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사장 공모 마지막 날인 24일, KBS 야당추천이사들이 특별다수제 도입을 다시 한 번 촉구했다.

야당 추천 이사들은 여야 7대 4구조인 KBS 이사회 한계를 극복하고 낙하산 사장을 방지하기 위해 사장 선임 시 특별다수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날 야당 추천 이사들은 사장 선임과 관련한 회의의 경우 의사 정족수를 현 재적 과반 이상 참석에서 3분의 2 이상 참석으로 변경하자는 구체적인 입장을 재차 강조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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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당 추천 이사들은 방송법 제46조 7항 “이사회는 재적이사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는 규정을 들어 특별다수제 도입을 거부하고 있다. (▷ 관련기사 : <"특별다수제 도입 없는 KBS 사장 선임 보이콧">)

며칠 전 기사가 아니다. 김인규 사장이 임기 종료를 눈앞에 둔 지난 2012년 10월 KBS 사장 선임 당시의 상황이다.

이명박 특보 출신 김인규 사장은 MBC 김재철 사장과 함께 낙하산 사장 한 명이 방송 전체를 얼마나 많이 변질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였다. 특보 출신 사장 아래서 KBS는 4대강 사업, 측근 비리 등 정권의 아픈 부분을 찌르기는커녕 눈 감기에 바빴고 오히려 정권 홍보 방송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 '김비서'라는 조롱을 샀다.

덕분에 ‘낙하산 사장은 더 이상 안 된다’는 각계의 목소리가 높았다. 언론·시민사회·학계에서는 정치권의 입김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방법으로 KBS 사장을 선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특별다수제였다.

특별다수제란 재적이사 2/3 이상 동의를 얻어야만 사장 후보를 임명 제청할 수 있게 하는 제도로, 현행 여야 7:4 이사회 구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고안됐다. 영국 BBC, 일본 NHK, 독일 ZDF 등 세계 유수 공영방송에서는 특별다수제와 같은 가중 의결 방식을 도입해 시행 중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 중 하나였던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논의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회 방송공정성특위에서도 특별다수제는 핵심 사안으로 다뤄졌다. 여당의 반대가 심해 결국 최종 보고서에 포함되지는 못했으나, 방송공정성특위 자문위원들은 여야를 불문하고 특별다수제의 필요성에 공감했다는 점은 의의가 있다.

참여정부 시절 정연주 사장을 선임할 때, 이명박 정부 시절 김인규 사장을 선임할 때 시행했던 사장추천위원회 역시 ‘정치적으로 보다 독립된’ KBS 사장을 뽑는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KBS이사회가 사장을 공모해 3배수로 압축하고 최종 1인을 가리는 일방적이고 불투명한 방식에서 탈피해, 외부 인사의 참여를 확대함으로써 부적격 후보자를 철저히 걸러내자는 취지다.

특별다수제와 사장추천위원회를 지지하는 목소리는 KBS 안이나 밖이나 같다. 길환영 사장 해임 전후로 열린 수차례의 토론회에서 학계와 시민사회는 ‘제2의 길환영을 막기 위해 이번 사장 선임만은 기존과 달라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이 같은 움직임은 KBS 내부도 마찬가지다. KBS노동조합(위원장 백용규, 이하 KBS노조)과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본부장 권오훈, 이하 새 노조), KBS 16개 직능단체는 특별다수제와 외부 참여형 사추위를 실시할 것을 KBS이사회에 촉구하고 있다. 새 노조가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한 사내 설문조사에서도 특별다수제 도입과 외부 참여형 사추위 구성 찬성률이 각각 89.2%, 85.7%에 달했다. (▷ 관련기사 :<KBS 신임 사장, 뭐니뭐니해도 ‘정치적 독립성’이 중요>)

여당이사들, 불법이라며 특별다수제·사추위 또 다시 ‘거부’

KBS이사회는 길환영 사장이 해임된 10일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사장 선임 방식에 대해 논의했지만 별다른 소득 없이 ‘이견’만 확인했다. 특별다수제와 사장추천위원회에 반기를 드는 건 여당 추천 이사들이다. 이들은 “이사회는 재적이사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는 방송법 제46조 7항을 들어 ‘불법성이 있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고 있다. 2년 전과 꼭 같은 모양새다.

사실 2012년에 벌어졌던 논란이라 여당이사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답 또한 나와 있다. 당시 야당이사들은 불법성을 우려하는 여당이사들에게 “해당 조항은 이사회의 일반적인 의사결정 정족수를 의미하는 것”이라며 “KBS 사장 선임과 같이 중차대한 사항에 대해 이사회 논의를 통해 특별다수제 도입을 검토할 수 있다”고 맞받았다.

이어, “특별다수제는 다수 이사들 입장에서도 낙하산 사장 단독 제청이라는 반민주적인 결정을 회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라며 “KBS가 진정한 정치적 독립성을 갖는 대표 공영방송으로 거듭날 수 있는 새로운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월호 보도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 폭발로 시작된 KBS 사태는 청와대 뜻에 따라 보도에 사사건건 개입한 길환영 사장의 해임으로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됐다. 류현순 방송 담당 부사장 대행체제로 유지되는 현재의 KBS는, 거짓말 같게도 길환영 사장이 있던 시절보다 훨씬 더 멀쩡한 방송을 하고 있다.

소심한 흠집 내기에 그쳤던 고위공직 후보자 보도에서 강력한 훅으로 자질 논란에 휩싸인 총리 후보자를 날려 보냈고, ‘재벌가 회장님들의 미국 땅’을 추적하는가 하면, 밀양 송전탑 갈등이나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소식 등 그동안 모른 척 해왔던 약자들의 목소리를 전하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KBS 내부에서 ‘그냥 사장이 없는 게 낫다’는 말이 흘러나올 정도다.

특별다수제도 사장추천위원회도 모두 받지 않은 여당이사들은 KBS 내부 구성원들로부터 ‘편파방송 종결자’라는 평가를 받은 길환영 당시 부사장을 꿋꿋이 사장으로 뽑았다. 그러다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은 자기 손으로 뽑은 사장을 해임시켰다. KBS이사회가 ‘문제의’ 길환영 사장을 자기 손으로 뽑은 원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 KBS이사회 (사진=KBS)

무엇보다 KBS이사회는 사장 선임 제도의 위법성을 따지기 전에 본인들의 직분이 뭔지 되새겼으면 한다. 방송법 제46조 1항은 KBS이사회의 기능과 역할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공사(KBS)는 공사의 독립성과 공공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공사 경영에 관한 최고의결기관으로 이사회를 둔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권의 영향력에서 보다 자유로운 사장을 뽑자고 요구하는데, KBS의 독립성과 공공성 보장을 위해 마련된 KBS이사회는 이 제안을 거부하며 오히려 ‘자기부정’에 앞장서고 있다. 길환영 사장 해임 제청안 통과 당시 보였던 ‘소신’이 사실은 욕먹기 싫어 택한 잠깐의 ‘객기’였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KBS를 공영방송으로서 더 충실한 역할을 하게끔 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 밥에 그 나물일 차기 사장 후보자들을 상대로 정부여당 추천 이사로서 위엄을 과시하는 ‘재미’는 한 번으로 부족한 것일까. 직종과 보직을 불문하고 ‘청와대 꼭두각시는 안 된다’는 외침이 터져 나온 KBS 사태에서 아무 교훈도 얻지 못했던 것일까. KBS 정상화를 염원하는 목소리를 무시한 채 어떤 변화의 ‘의지’도 노출하지 않는 이사회를 보니 KBS의 앞날이 걱정된다. 이대로 가다간 제2의 길환영이 아니라 그보다 더 지독한 제1의 누군가가 나타나는 것은 시간 문제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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