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말하기도 입이 아픈 지경이지만 2012년 대선 박근혜 후보의 슬로건은 ‘100% 대한민국’이었다.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문에서부터 나온 단어였다. “이념과 계층, 지역과 세대를 넘어,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모두가 함께 가는 국민 대통합의 길”을 가겠다 했다. “저의 삶은 대한민국이었습니다”란 수사에선. ‘그녀의 대한민국’에서 중심적 가치는 여전히 산업화 세력의 그것이긴 드러나긴 했지만 다른 세력을 배제하지는 않겠다 했다. 그리하여 박근혜 후보는 ‘광폭 행보’라는 이름으로 봉하마을에 조문을 갔고 심지어는 ‘전태일 다리’에 헌화를 하려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김정우 지부장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의 출범 이후 더 이상 ‘100% 대한민국’을 믿는 사람은 없다. 지지자들만을 챙기는 ‘51% 대한민국’, 기껏 잘 봐줘야 지지층과 중도층만 신경쓰는 ‘2/3의 통치’를 보여준다는 평이 어울릴 정도다. 정치적 적대자들을 달래고 세월호 참사 이후 대두된 국가 기관에 대한 대수술을 단행해야 할 시점에서 총리 인선에서 계파를 넘어서 달라는 지적은 보수언론에서조차 있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그러한 지적을 한 <중앙일보> 출신의 가장 보수적인 인사를 데려왔다.
2008년 4월 22일 <사춘기 무사히 넘긴 한국>

한·미 관계의 변화를 보면 사람의 성장 과정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한민국의 탄생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승리한 결과였다. 소련 관할이 된 북한과 비교할 때 우리가 미국의 관할에 들어갔다는 것 자체가 지금 보면 행운이었다. 물론 앞 세대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지만 우리의 번영과 민주주의는 미국에 힘입은 바 크다. 미국 없는 현재의 한국은 생각할 수 없다. 유아기의 한국은 미국에 젖을 더 달라는 젖먹이 같았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황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한국 정부의 관심은 미국으로부터 얼마나 원조를 받아내느냐였다. (...)

유아기를 지난 한국은 자기 발로 서려고 노력했다. 공업화의 시작이다. 우리 상품의 주 소비처는 미국이었다. 신발·컬러TV·앨범·완구 등 미국 시장이 우리 수출의 50%를 차지했다. 80년대 중반까지 한국 제조업 근로자 350만 중 4분의 1이 미국 수출과 직접 연관이 있었다. 이러니 미국에서 한국 상품에 대한 수입제한 얘기가 나왔다. (...) 어느 정도 성장한 한국은 사춘기를 맞았다. 사춘기의 한국은 미국에 대한 반항으로 이어졌다. 지난 10년이 그런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어른이 되어가는 한국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한국 대통령이 “반미 좀 하면 어때” 할 정도가 되었다. 미국을 벗어나 ‘동북아 균형자’ 노릇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주변 강대국 누구도 한국을 그런 나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성장기에 있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한국이 이제야 온전한 성인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청소년기의 이유 없는 반항 때문에 일생을 망치는 그런 나라를 넘어섰다. 자기의 책임하에 살림을 꾸릴 수 있으며 주변 사정도 돌아볼 줄 아는 나라가 되었다. 이제야 철이 들어간다고나 할까. 그런 결과가 이번 ‘전략적 동맹’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

2009년 2월 2일 <김석기를 살려야 한다>

(...)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한다. 김석기 경찰청장 후보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법을 집행하다 발생한 사고이기 때문에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주장이 있고, 인명의 피해가 있었으니 당연히 책임을 지워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한쪽은 법치를 말하고, 다른 쪽은 생존을 위한 저항권을 말한다. 양쪽이 다 일리가 있다. (...)

경찰청장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두고두고 이 나라에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앞으로 경찰청장의 목은 데모대가 쥐게 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질서 유지를 맡길 것인가? 이번 사건은 여야가 타협할 사안이 아니다.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을 타협한다면 겁쟁이 소리만 들을 뿐이다. (...)

2009년 5월 26일 <공인의 죽음>

(...) 그러나 재임기간 중에도 그의 약점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대통령을 지냈다는 대표성과 엄중함에 왜 의식이 미치지 못했을까. 그가 유언에서 ‘나는 대통령으로서 명예를 지키지 못해 이렇게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나의 죽음으로 나라가 분열을 넘어 새 길을 가기 바란다’고 했다면 어땠을까. 그렇지 않아도 세계 최대의 자살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이 나라에서 대통령을 지낸 사람까지 이런 식으로 생을 마감한다면 그 영향이 어떻겠는가.

죽음이 모든 것을 덮는다고 하지만 그의 죽음은 자연인과 공인의 성격으로 나누어 판단해야 한다. 자연인으로서 가슴 아프고 안타깝지만 공인으로서 그의 행동은 적절치 못했다. 그 점이 그의 장례절차나 사후 문제에도 반영되어야 했다. 검찰의 처리도 문제다. 그가 큰 범죄자인 양 몰아붙이다가 그가 죽자마자 “모든 수사는 종결된다”고 했다. 당사자가 죽음으로써 자연스럽게 공소권이 상실된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범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죽은 그를 괴롭히자는 얘기가 아니다. 사실은 무엇인지, 검찰의 억지는 없었는지가 밝혀져야 한다. (...)

2009년 8월 3일 <마지막 남은 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병세가 불안정하다. 한때 위중하여 장례 절차까지 정부와 협의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그가 거인이었음은 확실하다. 통일에 대한 그의 접근법은 분란의 씨앗이 되었지만 새로운 길을 모색했음은 분명히 기억될 것이다. 누구라도 죽음을 앞두게 되면 사람들은 관대해진다. 이 세상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이다. (...)

김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비자금 조성과 재산 해외 도피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이는 단순히 소문 차원이 아니라 언론을 통해 몇 차례 공식적으로 제기된 문제다. (...) 이 사건의 경우 이상한 점은 이렇듯 많은 의혹 제기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물론 당사자 쪽에서도 일절 반응이 없다는 점이다. 검찰뿐이 아니다. 주류 언론에서조차 이 문제는 제기되지 않았다. (...)
▲ 2010년 3월 16일자 중앙일보 39면 문창극 칼럼
2010년 3월 16일 <공짜 점심은 싫다>

(...) 무료 급식은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싶다.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 개인이 해야 할 일과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구별되어 있다. 치안과 국방을 맡고, 다리와 댐을 만들고, 학교를 세우는 일 등 개인으로서 할 수 없는 일들은 국가가 세금을 거두어 대신 해 준다. 그러나 국가가 그 한계를 넘어 개인의 생활까지도 책임지겠다고 나온다면 그 부담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말이 좋아 포괄적 복지이지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다른 한편 무료 급식은 배급 장면을 연상케 한다. 좀 심하게 비유하자면 우리 아이들이 공짜 점심을 먹기 위해 식판을 들고 줄을 서 있는 것과, 식량 배급을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북한 주민이 그 내용 면에서는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내 아이의 점심을 내가 책임지는 것은 거창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바로 개인의 독립이며 자존이기 때문이다. 내가 할 일은 내가 하는 것이지 국가가 대신 해 주는 것이 아니다. 물론 여러 이유로 아이의 점심을 책임질 수 없는 가정도 있다. 생활보호 대상자도 있다. 그들은 별도의 배려를 해 주어야 한다. 무료 급식을 받는다고 차별을 받아도 안 될 것이다. 티가 안 나게 운영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
▲ 2011년 12월 23일자 중앙일보 35면 문창극 칼럼
2011년 11월 24일 <위대한 시대>

나라마다 위대한 시대가 있었다. 그리스에는 페리클레스 시대가,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가, 미국은 독립전쟁 시대와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1940년대가 그러하다고 역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이런 시대의 특징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많은 인재가 동시에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다. 미국의 독립전쟁 시기에는 워싱턴, 제퍼슨 등 무수한 건국의 아버지들이 출현했다. 2차대전 전후인 1940년대에도 왜 그런지 많은 인물이 나왔다. 루스벨트, 맥아더, 마셜, 아이젠하워, 트루먼 등 한 세대에 한 명이 나올까 말까 한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나와 미국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우리나라 역시 그런 시대가 있었다. 세종 때는 인물이 넘쳐났다. 조선 역사상 가장 뛰어났다는 재상 황희와 맹사성, 집현전의 정인지 등 학사들, 과학 발명가 장영실, 음악가 박연, 대마도를 정복한 이종무, 육진을 개척한 김종서 등 손꼽기 어려울 정도다.

포철을 세운 박태준 회장이 돌아가셨다. 우리 현대사에서는 박태준이 일했던 60, 70년대가 바로 이런 시대였다. 그 시대에 우연인지 필연인지 인재가 쏟아졌다. 그 정점에 박정희가 있었으며 이병철, 정주영, 김우중 등이 일찍이 다른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개척하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었다. 그 과정에 꼭 옳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일생을 바쳐 이 나라의 경제 기틀을 만들어 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왜 같은 시대에 많은 인물이 쏟아질까. 시대의 요청에 따라 도전적인 환경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사람들이 동시에 나타난다거나, 사심 없는 위대한 리더가 출현해 넓게 인재를 등용했기 때문이라는 등 해석은 다양하다. (...)
2012년 4월 24일 <기적>

총선 결과를 놓고 여러 분석들이 있었지만 ‘기적’이라는 말보다 더 정확한 분석은 없을 것이다. 선거 전에 누구도 이번 같은 결과가 나오리라 예측하지 못했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물론 새누리당조차도 과반을 넘기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무슨 까닭인지 그렇게 비난을 받던 욕쟁이 후보가 사퇴하지 않았다. 야당도 이 후보의 사퇴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지난 지자체 선거에서 야당을 밀어주었던 지방사람들이 대거 보수로 돌아섰다. 진보진영에서는 이를 두고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가 먹히지 않은 탓을 했지만 그 돌아선 이유를 누가 알겠는가. 이럴 때는 부질없는 분석에 매달리기보다는 기적 그 자체를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 이긴 쪽은 기적에 대해 감사하면 되는 것이고, 패배한 쪽은 그 기적을 보고 두려운 마음으로 근신하면 되는 것이다.

이 기적은 누가 만들었나? 국민이다. 개별 국민들은 이런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고 투표를 했는데 그런 판단들이 모여 기적을 만든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판가름이 난 지역구를 세어 보라. 이를 두고 막연하게 국민의 선택이었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라는 말이 더 맞을지 모른다. 하늘의 마음이 작용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이 나라는 복 있는 나라다. 세계의 최빈국에서 불과 50년 만에 이 정도의 나라로 일어선 것을 보고 밖에서는 기적이라고 부른다.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고비고비가 기적이었다.

만일 예상했던 대로 야당이 과반을 차지했다고 가정해 보자. 지금 이 나라는 얼마나 어지럽겠는가. 야당은 당장 한·미 FTA 폐기를 발의한다고 법석을 떨고 있을 것이다. 그리 되면 우리는 외국과 맺은 조약을 선거 때마다 바꾸는 믿지 못할 나라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제주도 강정마을은 어떻게 됐겠는가. 거기서 데모를 하던 패들은 아예 건설현장을 점령했을 것이고, 지키던 경찰이나 군인들은 아마 패잔병 꼴이 되었을 것이다. 북한은 미사일을 뻥뻥 발사하는데 우리는 자기 땅을 지킬 군사시설조차 만들지 못하는 이상한 나라라고 손가락질 당했을 것이다. 나꼼수는 어떻게 됐을까? 욕쟁이 후보는 낙선된 후 이틀 만에 “낙선자의 근신은 끝났다. 국민 욕쟁이로 행동개시”라고 말했다. 지고도 이 정도인데 이겼다면 그 기세가 어떠했겠는가. 야당이 다수가 된 국회는 다른 국사에는 손을 놓고 이명박 정부를 잡는 각종 청문회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번 선거의 결과가 그런 어지러움을 막을 수 있었다. (...)

2012년 10월 30일 <안철수 시험대에 서다>

(...) 정치개혁과 단일화는 상극이다. 단일화는 정치담합이자 권력만을 노린 게임이기 때문이다. 기성 정치인들이 대선 때마다 되풀이하던 짓이었다. 거기에는 국민이 빠져 있다. 우리는 단일화를 제대로 판단해야 한다. 이념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데 무조건 이기고 보자고 짝짓기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런 단일화는 바로 정치개혁의 대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명분상으로 볼 때 안철수가 단일화를 하는 순간 그의 정치개혁은 헛구호가 되는 것이다. (...)
<중앙일보>의 전 주필, 문창극 총리 후보는 보수언론인 <중앙일보>의 내부에서조차 ‘친삼성, 반호남’의 기조를 가진 보수적인 인사로 불린다. 이 정부는 그가 경상도가 아닌 충청도 출신이라 ‘탕평인사’라 생각할지 모르나 근본적으로는 평안도의 기독교 가문 출신이다. 북한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대거 남하한 평안도 태생의 기독교인들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다. 문창극 전 주필의 칼럼 역시 보수진영 내부에서조차 ‘극우’로 표현될 노선을 많이 보였다.
위에 인용한 글들은 문창극 주필의 칼럼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자, 이 총리 인선을 누가 ‘화합형 인선’이라 말할 수 있는가?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