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최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세종대 박유하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출판·판매·발행·복제·광고 등을 금지해달라며 서울동부지법에 가처분 신청을 낸 것이 집중보도되었다. 2013년 8월에 나왔고 몇몇 학자들의 비판도 받은 저술이 새삼 법정문제로 간 것이다. 문창극 총리후보 지명 이후 국민들 사이에서 '친일파' 내지는 '친일적 논의'에 대한 관심이 큰 상황에서 박유하 교수는 난타를 당하고 있다. 한양대학교에서 트렌스내셔널인문학을 전공하는 백승덕 씨가 박유하 교수의 저술 방식에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이 사안을 법정 공방의 대상으로 삼지는 말자는 취지의 글을 보내왔기에 이를 소개한다.

작년 가을 애인의 손에 이끌려 영화 <그리고 싶은 것>을 보게 되었다. 어린이책 미술작가 권윤덕 선생이 '위안부' 문제를 그려낸 『꽃할머니』라는 작품을 만들어가면서 맞닥뜨렸던 곤란함과 고민들을 담아낸 영화였다.

영화 속 권윤덕 작가는 '위안부'였던 심달연 할머니가 들려준 기억과 '위안부' 문제를 받아들이는 사회인식의 간극을 메꾸는 일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기며 작업을 해나갔다. 십여 차례 그림을 그리고 또다시 그리고를 반복하지만 출판은 계속해 미뤄지기만 했다. 작가는 '위안부'에게 성폭력을 행사하는 군복 입은 군인의 얼굴을 비워두었다. 또한 군함에 욱일승천기를 넣어 가해자의 성격을 분명히 하자는 편집자의 제안에 완강하게 반대해 끝내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위안부' 문제를 전쟁의 야만성이라는 보다 보편적인 맥락에서 고민해볼 계기를 제공하고자 애썼다. 자신의 그림책 속에 담긴 한 여성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어린이 독자들이 평화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위안부’ 문제를 다 안다는 착각
지금에 와서 부끄러운 기억이 되었지만, 나는 뻔한 영화일 거라고 생각해 그다지 볼 생각이 없었다.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라는 말을 듣고, '위안부' 할머니가 겪은 참혹한 고통으로 시작해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는 결론까지를 이미 다 본 것처럼 느꼈다. 애인이 이 영화를 보고 싶단 말을 몇 번이나 해주지 않았다면 나 혼자서는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리고 싶은 것>이 애써 그려 보이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러한 뻔한 느낌이었다. 조금은 더 안전한 -그래서 일본의 우익에게 공격의 빌미를 덜 줄 수 있는- 책을 출판하려던 출판인이 기대했던 것처럼, 나 역시 '위안부' 문제를 재현하는 일이, 끔찍한 폭력을 겪었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는 한 할머니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과거 청산이 이뤄졌다는 독일과 달리 아직도 망언과 망동을 멈추지 않는 일본 정부의 군국주의 행보를 어떤 식으로든 규탄하는 영화일 거라고도 예상했다.
<그리고 싶은 것>은 그러한 뻔한 기대와 느낌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권윤덕 작가가 그려내 보이고자 했던 심달연 할머니의 '고통'은 현재도 계속하여 재생산되는 것이었다. 식민지에서 해방되었지만 국가폭력, 가부장제, 군사주의 등이 얽히고설켜 이 시대에도 피해자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따라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이 무엇이었는가를 묻는 일은 곧 이 시대의 피해자들이 호소하는 고통에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문제제기는 환영할만하지만…
『제국의 위안부』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반가움을 느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우리가 외면했던 위안부의 목소리를 복원하겠다’는 선언에 적잖이 기대했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소녀들이라는 설명만으로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을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느끼던 차였다.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 박유하 교수는 이러한 '민족주의'적 서술에서 넘어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이겠다고 주장했다. 그는 서문에서 책의 문제의식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우리 안의 '위안부'는 그저 가녀린 '소녀'가 아니면 노구를 이끌고 투쟁하는 '투사'일 뿐이다. 그러나 그건 실은 그녀들 자신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원한 위안부'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 책은 그런 식으로 우리가 폭력적으로 소거시켜온 그녀들의 기억을 다시 만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6쪽) 저자는 '있는 그대로의 위안부'의 모습을 통해 한일 간에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단초를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난 16일 '위안부‘ 피해자 9명은 박유하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또한 책에 대해서는 출판‧판매‧광고 등을 금지해달라며 가처분 신청을 제출했다. 당사자들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단초를 마련하겠다던 저자의 바람과 달리 『제국의 위안부』는 당사자들의 분노를 일으킨 것이다.
이 소송을 대리한 박선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YTN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서 동지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라든가, 일본군의 협력자 라고 한다든가, 매춘의 틀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그러한 내용들, 그리고 일본의 창기의 고통과 다르지 않다"는 서술들과 함께 "책을 읽어보고 객관적인 일반인으로서 느껴지는 맥락과 의도"가 문제라고 느꼈기 때문에 소송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저자가 밝힌 의도와 달리 『제국의 위안부』가 '위안부'들의 고통을 별 것 아닌 것처럼 묘사했다는 것이다. 대체 왜 이토록 아이러니한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국의 위안부』의 문제제기는 환영할만한 것이지만, 그 서술은 문제제기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 박선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왼쪽)가 16일 오전 서울 광진구 동부지방검찰청 민원실 앞에서 '제국의 위안부' 책을 들고 소송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이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소송대리인들은 책을 쓴 박유하 세종대 일어일문학과 교수와 출판사에 대해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장을 접수했다. (연합뉴스)
'제국의 위안부'가 수행하는 ‘민족주의’ 비판의 문제점
박유하는 고통, 화해 그리고 용서에 상당히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이쪽에서 사실에 기초하여 고통을 제시하고 비판을 하면, 상대도 반동으로 튀어나가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는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이 '위안부 20만 명설'과 같은 근거 없는 주장을 하고 있어서 일본의 극우세력을 더욱 반동으로 내몰고 있다고 비판한다. 나는 이러한 문제제기에 그럭저럭 동의하는 편이다. 자료를 뒤져가며 '위안부 20만 명설'과 같은 것을 따져묻는 공개적인 토론은 어느 위안부 할머니가 겪은 고통을 존중하면서 함께 진행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저자는 제국 일본이라는 국가가 직접 식민지 조선인 여성을 강제로 끌고 갔다는 민족주의자들의 위안부 이야기를 비판한다. 그보다는 조선인 브로커까지 매개한 인신매매에 가깝다는 것이다. '강간적 매춘'과 '매춘적 강간' 사이에서 일제는 이를 방조하였던 책임이 있지만, 일본이라는 '국가'에 직접적인 법적책임을 묻기가 곤란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 책의 제목 그대로 '제국의 위안부'라는 성격이 그렇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위안부의 '고통'을 단순히 민족의 시련 정도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전쟁과 성적 위계의 본성까지 고려하여 더욱 심화하여 이해할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저자의 선구적인 문제제기가 빛이 바라게도, 『제국의 위안부』의 서술은 민족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에 과도하게 쏠려있다. 그러다보니 이 책을 읽고 나면 위안부들의 고통을 더욱 넓고 깊게 공감할 계기를 얻기 보다는 역설적으로 '민족주의'라는 개념이 주로 떠오르게 된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협력' 문제에 관한 이분법적 인식을 넘어서고자 천착해온 윤해동 교수 역시 이 책의 불균형한 서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제국의 위안부’라는 개념에는 민족적 심급에서만 접근하는 기존의 태도를 부정하는 의식 혹은 조선인 위안부가 ‘적의 여자’가 아니었다는 지적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역으로 위안부가 수용해야 했던 다중적 억압 가운데서 민족적 심급만을 드러내는 효과를 산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사이間SAI 제16호, 259쪽)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는 마치 민족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를 걷어내기만 하면 위안부들의 고통이 실재 그대로 투명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듯하다. 그러나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비판만으로 위안부들의 고통에 공감할 언어가 즉각 마련될 리는 없다.
저자의 서술이 기존의 ‘민족주의’적 서술을 비판하는 데에만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다보니, 저자가 재현한 ‘위안부’의 성격은 마치 기존의 서술을 뒤집은 것 마냥 보이기도 한다. 일본군에 의한 강제적 동원이라는 인식을 비판하기위해 조선인 브로커의 존재를 강조하거나, ‘위안소’에서의 처우가 무절제한 폭력으로만 점철되어 ‘위안부’들이 인간성을 완전히 박탈당한 것처럼 묘사할 때 부정되는 평화로운(?) 위안소의 일상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서술 등이 그러하다.
저자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기존의 인식을 뒤집으면서 “그녀들을 만든 것이 식민지지배 구조라는 것”(91쪽)을 인식할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와 달리 『제국의 위안부』를 통해 접하는 ‘위안부’ 문제는 온전히 조선인 브로커와 자발적으로 협력을 했던 위안부들의 책임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기존 인식에 대한 저자의 비판이 식민지배의 ‘구조’를 그려내지 못하고 다만 기존 인식의 반대편에 있을 또 다른 ‘주체’를 부각시키고 마는 한계가 역력하다.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와 소송대리인들이 '제국의 위안부'를 쓴 박유하 세종대 일어일문학과 교수와 출판사에 대해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장을 접수하기 위해 16일 오전 서울 광진구 동부지방검찰청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저자의 문제의식을 배반한 서술
이러한 서술의 한계가 바로 저자의 문제제기를 무력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저자가 ‘위안부’들의 고통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비판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나머지 당사자들의 고통을 여지껏 설명해주던 인식틀을 뒤집고는 끝난다.
얽히고설킨 권력을 다면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겠다던 목표와 달리 고통은 그저 불가해한 것이 되어버렸다. 한 쪽에서는 ‘매춘’으로만 설명되고, 다른 쪽에서는 ‘강간’으로만 묘사되었던 ‘위안’이라는 행위의 성격이 사실은 두 가지 성격을 모두 갖는 ‘강간적 매춘’ 혹은 ‘매춘적 강간’이라는 저자의 선구적인 주장 또한 갈 길을 잃고 헤매곤 한다. 한편으로는 전쟁터에 내보낸 남성 병사들의 전쟁수행을 관리하기 위해 ‘성적 위무’를 제공하고자 했던 국가권력의 가부장적‧제국주의적 성격을 비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군인 간의 “사랑과 평화”를 강조하거나 “동지적인 관계”라고 언급하는 등의 서술을 통해 스스로의 권력비판을 무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윤해동은 양자의 관계가 정리되지 않았기에 “이 책의 곳곳에서 역접 혹은 부정의 구조를 가진 문단이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평화’와 ‘비참’, ‘지옥’과 연민‘이 하나의 문단 속에서 엇갈림으로써 독자들은 다소 어리둥절하거나 짜증을 경험할지도 모르지만, 역시 이런 서술의 중첩을 통하여 느끼는 압도적인 감정은 안쓰러움이라 하겠다.”(사이間SAI 제16호, 260쪽) 스스로의 문제제기에 미치지 못하는 서술의 한계가 바로 그러한 안쓰러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 동아시아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 주최로 지난 4월 2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위안부 문제 제3의 목소리' 심포지엄에서 박유하 세종대 교수(왼쪽)와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가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국의 위안부'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제안
그래서 『제국의 위안부』의 한계를 넘어설 고통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민중신학이나 서발턴 연구 등이 바로 그러한 노력을 해왔다. 저자가 『제국의 위안부』의 대부분을 할애하여 지적한 것처럼,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었던 고통에 대한 기존의 ‘민족주의’적 서술은 사실관계와 해석에 있어서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있다. 그러나 『제국의 위안부』 역시 기존의 인식을 비판하는 데에 집중한 나머지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을 이해할 적절한 언어를 제시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했다. 고통을 심화해서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데 지금과 같이 『제국의 위안부』를 법정에 세우게 된다면 오히려 그러한 기회를 잃게 된다. 법이야말로 도덕의 극단에서 옳고 그름을 최대한 단순하게 판가름하기 위한 기제가 아닌가. 이 앙상한 언어에 대고 처벌을 요구하는 순간 우리는 고통을 심화할 수 있을 더 많은 언어를 함께 만들 기회를 놓치게 된다. 설사 『제국의 위안부』의 서술이 고통을 심화하여 이해하도록 이끌지 못하였더라도 법의 처벌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그 책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게 된다.
오늘도 국가폭력, 가부장제, 군사주의 등이 얽히고설켜 고통을 호소하는 피해자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이야기해온 것 같은 ‘위안부’들의 고통이 무엇인지조차 적절하게 묻지 못하고 있다. 다만 비명으로만 떠돌 뿐인 이 시대의 수많은 고통에 사회적으로 연대하기 위해서라도 ‘위안부’ 문제는 이렇게 마무리되어서는 안 된다. 『제국의 위안부』 식으로 말하지 못하게 처벌할 것이 아니라, 『제국의 위안부』의 서술이 드러내지 못한 ‘위안부’들의 고통에 관해 더 많이 말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고통을 만들어내는 권력의 실체를 대면하여 함께 싸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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