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에 오랫동안 칼럼을 썼던 문창극 총리후보는 현재 대중에게 ‘친일파’라 비난받는 중이다. 설령, 그가 인사청문회를 극적으로 통과해 총리가 된다 해도 '친일파 총리'라는 오명은 피해갈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런데 그는 38년이나 주류 매체에서 기자 생활을 해온 인사이다. 그는 그간 자신의 견해를 숨겨왔던 것일까. 물론, 아닐 것이다. 주목해야할 지점은 따로 있다. <중앙일보>에 현재도 칼럼을 쓰는 김진 논설위원은 작년 이맘 때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의 행보를 비판하며 ‘원폭 투하가 신의 징벌’이라고 극렬하게 비판해서 구설수에 오른 바 있다. 극단적 반일 논리였다. 묘하게도 둘은 같은 언론, 같은 편집국에 있었다.그렇다면 문창극의 ‘친일’과 김진의 ‘반일’은 전혀 다른 것일까. 별로 그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김진 논설위원의 문제가 된 글을 다시 떠올려보자.

▲ 2013년 5월 20일자 중앙일보 34면
“신은 인간의 손을 빌려 인간의 악행을 징벌하곤 한다. 가장 가혹한 형벌이 대규모 공습이다. 역사에는 대표적인 불벼락이 두 개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2월 독일 드레스덴이 불에 탔다. 6개월 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이들 폭격은 신의 징벌이자 인간의 복수였다. 드레스덴은 나치에게 학살당한 유대인의 복수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일본 군국주의에 희생된 아시아인의 복수였다. 특히 731부대 생체실험에 동원된 마루타의 복수였다. 똑같은 복수였지만 결과는 다르다. 독일은 정신을 바꿔 새로운 국가로 태어났다. 하지만 일본은 제대로 변하지 않고 있다.“(<중앙일보> 2013년 5월 20일자 34면 <아베, 마루타의 복수를 잊었나>)
여기에도 ‘신’이 등장한다. 다만 이름이 '하나님'이 아닐 뿐이다. 문창극과 김진의 공통점은 역사적 행위나 사건에 특정한 목적을 부여하고 그 목적을 위해선 어떤 수단이든 정당하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원폭투하나 드레스덴 폭격은 나치나 일제의 악행과는 별도로 도덕적 평가를 해야 하는 전쟁범죄일 수 있는데, 김진은 ‘신의 징벌’이란 말로 이를 피해간다.
드레스덴 폭격이나 원폭 투하를 결정한 연합군 수뇌부들이라면 김진과 같은 시각을 좋아할 것이다. 폭격과 투하를 결정한 이들은 ‘신의 의지’와 ‘희생자의 복수’라는 시선에서 수많은 민간인 살상자를 만들어낸 자신들의 과오를 완벽하게 가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이나 귀신은 직접 발언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말을 들었다 주장하며 이를 옮기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성공한 세계종교들은 오래 전 과거에 신의 말을 들은 이들의 발언의 집적에서 불합리하고 폭력적인 것을 배제하고 보편적 도덕률을 교리로 이끌어냈다. 성공한 세계종교들은 요즘에 와서 신의 말씀을 들었다 주장하는 비주류종교들을 ‘사이비’라 규탄한다. 적어도 근대 사회에서 사회문제를 토론하면서 신이나 귀신의 의지를 제멋대로 끌어와 자기 견해를 정당화하는 행위를 용인하는 경우는 없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신과 귀신의 의지를 자의적으로 갖다 붙이면 인간사에서 함께 따져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제각각 다른 의지를 끌여들여 서로의 행동을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희생자들을 마루타의 징벌로 여긴다면 우리는 지나가는 일본인 아무나 죽여 놓고 식민통치에 대한 징벌을 했다고 우길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전근대사회에선 그런 일도 흔했다. 그리고 그런 일이 통용된 시기의 인간 역사에서는 침략이나 학살은 수치이기는커녕 자랑이었고 ‘패전’을 ‘승전’으로 고치는 역사왜곡도 상대방과의 교류가 없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가학’과 ‘피학’의 차이가 있을 뿐, 김진의 논리는 문창극의 논리와 동일하다. 문창극 역시 일제 식민지배와 남북분단, 그리고 6.25전쟁에서 ‘신의 의지’를 읽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성공한 세계종교’인 기독교의 교리를 수천 년 전으로 후퇴시킨다. 구약성서 시대를 살던 유대인의 정서를 현대 한국인의 정서에 포갠다. 이것이 기독교 논리에 부합한다고 강변하는 교인들은, 자신들이 어느 시대의 기독교를 믿는지를 반성해야 한다.
▲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16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으로 출근하다 취재진의 질문을 받은 뒤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결국 문창극과 김진의 발언의 뒤편에 있는 것은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논리다. 일본 식민통치 과정의 인권유린 범죄들을 '윤리적 잘못'이라 인지한다면 그들이 그걸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가 같은 잘못을 범한다는 걸 용납할 수 없다. 우리가 강해졌다고 해서 그들의 행위를 없던 것으로 돌리자는 주장도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인들에겐 인권유린 범죄가 아닌 식민통치 자체가 상처였고, 그들이 그 과정에서 철저히 내면화한 것은 약육강식의 논리였다. 일본인이 "강한 나라가 식민지를 만들고 침략을 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냐"라고 말한다면 '망언'이 되겠지만 실제로는 한국인들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며 '잘못한 건 국력이 약한 우리'라는 정서를 체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문창극의 인식이 보여주는 것도 전적으로 그것이 아니었던가.
물론 이 굴절된 좌절감은 20세기 중반 이후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내는 동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인식에선 일본 식민통치의 문제가 보편적인 인권문제가 아니라 ‘힘센 일본이 힘약한 한국을 때린’ 문제 정도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 일본인의 전쟁범죄를 아무리 비난하더라도 자국의 국가폭력에 둔감해지는 원리가 그것이다. 그들에겐 일본인이 한국인을 때린 것이 문제이지 한국인이 한국인을 때린 것이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문창극은 자신이 ‘친일파’가 아니라 ‘애국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거짓말도 아니다. 그는 일본이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에 기여하고 쪼그라드는 지정학적 운명을 예찬하였을 뿐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으려 하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에 반대한 것 역시 한국이 ‘크고 강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문창극과 김진은 ‘친일’과 ‘반일’이란 관점에서 평가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역사에 자신들의 목적을 부여한 후 수단을 정당화하는 비윤리성과 약육강식 논리의 철저한 체화의 측면에서 평가받아야 한다. ‘문창극의 친일’과 ‘김진의 반일’ 뒤편의 논리가 매우 흡사하며, 그것이 한국의 주류 인사들의 역사에 대한 감수성을 보여준다는 사실이 드러나야 한다.
그런 점에서 ‘문창극은 친일파’라는 단순한 매도는 ‘문창극은 애국자’라는 저편의 반론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 ‘친일’에 대한 대중의 분노와 ‘친일파 만들기’의 욕망이, 문창극과 김진의 그 사고방식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도 성찰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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