합, 더 줄일 경우는 새정련이나 새민련이 아니라 새정치라고 써달라고 거듭 언론에 주문할 정도로 ‘새정치’에 집착하는 정당이다.
이는 안철수 공동대표가 민주당과의 합당 이전 이것을 내세웠고 합당의 명분으로도 이것을 내세웠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집착으로 풀이될 수 있다. 그런데 애초에도 안철수 공동대표의 콘텐츠 부족을 면피하는 단어란 평가를 들었던 ‘새정치’는 지방선거 이후 수사적인 차원에서도 소멸하는 느낌이다. 후보자들 중 누구도 새정치를 비중있게 언급하지 않는 상황은 콘텐츠가 없는 담론의 효용이 오래갈 수 없다는 평범한 진실과 함께 민주화 이후 제1야당이 공유하고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도통 알기 힘든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준다.
▲ 박원순 서울시장이 5일 2기 시정의 첫 현장시장실로 위례신도시를 방문해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이제 사람들이 언급하는 것은 ‘안철수의 새정치’보다는 ‘박원순의 시민정치’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박원순 서울시장의 ‘시민의 정치’는 새정치와는 다른 차원에서 물음표가 찍혀 있다. 태생부터 모호했던 새정치에 비해 박원순 시장의 시정은 시민들의 요구와 필요를 정확하게 챙겨주는 실무적인 부분이 강할 뿐 큰 그림의 영역에서 약하다는 지적이 많다.
박원순 시장 뿐 아니라 제1야당을 혁신하려는 모든 정치인들이 지금 새정치민주연합에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볼 때다. 가치연합으로 혁신하지 못한다면, 동아리는 결코 이익집단을 이길 수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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