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서 제110차 노동포럼으로 기획한 “6.4 지방선거 결과와 진보개혁세력의 과제” 토론회는 야권이 지방선거 결과를 해석하고 대처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현실을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일단 발표자와 토론자의 조합이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어내기 어려웠다. 발표를 맡은 박동천 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중도적인 성향이었는데, 토론자 네 명은 진보정당 지지성향이 강했다. 그렇다고 좋은 토론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양측 모두 차이를 감안하고 얘기하기 보다는 본인이 생각하는 ‘진보’의 개념을 고수하는데 급급하는 모습이었다.
사회적 자유주의,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이미 박동천 교수의 발표에서부터 ‘생각의 거리’가 드러났다. 진보의 본래적 의미는 “보다 나은 (공정, 정의, 삶의 질, 평화 등의 기초 위에서 성장) 사회를 꿈꾸는 지향성”이지만 오염된 의미는 “특정 인맥, 조직, 진영, 이데올로기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는 진단은 원론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FTA 반대 움직임을 비판하며 “한미 FTA 이외의 FTA엔 제대로 반대하는 것도 본 적이 없다. 광우병 파동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라고 지적한 것은 야권 진영 내에서도 보수적인 시선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 시선에선 당장 2012년 민주통합당 대선공약부터가 지나친 좌클릭의 소산일 듯 했다.
또 ‘사회적 자유주의’ 노선을 표방하면서 이를 “헌정주의에 덧붙여 사회적 약자들이 스스로 연대해서 강자의 전횡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도록 국가공동체가 지원하고 나머지는 시장의 원리에 맡긴다”라고 정리한 것은 이해하더라도, “현실의 역사에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는 결국 이와 같은 방향으로 수렴되었다”는 진단은 사민주의 좌파는 물론 사민주의 우파들도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는 평가였다.
박동천 교수는 사회적 자유주의 노선의 몇 가지 세목으로서 사법개혁, 의회개혁, 병무개혁, 교육개혁, 지방자치의 심화 등을 제시했으나 이 분야의 개혁들이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는 설명하지 못해 단순한 나열이라는 인상이었다. 연방주의적, 절차주의적 사고로 전환하여 헌정주의를 확립해야 한다는 진단에는 동감할 수도 있었으나 현재의 정국에서 그러한 정책의 실현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 각 정책목표의 실행과정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부족했다.
▲ 18일 오후 4시에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주최한 기획토론회 "6.4 지방선거 결과와 진보개혁세력의 과제" 토론회가 열렸다 ⓒ미디어스
지금 ‘진보’ 개념의 사수가 중요한가
그러나 박동천 교수의 발제에 대한 진보인사들의 토론에서도 아쉬움이 남았다. 토론자들은 준비해온 토론문에 비해서도 박동천 교수가 제시한 진보의 개념에 의문을 표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박승흡 매일노동뉴스 회장, 이병렬 노동·정치·연대 집행위원장, 이호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상임연구위원 등은 모두 박동천 교수가 지방선거 결과를 분석하면서 새정치민주연합을 ‘진보’로 분류한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박승흡 매일노동뉴스 회장은 “현 시기 좌우대결 구도는 기득권의 안정적 재생산과, 종북 좌파 딱비 붙이기 이념 공세를 반영한 시대착오적 진영논리로 작동한다”고 비판했다. 이병렬 노동·정치·연대 집행위원장도 집권당과 제1야당을 “보수 양당”으로 부르는 진보정당 진영의 용법을 고수하면서 “(새정치민주연합이 진보면) 호남인들은 90% 이상이 진보주의자란 말이냐”라고 되묻기도 했다. 이호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상임연구위원 역시 “정치적으로 반새누리당 진영이라고 해서 이를 진보세력이라 규정할 수 있느냐 하는 것에는 회의가 크다”고 지적했다.
이들의 지적은 유효한 부분이 있지만 이것이 “6.4 지방선거 결과와 진보개혁세력의 과제”에 관해 토론하는데 핵심적인 부분인가에 대해선 아쉬움이 남았다. 박동천 교수는 지방선거 결과를 분석하면서 현 새정치민주연합과 구 민주당을 진보로 분류한 것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결과 분석에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렇게 했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또한 진보정당에 대해 설명할 때엔 “진보” 정당이라 표기하여 진보란 말의 복수의 용법을 표시하기도 했다.
물론 박동천 교수가 “진보” 정당의 노선이 앞서 자신이 얘기한 ‘진보의 오염된 의미’를 보여준다고 생각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항의한다 해도 차라리 박동천 교수와 진보정당 운동 참여자 간에 존재하는 이념 및 정책성향의 차이를 보여주는 쪽이 더 생산적이었을 것이다.
또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보수 쪽에서도 민주당 세력을 ‘진보’라 칭하고 민주당 세력 역시 이를 수용하는 조류가 나온 것엔 엄연한 맥락이 있는데, 이 맥락을 통째로 무시하고 여전히 ‘보수 양당’이란 표현을 고수하는 것만이 진보주의를 지키는 길이란 판단에도 동의하기 어려웠다.
▲ 진보정당이 참패한 6.4 지방선거 결과 전국에서 유일하게 선출직 광역의원으로 당선된 노동당 여영국(49·창원시 5선거구) 경남도의원. (연합뉴스)
진보정당 운동의 경우 그간 현장의 운동단체나 대중조직과의 연결의 문제에서 자신들과 민주당 세력을 구분한 경우가 많았는데, 진보정당에서 역시 그 연결이 약화되거나 아예 연결할 운동단체나 대중조직의 역량에 훼손되는 세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훨씬 더 중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토론자들의 경우 그런 문제에 대한 성찰을 시도하기는 했으나, 선거제도 개혁을 발본적 의제로 제시하거나(박승흡), “최악의 상황에서도 10%의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를 확인했다”고 말한다거나(이병렬), 정치 제도 개선과 진보개혁 정치세력의 체질 개선, 그리고 시민 참여를 위한 노력을 강조한 것(이호) 등은 너무 원론적이거나 자족적인 평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진보진영, 제도개혁 논의에 매몰되지 말고 ‘결사하라’
그런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빛이 났던 것이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의 토론문이었다. 서복경 위원은 진보진영이 제도개혁 논의에 매몰되지 말고 기존 결사조직을 확대하며 새로운 결사조직을 생성하는데 주력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서 위원은 “진보진영은 지금이 밭을 갈아야 할 때다. 결사하고, 결사하고, 또 결사해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서복경 위원은 “향후 2년간을 예상해보면 모든 정치세력의 지도부가 무주공산이고 리더십 교체기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이런 상황에선 일종의 ‘장’이 선다. 개헌문제를 포함하여 의회, 정당, 선거, 사법, 지방자치 등에 대한 모든 제도개혁 논의가 나오게 된다”라고 전망했다.
이어서 서 위원은 “돌이켜보면 1993년에서 1994년까지의 시기가 그랬고 2004년이 그랬다. 전자의 시기에 선거법이 개정되는데 재야가 개입했고 2004년 ‘오세훈 선거법’으로 개정될 때에도 참여연대 등이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양쪽 모두 안 건드리느니 못한 개정안이 나왔다. ‘오세훈 선거법’ 때는 지구당이 폐지되었다”라고 지적했다.
서복경 위원은 “제도개혁에 있어 진보진영은 단지 발언권만 가질 뿐이다. 현실에서 제도대안의 선택은 원내 제1당과 제2당 혹은 그 정당들 내부의 분파간 협력에 달려 있을 뿐이다”라고 설명했다. 서 위원은 “참여정부 시절에도 지지기반을 훼손해 가며 몇 가지 제도개혁안을 쟁취해냈으나 정권이 바뀐 후 ‘말짱 도루묵’이었다”라면서 “지지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추진되는 제도개혁은 원하는 방향의 결과를 낳기도 어렵지만, 이루었다 하더라도 이를 유지할 수도 없다”라고 비판했다.
▲ 개표 결과 당선이 확실시 되고 있는 박원순 새정치민주연합 서울시장 후보가 5일 새벽 서울 종로 5가에 위치한 자신의 캠프 사무실로 와 지지자들로부터 환호를 받으며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 위원은 “이미 드러난 사회경제적 의제들을 선점하고, 이를 중심으로 새로운 결사조직을 생성하고 기존 결사조직들을 확대하며, 이들 속에서 새로운 정치엘리트를 발굴하고 지지기반을 창출하는데 주력해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서 위원은 구체적으로 “비정규직 노조 결성 지원 및 확대, 원전이나 개발반대 주민결사 지원, 민영화 및 권경언 유착 폭로 등 공공영역 노조 결사 활동 지원 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유권자는 이미 계층분화 되어 있다
서복경 위원은 지역, 세대, 주관적 이념 등을 변수로 하여 유권자들의 보수화를 진단하는 데에 반대하면서 유권자들은 이미 계층적으로 분화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서 위원은 “유권자가 보수화되었다는 서베이 결과는 자신을 ‘보수’로 생각하느냐 ‘진보’로 생각하느냐란 질문에 대한 자가 진단이고, 물론 이런 조사에서 자신이 ‘보수’란 응답이 십 년 전에 비해 5~7% 정도 높게 나타난다”라고 설명했다.
서 위원은 “하지만 구체적인 정책태도 등에서 유권자들은 10년 전보다 상당히 왼쪽으로 이동해 있다. 성장보다 복지를, 개발보다 환경을, 경쟁보다 평등교육을, 원전확대보다 축소를,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국가개입을 선호하는 유권자 비율은 늘었다. 오히려 십 년 전에는 사람들이 자신을 ‘진보’라 규정하면서도 이런 문제에 대해선 성장중심적인 정책 태도를 보였다”라고 지적했다.
서복경 위원은 “2010년경 이후부터 저자산층일수록 복지정책 선호가 월등이 높아지고, 비정규직 해법이나 부동산개발 정책에 대한 태도 등에서 일관된 경향을 나타낸다. 2014년 지방선거 유권자 조사 결과에서도 계층적 정치태도는 더욱 강해졌다”라고 전했다. 서 위원은 “계층적 태도를 보면 수도권 기준 자산 4억, 전체 기준 자산 3억 정도가 분기다. 이 위로 가면 새누리 지지가 2/3이고 아래에선 야권 지지가 2/3다. 이것은 아마도 주택 소유 유무에서 나온 태도일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설명했다.
▲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후보가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자신의 선거 캠프에서 방송3사 출구조사 결과 40.9%의 득표율로 문용린 후보의 30.8%에 크게 앞선걸로 보도된 뒤 캠프 관계자와 뜨거운 포옹을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서복경 위원은 “이미 우리 사회의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여러 방향에서 정치에 시그널을 보내는 상황에서, 이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정치세력의 출현이 중요하다”라면서 “세대를 강조하는 것에도 반대하지만, 세대를 볼 때에도 20~40대와 50대 이상의 대립에만 주목할 게 아니라 45세~55세 사이의 사회경제적 약자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문했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의 주문은 이른바 진보개혁 세력이 정당 및 정치세력으로서도 무력하고 지지기반의 형성에도 실패한 총체적 난국 상황에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함을 역설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권자가 자신을 대변해 줄 정치세력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정치세력의 역할은 제도개혁의 유불리에 매몰되기 전에 먼저 그 유권자들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다. 상황이 매우 어렵지만 피해갈 수 없는 역할을 요구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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