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남자’ 문창극 총리후보의 구원투수가 나섰다. 바로 문창극 총리후보 본인이다. 그는 19일 퇴근길에서 기자들을 향해 "안중근 의사와 안창호 선생을 가슴 시리게 존경하는 내가 왜 친일이냐"며 항변했다. 그는 과거 자신이 쓴 안중근 의사 관련 칼럼과 강의 자료, 안중근기념관에 헌화한 사진 등을 들어보이면서 20분간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1인극’을 했다. <경향신문>은 이를 보도하면서 “자신을 밀어내는 청와대·여야·국민을 향해 ‘1인 시위’에 들어간 모습”이라 묘사했다.

문창극 총리후보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지 않고 퇴장했다. 하지만 “오늘은 이걸로 끝내고 제가 내일 또 여러분을 뵙겠습니다”라고 말한 만큼 저녁마다 이러한 ‘1인 시위’를 벌일 것으로 보인다.
문창극, 나름의 ‘애국자’는 맞다. 하지만...
문창극 총리후보가 스스로 안중근 의사와 안창호 선생을 존경하는 ‘애국자’라 주장한다면 믿어줄 수는 있다. <미디어스>는 이전 기사에서 이렇게 평했다.
“문창극은 자신이 ‘친일파’가 아니라 ‘애국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거짓말도 아니다. 그는 일본이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에 기여하고 쪼그라드는 지정학적 운명을 예찬하였을 뿐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으려 하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에 반대한 것 역시 한국이 ‘크고 강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문창극과 김진은 ‘친일’과 ‘반일’이란 관점에서 평가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역사에 자신들의 목적을 부여한 후 수단을 정당화하는 비윤리성과 약육강식 논리의 철저한 체화의 측면에서 평가받아야 한다. ‘문창극의 친일’과 ‘김진의 반일’ 뒤편의 논리가 매우 흡사하며, 그것이 한국의 주류 인사들의 역사에 대한 감수성을 보여준다는 사실이 드러나야 한다.“ - <묘하게 닮아있는 ‘친일’ 문창극과 '반일' 김진>(클릭)
하지만 그렇더라도 ‘애국의 방식’은 문제다. 문창극 후보는 설령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을 생각이 없었을 지라도 조선왕조가 단지 근대화할 역량이 없는 정도를 넘어 ‘게으른 자들의 500년 허송세월’이라 생각한다는 점에서 식민사관에 찌든 이가 맞다. 비록 상당수의 중년 남성들이 여전히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하더라도, 이를 건전한 역사관이라 볼 수는 없다.
또한 문창극 후보는 강연 전체의 문맥상 나라의 공산화를 피하기 위해선 일제 식민지배나 남북분단, 6.25전쟁 등을 모두 용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극단적 반공주의 신앙을 가진 ‘애국자’가 분명해 보인다.
▲ 세월호 참사 후 첫 민방위 훈련이 시행된 20일 오후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에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대피훈련을 마친 뒤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만약 강단 있는 문창극 후보가 청문회까지 가게 된다면, 야권이 검증해야 할 부분도 그런 것이다. “친일파임이 분명한데 이제와 안중근을 존경한다고 발뺌한다”는 설훈 의원의 발언이나 “다카키 마사오의 딸이라 친일파를 임명했다”는 서영교 의원의 발언은 문제의 핵심을 짚지 못하고 있다. “식민지배가 ‘하나님의 뜻’이면 독립운동은 뭐냐”라고 묻는 기독교계나 역사학자들의 시선 역시 마찬가지다. 아마도 문창극의 본심은 공산주의 국가가 아닌 나라로 독립하기 위해 식민지배도 독립운동도 필요했다는 것에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문창극의 발언을 진의 그대로 요약하고 비판해야 ‘언론에 의한 왜곡’이란 논란을 피할 수 있다.
물론 ‘KBS 왜곡 보도’ 운운하는 보수파들도 성찰이 필요하다. 문창극 보도가 강연의 취지와 상관없는 왜곡이라면, 천주교 정의사제구현단 박창신 신부의 시국 미사 강론 보도는 무엇이었을까. 양심이 있다면 상대방을 ‘종북’으로 몰기 위한 그 숱한 왜곡선동 사례들을 생각해 볼 일이다. 문창극 강연은 KBS 보도보다도 전문이나 전체 동영상을 볼 때에 더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일본인과 북한인의 민주주의’의 사회에서
<미디어스>는 예전에 다음과 같이 비평한 바 있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증오는 아직까지는 ‘상대방이 권력을 잡는 것까지도 용인한다’는 민주주의의 감수성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야권을 지지하는 개혁시민에게 새누리당 사람들이란 친일파의 후손으로 미국 국적을 통해 병역의무를 회피하는 일종의 ‘일본계 미국인’들로 이해된다. 새누리당 지지자들에게 민주통합당이나 기타 진보 세력은 북한 정권의 지령을 받아 남한의 공산화를 기도하는 ‘북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양측 모두 상대방을 함께 공화국을 만드는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전자의 판타지가 일종의 ‘경멸’을 수반한다면, 후자의 판타지는 한국 현대사의 끔찍한 기억과 결부되어 거의 상대방의 ‘절멸’을 기도하는 증오의 심성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 <‘문재인 물병 투척’, ‘박근혜 헌화 반대’와 같다?>(클릭)
이를 축약하면 한국 사회는 양 정치적 당파의 환상을 결합할 때 ‘일본인과 북한인의 민주주의’의 사회가 될 것이다. 한쪽은 보수정부가 독도를 일본에 팔아치울 거라고 상상하고, 다른 한쪽은 민주정부가 NLL에 설치하는 평화수역을 나라를 북한에 넘기려는 시도라고 규정한다.
‘왜곡’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겠으나 문창극 후보의 문제가 많은 강연이 “일제 식민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란 말로 요약되고 그가 ‘친일파’라는 비판을 극심하게 받는 상황도 그러한 환상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굳건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유독 문창극 총리후보 지명 이후 썰물처럼 쓸려 나가는 상황도 한국 사회의 시민들의 ‘버튼’이 ‘친일’과 ‘종북’에 있으며 양 당파가 각자 한쪽을 충실하게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보수세력은 성찰해 보아야 한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의 사과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 일본이 독도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친일파’라 비난하지 말고 논의가능한 견해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NLL의 법적 지위에 대한 다른 생각, 북한인권법에 대한 우려 등을 ‘종북파’라 비난하지 않을 준비는 되어 있을까.
이석기 내란음모예비죄 공판처럼 아예 전시 행동계획이 누설된 경우라면 다른 문제가 되겠지만, 적어도 특정한 견해에 대한 비판과 상대방의 세계관에 대한 재단을 구별해야 한다는 상식에는 합의가 이루어져야 정치토론이 가능할 것이다. 야권 역시 상대방의 견해를 ‘친일’이라 손쉽게 정의 내리고픈 욕망을 벗어던지고 문창극 총리후보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지적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문창극 후보가 안중근 찬양 칼럼을 내밀며 “내가 어찌 ‘친일’이란 말이냐?”라고 말할 때 말릴 우려조차 있다.
총리의 재목이 아니란 게 문제의 핵심이다
결국 총리 지명의 문제로 돌아왔을 때 문제의 핵심은 문창극 총리후보가 친일파란 것이 아니라 총리의 재목이 아니라는 것이다. 언론사 경험 밖에 없는 문창극 후보는 정무형 인사라 볼 수도 없고, 그가 쓴 글의 성격으로 미루어볼 때 화합형 인사라 볼 수도 없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 대개조’ 역할에 기여할 전문성이나 식견도 없다. 극우들의 입장에선 그의 투철한 반공의식이 ‘국가 대개조’에 어울린다 우길 수도 있겠지만 세월호 참사는 그들이 영원히 배격하고자 하는 ‘빨갱이’들 때문에 일어난 일도 아니다.
▲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이 지난 2013년 5월 3일 오후 춘추관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일정과 의미 등에 대해 공식 브리핑한뒤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청와대 역시 지금쯤은 문창극 총리후보에 대해 곤혹스러워 하고 있을 것이다. 윤창중과 문창극의 사례를 보건대, 대통령과 그 주변인사들은 그들의 구미에 꼭 맞는 글을 써온 이들에 대한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종류의 극단적이고 편향적인 세계관들이 ‘소신’의 반영일 거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은 그러한 ‘광신’과 ‘비논리’를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주장하는 이들은 강렬한 권력지향성과 과도한 자아도취를 가지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박근혜 대통령이 중시할 충성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작금의 '문창극 일인시위'가 그것을 웅변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사건의 성격은 다르지만 윤창중이 쳤던 ‘사고’와 문창극이 치고 있는 ‘사고’의 원인이 그 독특한 캐릭터에 있다고 봐야 한다. 청와대도 이참에 ‘광신’과 ‘비논리’에 대한 현혹에서부터 빠져나와 세상을 냉정하게 바라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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