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만에 사퇴를 발표한 문창극 총리후보에 대한 보수언론의 시선에는 온도차가 있다. 그러나 두 가지만큼은 공통되게 지적하고 있다. 문창극 총리후보를 둘러싼 논란이 KBS의 ‘왜곡보도’를 통해 생겨났고, 그가 청문회 전 사퇴하게 된 것은 ‘절차훼손’이라는 시선이다. 향후 보수언론이 야권이나 KBS 방송에 공세를 퍼붓는다면, 역시 이 두 가지를 논점으로 삼을 것이다. 보수언론의 두 가지 지적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문창극 역사관 논란, KBS 왜곡보도의 문제인가
“우선 진실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후보자의 역사관을 정확히 알려면 교회 강연 전체를 보고 당사자의 해명을 듣는 게 필수적이다. 그런데 정치권·언론·시민단체·종교계의 상당수가 이런 노력을 외면했다. KBS 보도를 비롯해 ‘사실의 왜곡’이 만연한데 편의적 또는 의도적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한국 사회는 이미 2008년 광우병 사태 때 잘못된 보도에 의존하는 집단적 반(反)지성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체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이를 반복했다. 진실의 기둥을 잡고 반듯하게 서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다.”
<중앙일보> 사설, <원칙을 지켜내지 못한 한국 사회>
“KBS의 보도를 계기로 문 후보자는 '친일(親日) 반(反)민족'으로 몰렸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서 누가 무슨 득을 보겠다고 친일·반민족의 편에 서겠는가. 문 후보가 강연에서 부정적이고 수치스러운 역사를 언급한 것은 그것을 딛고 긍정적이고 자랑스러운 역사로 이어졌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언론사엔 줄이고 압축해 보도할 수 있는 편집권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비틀고 왜곡하는 것까지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또 정파가 다르고 종교가 다르다고 마치 적(敵)을 공격하듯 함부로 매도하고 낙인(烙印)찍은 다음에 제 귀는 닫아버리는 풍토를 그대로 두고는 국가 개조는 공염불일 뿐이다.”
<조선일보> 사설, <문창극 파동이 남긴 것>
▲ 25일자 중앙일보 2면 기사
KBS의 보도를 왜곡보도로 몰아붙이는 보수언론과 문창극의 태도에는 기이한 점이 있다. KBS 보도가 왜곡이라면 문창극의 역사관의 요지를 잘못 전달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중앙일보>든 <보수언론>이든 그 요지를 전달하지 않는다.
<중앙일보>는 “후보자의 역사관을 정확히 알려면 교회 강연 전체를 보고 당사자의 해명을 듣는 게 필수적이다”라고 설명했다. <중앙일보>는 문창극 후보를 방어하기 위해 강연회 동영상과 전문을 회사 홈페이지에 공개한 바 있다. 그런데도 언론사가 되어 그의 입장을 방어하는 사설을 쓰면서 그의 역사관이 무엇인지 요약도 못하는가.
<조선일보>는 “문 후보가 강연에서 부정적이고 수치스러운 역사를 언급한 것은 그것을 딛고 긍정적이고 자랑스러운 역사로 이어졌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설명한다. 이것을 과연 요약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문창극 후보 역시 자신의 역사관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을 끌어들이며 ‘김대중은 종교적 신념 고백해도 되는데 왜 난 안 돼’라며 말할 뿐이다. 과연 문창극 후보의 강연이 단지 기독교 신앙의 고백일 뿐이었단 말인가.
KBS 보도 역시 문창극 총리후보의 역사관의 핵심을 요약하지 못하고,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을 제시했다고 비판할 수는 있겠다. 새정치민주연합 역시 그의 역사관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그저 ‘친일파’라고 매도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나오는 이유는 문창극 후보의 발언이 대중의 상식과 심히 괴리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엔 당연히 그 발언의 취지를 맥락적으로 설명해줘야 하는데, 문창극 후보는 물론 보수언론도 그런 노력은 보여주지 않은채 그저 ‘왜곡보도’를 탓하고 있다.
그간 <미디어스>는 문창극 후보의 역사관의 핵심을 매번 정리해주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다소 길지만 몇 구절을 감상해보자.
“(...) 문창극 총리후보의 강연에 담긴 한국 근현대사 인식은 뉴라이트 역사관의 기독교 광신도적 변종이다. 뉴라이트의 역사관엔 뚜렷한 흐름이 있다. (...) 뉴라이트가 보기에 개항 이후 150여년 동안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적인 대립은 대륙문명과 해양문명의 대립이다. 한반도에서 펼쳐진, 결국엔 공산화된 중국 및 러시아의 대륙문명과 근대를 전파해온 미국 및 일본의 해양문명 사이의 싸움이었다. (...) 여기에 기독교인의 시선을 대입하면, 기독교인은 신을 믿지 않는 공산주의자들에 맞서 해양문명과 근대의 빛을 한반도에 전래해온 전도사들이다. (...) 문창극은 한국 기독교가 해양문명이 전파하는 근대의 빛을 들여와 역사를 일신했다고 보는 것이다. 조선인에 대한 비하와 DNA 운운의 맥락이 이것이라 볼 수 있다.

뉴라이트의 저술과 주장을 보면 그들은 이 대륙문명과 해양문명 싸움이 이 나라를 ‘북한’으로 만들 것인지 혹은 ‘남한’으로 만들 것인지에 대한 운명이 달린 모종의 내기였다고 보는 듯하다. 뉴라이트의 저술을 보면 그들이 이 내기의 선택지로 그저 오늘날 남북한의 모습, ‘제 인민을 굶기는 전근대적 왕조국가’와 ‘문화상품까지 수출하게 된 선진공업국가’를 내놓고 우리를 윽박지르고 있으며, 그 사이의 다른 가능성들은 무시한단 느낌을 받는다.

(...) 그들은 ‘대한민국이 가지 않은 길’엔 지금보다 나은 번영이나 행복이 존재할 수 없었으며, 가능한 건 ‘남한’이 아니면 ‘북한’이었을 뿐이라고 한다. 남북분단과 6.25 전쟁을 공산화가 되지 않았고 미군을 끌어들였다는 맥락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문창극 후보의 역사인식 역시 명확하게 이 흐름에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견해에 동의해야 하는가? 또한 이러한 견해는 대한민국의 총리가 되기에 합당한 것인가? (...)“ (링크)
“(...) 오히려 전체 강연 문맥을 보면 그렇지 않다. 왜 그는 그 시련들이 필요했다고 말하는 것일까. 안 그랬다면 나라가 공산화되었을 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배와 6.25 전쟁은 문창극의 인식에선 필요악이다. 왜냐하면 일제 식민지배가 오지 않았다는 가정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했을 경우에만 가능할 텐데, 그랬다면 조선반도는 공산화가 되기 십상이었을 것이기란 게 그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또 해방 이후 분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통일 한국의 대중들은 사회주의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란 게 그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맥까지 고려한다면, 그의 강연은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적인 역사인식이 훨씬 더 큰 문제다.
소위 뉴라이트 인사들의 인식의 기저에는 대개 이런 시선이 깔려 있다. 문창극 후보자의 강연 기조도 그렇다. 그의 논리의 흐름에 따르면 조선 사람들은 게으르며, 그렇기에 사회주의를 선택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우린 지금 북한처럼 살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일제 식민지배와 분단이라는 시련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련’이 어찌 ‘불행’일까. ‘불행’은 못난 민족성 탓이고 이를 극복하게 해준 것이 ‘시련’이니 그 ‘시련’은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링크)

“(...) 문창극은 자신이 ‘친일파’가 아니라 ‘애국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거짓말도 아니다. 그는 일본이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에 기여하고 쪼그라드는 지정학적 운명을 예찬하였을 뿐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으려 하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에 반대한 것 역시 한국이 ‘크고 강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문창극과 김진은 ‘친일’과 ‘반일’이란 관점에서 평가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역사에 자신들의 목적을 부여한 후 수단을 정당화하는 비윤리성과 약육강식 논리의 철저한 체화의 측면에서 평가받아야 한다. ‘문창극의 친일’과 ‘김진의 반일’ 뒤편의 논리가 매우 흡사하며, 그것이 한국의 주류 인사들의 역사에 대한 감수성을 보여준다는 사실이 드러나야 한다. (...)“ (링크)
소위 민주개혁세력의 지지자들에게 위와 같은 ‘뉴라이트 역사관’ 혹은 그 변종들은 흔히 그 자체로 ‘매국노’의 것으로 취급된다. 보수언론들은 그러한 취급이 부당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그들은 이 역사관의 요체를 떳떳하게 드러내고 지지하지 못하는가? 보수언론은 뉴라이트 역사관이 대중의 몰매를 맞을 때는 침묵해왔다. 2004년 이영훈 교수가 여론의 몰매를 맞을 때나 2014년 박유하 교수가 그렇게 될 때에 그들이 한 일이 무엇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대중의 분노를 피해가기 위해 쉬쉬 했을 뿐이다. 뉴라이트의 역사관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것은 평균적인 한국 우파의 역사관에 비교할 때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뉴라이트 운동이 시작된지 10년이 된 이 시점에서도 그들은 한 번도 설명한 일이 없다. 그런 주제에 자신들이 무슨 언론이랍시고 KBS에 훈수를 두는가.
그러고서도 그들이 ‘종북’을 욕할 자격이 있는가. KBS의 보도가 왜곡보도란 볼멘소리는 도대체 국정원이 만든 녹취록이 왜곡이라는 ‘이석기 일당’의 반론보다 가치가 있을까. ‘이석기 일당’이야 폭력적인 국가보안법 때문에 진심을 털어놓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면, 'KBS 왜곡보도‘ 운운하는 그들의 얘기는 한국 사회의 극우파들이 ’주사파만도 못한 밥버러지‘임을 증명할 뿐이다.
청문회로 가지 않은 것이 법치주의의 훼손이라는 어리둥절한 시선
“문창극과 안대희는 경우가 다르다. 안 후보자의 전관예우·고액 수임료는 역사관 같은 의식이 아니라 축재 같은 도덕성과 관련된 문제였다. 그런 도덕적 하자가 총리 자격에 심각한 장애가 된다는 데 사회적으로 별 이론이 없었다. 이는 후보자 자신도 결국 시인했다. 문 후보는 다르다. 역사관 논란은 말 그대로 논란이다. 이런 경우엔 법이 정한 ‘논란 처리방식’에 맡겨야 한다. 그것은 바로 청문회와 국회 표결인 것이다. 이런 것들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내용 못지않게 절차도 중요한 것이어서 이게 지켜지지 않으면 사회가 흔들린다. 당장 앞으로 또 다른 논란들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논란이 두려워 사람들이 소신을 펴거나 공직을 맡는 걸 두려워하면 국가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나.”
<중앙일보> 사설, <원칙을 지켜내지 못한 한국 사회>

“고위 공직 후보자가 그 자리에 걸맞은 인성과 자질, 업무능력을 갖췄는지를 검증하는 제도가 국회의 인사청문회다. 국회가 대통령의 인사권을 견제하는 동시에, 국회 밖에서 일부 언론이 부정확한 정보에 근거해 무차별한 의혹을 제기하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2000년 도입됐다. 그런 의미에서 후보자의 재산이나 병역 문제가 아닌 역사의식에서 불거진 이번 ‘문창극 파문’이야말로 인사청문회에 올려놓고 본격적인 검증과 토론을 해볼 만했다.

그러나 정치권은 문 후보자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자 인사청문회에서 검증받을 기회를 차단하려고 들었다.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공동대표는 ‘임명동의안 제출은 국민의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더이상 국민과 소통하지 않겠다는 뜻이 될 수 있다’며 지명 철회나 자진 사퇴를 압박했다. 여당 일각에서도 동조해 절차적 민주주의를 흔들었다.“
<동아일보> 사설, <세 번째 총리 낙마, 朴 대통령은 국민 앞에 죄송하지 않은가>
▲ 25일자 중앙일보 1면 기사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의 사설부터가 문창극 총리후보가 청문회까지 가지 않은 것이 ‘법치주의’나 ‘절차적 민주주의’의 훼손이라는 논리가 성립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논리가 성립하려면 총리후보는 지명된 후에 반드시 청문회장에 서야 하며, 논란에 따른 자신의 사퇴나 대통령의 지명철회는 ‘민주주의의 적’이어야 한다.
이것이 말이 될까. 말이 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그런 행위가 ‘민주주의의 적’이라면, 이번에 민주주의를 훼손한 것은 임명동의안을 국회로 보내지 않은 대통령과 청문회장에 가기 전 자진사퇴한 총리후보여야 한다. 보수언론은 이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비판을 하지 않은 채 여론재판과 야당을 탓한다.
그렇다면 총리후보는 청문회장에 서면 되기 때문에 그 전에는 검증을 해서는 안 된단 말일까. 청문회장에 서지도 못할 후보라는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단 말일까. 하나같이 어리둥절해지는 말이다.
이에 대해 숙명여대 법대의 홍성수 교수는 <미디어스>와의 통화에서 “입법사안을 두고 논란이 발생하면 국회에서 입법절차를 밟으라는 것이 국회법의 절차지만, 그 전에 국회로 가져갈지 말지를 두고 시민들이 토론을 하고 의원들이 거기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홍성수 교수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인사청문회 요청서를 제출하면 청문회는 열릴 수밖에 없고, 국회에서 과반수가 동의하면 어쨌든 총리가 된다. 국민들이 그걸 부정할 수 없는 이상 여전히 힘은 대통령과 국회에 있는 것이다. 시민들이야 비판하고 여론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청문회 여는 게 법이다’라는 중앙일보의 주장보다는 몇몇 보수인사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대통령은 여론에 굴복하지 말고 인사청문회해라’가 차라리 합리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문창극 총리후보의 낙마가 ‘왜곡보도’와 ‘절차훼손’에서 나왔다는 보수언론의 시선은 그들의 책임방기와 아전인수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이 이러한 논리로 공영방송과 야권을 비판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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