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체제’ 성립 이후 유례가 없을 정도로 정치권이 무력한 상황이다. 여당이라는 새누리당은 청와대와 정권을 방어하기 급급하고, 제1야당이라는 새정치민주연합은 ‘한지붕 세가족’의 갈등을 수습하지 못해 매우 굼뜨게 움직이는 상황이다. 심지어는 안철수 공동대표의 몇몇 발언에서는 ‘정치로부터 퇴각하는 것’을 ‘새정치’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마저 든다.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양당이 지리멸렬한 시대에 제3지대의 대안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진보정당의 경우 ‘민주노동당의 유산’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계승한 정의당·통진당·노동당 세 개의 정당 외에 새로 생긴 녹색당까지 네 개의 정당이 활동하고 있다. 이중 노동당과 녹색당은 원외정당으로서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원내에 있는 정의당과 통진당이라고 해서 사정이 크게 녹록하지 않다는 것도 문제다.
현재 정의당과 통진당은 각각 5석과 6석의 의석을 가지고 있다. 원래는 정의당이 7석이었지만 두 석이 줄었다. 2012년 총선 당시 획득한 통합진보당의 13석 중에서 당선 무효로 의원직을 박탈당한 노회찬 전 의원과 무소속 의원이 되었다가 새정치민주연합에 합류한 강동원 의원을 제외한 11석이 남았다. 이는 외형적으로만 보자면 2004년 첫 원내진출에 성공한 진보정당이었던 민주노동당의 10석(임기 초기 조승수 의원의 당선 무효로 인해 실질적 활동은 9석)을 뛰어넘는 규모다.
하지만 지금의 원내진보정당이 ‘십년 전의 그 민주노동당’보다 활기에 차 있다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2004년의 민주노동당의 성과’를 벗어나지 않고 어떻게든 이를 복원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진보정당 운동의 발목을 잡고 퇴행을 부추긴다는 지적이 있을 정도다.
정의당, ‘안철수 쇼크’ 이후
특히 정의당의 경우 일각에선 내심 ‘안철수 세력’이 제3정치세력을 고수할 경우 정당조직까지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기에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의 민주당·새정치연합 합당 선언 이후 정의당으로서는 ‘갈 수 있었던 길’ 중 하나가 사라지고 스스로 제3의 진보세력의 ‘맏형’ 역할을 강요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 정의당 노회찬 전 대표, 배진교 남동구청장 후보, 심상정 원내대표가 25일 인천시 남구 신세계백화점 앞에서 시민에게 정의당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의당 사정을 아는 한 관계자는 “비록 일각에서 했던 생각이긴 하지만 ‘안철수 신당’으로 합류하겠다는 계산은 ‘2011년 통합진보당’을 만들었던 정치적 전략과 비슷한 흐름이다”라고 지적했다. 그 관계자는 “통합진보당이란 기획은 참여당 유시민 등의 대중적 인지도, 민주노동당의 조직, 그리고 노회찬·심상정·조승수 등 진보신당 출신의 ‘스타정치인’들의 결합으로 가능했다. 대중성과 조직력, 그리고 통합을 내세웠고 이를 바탕으로 진보지식인 그룹의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 냈다”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안철수와 함께 하면 시너지효과가 나올 거란 생각도 2012년 분당 이후 상실된 대중적 인지도와 대표성을 되찾으면 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참여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의 일부를 포괄하는 정당이란 기획이 처음 던져졌을 때 유시민은 차기 대선후보 지지율 2위, 야권 대선후보 지지율 1위에 해당하는 후보였다. 하지만 한국 정치는 변화무쌍했던지라, 막상 그 통합진보당이 탄생했을 때 세상은 ‘안철수 현상’에 휩싸여 있었다.
이는 선거전략에 의해 급조된 정당의 아이러니였다. 그리고 그 아이러니를 반복으로 돌파하려던 시도 역시 무용해졌다. 이른바 ‘안철수 쇼크’다. 정의당 내부의 한 관계자는 “이번 일로 알게 된 것은 참여계가 민주당 쪽과 함께 하기 싫어했다는 정서만큼은 진정성이 있었다는 것”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여의도에 출입하는 한 기자는 “사실 안철수와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정의당의 ‘김칫국’이었을 뿐 안철수 측에겐 주요한 고려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라며 “최장집 교수가 (안철수 측과) 함께 할 때는 ‘진보적 자유주의’를 매개로 함께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할 수 있었겠으나, 그 이후엔 사실상 어려웠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정의당의 강점은 참여계 출신의 유시민·천호선과 ‘2004년 민주노동당’의 스타정치인 노회찬·심상정, 그리고 조국·진중권 등의 지지하는 지식인의 대중적 인지도다. 현재 6.4 지방선거 특집 팟캐스트 <정치다방>을 노회찬·유시민·진중권이 주도하고 있고 정당 지지를 부탁하는 홍보물 역시 이들의 인지도에 기대고 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분명히 대중적 인지도는 있다. 하지만 인지도 역시 관심이 있어야 효력을 발휘한다. 현재 대중들이 진보정당 자체에 대해, 그리고 그 한 분파인 정의당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가 미지수다. 그들 개개인의 대중적 인지도가 정당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상황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정의당은 다른 진보정치세력과의 적극적 연대를 통해 지방선거에 대응하고 있다. 사실상 통진당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진보정치세력의 협력을 이끌어낸 연대체가 구성되었다. 지난 13일엔 노동당, 노동·정치·연대, 진보교연과 함께 “진보혁신과 지방선거 공동대응을 위한 진보진영 합동회견문”을 이끌어 냈다.
이중 노동당은 2011년 통합진보당으로의 합류를 거부했던 진보신당의 새로운 당명이다. 또한 노동·정치·연대는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양당 어디로도 합류하지 않은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를 고민하는 진영 중 일부라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진보교연은 과거 민주노동당을 지지했고 분당 이후 통합을 종용했던 지식인 그룹이다.
일단 외형적으로는 ‘과거 민주노동당-현재 통진당’의 꼴을 갖췄다. 28일엔 민주노총, 민변, 참여연대, 유통상인연합회, 청년유니온, 민생연대, 참여자치지역운동연대,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등 전국 150여 단체가 결성한 지방선거 관련 정책운동 연대기구인 ‘6.4지방선거 좋은정책연대’와 함께 공동기자회견을 하면서 시민사회진영의 광범위한 지지까지 이끌어냈다. 4개 진보정치단체의 10대 공동정책에 대해 ‘6.4지방선거 좋은정책연대’가 지지를 선언했으며, ‘6.4지방선거 좋은정책연대’의 10대 정책과제에 대해서도 4개 진보정치단체가 적극 수용의사를 밝혔다.
정의당의 광역자치단체선거 대응을 보면 대구시장 후보로 출마한 이원준 후보가 눈길을 끌며 울산에서는 조승수 후보가 새정치민주연합 이상범 후보와의 단일화를 이루어내는 기염을 토했다.
▲ 29일 울산시의회 프레스센터에서 조승수 정의당 울산시장 후보(왼쪽에서 2번째)가 이상범 새정치민주연합 후보(오른쪽에서 2번째)와의 양자 단일화에서 승리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울산의 야권후보 단일화 상황은 씁쓸한 것이기도 했다. 4개 정당에서 내세운 시장 후보들이 모두 과거 민주노동당 출신이었다. 새정치민주연합 이상범 후보는 현자노조 위원장 출신으로 민주노동당 소속 울산 북구청장을 역임한 바 있다. 통진당에서 내세웠다가 사퇴한 이영순 후보는 민주노동당 시절 울산 동구청장과 비례대표 의원을 지냈다. 후보단일화에 참여하지 않는 노동당에서 내세운 이갑용 후보는 민주노총 위원장을 지냈고 민주노동당 소속 울산 동구청장 출신이다. 물론 정의당 조승수 후보 역시 민주노동당에서 울산 북구청장과 울산 북구 의원이었다.
진보정당 운동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주어진 여건에서 분열을 피할 수 없었다고는 해도, 현재의 상황이 파행인 건 마찬가지다”라면서 “진보정당이 난립하고 진보정당 출신들이 새정치민주연합에 일부 합류한 상황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과 냉소가 팽배해 있는데 이를 극복할 뾰족한 방법은 보이지 않는 실정이다”라고 지적했다.
통진당, ‘왕따’이면서 ‘X맨’?
통진당의 경우 의석규모나 당세는 정의당에 뒤질 게 없으나 정치지형상 정의당보다도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이 당론에서 통진당을 야권연대 대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 보여줬듯 정의당 위주의 선거 연대체에서 통진당은 제외되어 있다. 비록 각 지역 사회에서 군소정당 후보끼리는 협상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당 차원의 논의에서는 거의 배제당하는 상황이다.
새정치민주연합 내부에선 김경수 경상남도지사 후보가 통진당 후보와의 단일화를 허락해 달라고 촉구하여 당내 분란을 일으킨 일마저 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경남에선 통진당이 단순히 정당조직에서 뿐만 아니라 지역의 노동조합이나 농민단체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지역적 특수성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 관계자는 “사실 김경수 후보의 당선가능성이 높은 것도 아닌데 새정치민주연합에서 보수언론 비판으로 인한 수도권 중도층의 이탈 우려를 감내해야 할 유인이 큰지는 모르겠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울산에서는 새정치민주연합 이상범 후보가 통진당 이영순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을 거부한 이후 이영순 후보가 단일화 논의와는 별도로 사퇴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 지방선거 후보 등록 마지막 날인 16일 울산시의회 프레스센터에서 이영순 통합진보당 울산시장 후보가 사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새정치민주연합의 경우 ‘통진당 배제’에 대해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원칙도 도외시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이를테면 정체성이 다른 정당이라 규정하여 선거연대를 하지 않더라도 통진당에 대한 위헌정당 해산청구 소송이나 이석기 의원에 대한 내란음모예비죄 선고에 대해선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는데 이를 피해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원칙에 입각해서 이를 상황에 적용하는 당론을 만들지 못하고 새누리당 입장을 일부 수용하고 거부하는 선에서 당론이 정리되어 있다. 새누리당 측이 이석기 의원 등의 제명을 요구할 때에나 이를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른 진보정당들의 경우 통진당에 대한 정부의 해산 시도나 통진당 소속 의원에 대한 새누리당의 제명 시도에 대해서는 분명히 비판적인 입장이다. 하지만 선거연대의 문제에 있어서는 매우 조심스럽다. 진보정당의 사정을 아는 한 관계자는 “소선거구제 선거이기 때문에 군소정당끼리는 암묵적으로 후보를 낼 지역을 조정하여 겹치지 않게 할 수는 있다. 사실상 이것이 다른 정당이 통진당에게 바라는 바일 것이다. 단일화를 하자거나 경선을 하자고 요구하면 사실 매우 부담스럽다”고 지적한다.
이는 진보정당 운동의 지지자들에게는 하나의 곤혹으로 작용한다. 통진당 소속 인사들이 보여준 ‘종북’ 논란에 선을 긋지 못하거나 오히려 이에 대한 대중적 편견을 부추기는 행태들이 진보정당 운동에 해를 끼쳤다는 분명한 판단은 있지만, 노동운동·농민운동·시민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이들 단위 모두를 ‘구태’로 배격하면 진보운동의 역량이 크게 위축되는 것이 현실이다.
반면 통진당에 대한 보통의 야권 지지자들의 태도는 훨씬 싸늘하고 격앙되어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을 지지한다기 보다는, 새누리당을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후보를 찍는다”라고 밝힌 한 야권 성향 지지자는 통진당의 현재 처지에 대해 “자업자득(自業自得) 만시지탄(晩時之歎)”의 8글자로 평가했다. 그는 “늦게 처리하는 바람에 더 큰 손해를 입었다. 아직 그들이 잘못한 만큼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왕따’라고 주장을 하는데, 정치세력이 반 동무들 놀 듯이 모두모두 사이좋게 지내자고 하는 것인가? 그렇게 치면 그간 야권은 새누리당을 ‘왕따’한 것인가? 새누리당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은 ‘X맨’에 불과하다”라고 잘라 말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을 지지한다고 밝힌 다른 야권 지지자는 “서울시장 후보 토론회에 나온 통진당 정태흥 후보를 보면 자연스레 2012년 대선 3자토론에 낀 이정희 후보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엔 나도 이정희 후보의 말에 속시원해 했다. 결과적으로 생각해 볼 때 잘못 생각한 거다. 사람이 잘못 생각했으면 수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제 정태흥 후보가 좋게 보이지 않는데, 그들은 새누리당 후보를 막겠다며 또 그렇게 나선다. 이해하기 어렵다”라고 비판했다.
▲ 박원순 새정치민주연합(오른쪽), 정태흥 통합진보당 서울시장 후보가 27일 서울 송파구 교통회관에서 열린 서울 개인택시운송사업조합 창립 44주년 기념식에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통진당의 상황을 아는 한 관계자는 그들의 심리에 대해 “이제 와서 노선을 바꿀 수도, 운동을 그만할 수도 없다. 그렇게 판단했다면, 자신들의 기준으로 여기저기에서 ‘진정성 있게’ 실천을 하면서 사람들이 이를 알아주거나 자신들에게 쏟아진 의혹을 잊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그 관계자는 “사실 통진당이 다른 진보정당보다 특별히 더 사정이 힘들지도 않을 것 같다. 운동단체가 활성화된 일부 지역에선 기초의원이나 광역의원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진보진영, ‘부수적 피해’에 갇히다
그러나 현실은 시민들이 통진당을 잊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진보정당과 통진당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부산의 한 진보정당 관계자는 “과거 민주노동당 소속이었지만 NL인 적이 없었고 당적없이 교육감 선거에 나온 김석준 후보에 대해서도 부산의 보수층들은 ‘통진당이다’라며 비토를 하는 것이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2007년 일심회, 2012년 경선부정 사태 및 경기동부 논란, 2013년 이석기 내란음모예비죄 공방 이후 통진당의 행적이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 진보진영이 통진당과 같은 것으로 매도되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
진보정당의 사정을 아는 한 관계자는 “가령 밀양 송전탑 반대투쟁에서도 통진당 일부 당원이 참석하면 종편은 이를 침소봉대해서 ‘통진당의 싸움’으로 만든다”라면서 “종편이 천박하고 편향되었다는 지적과는 별개로 통진당의 대중운동이 전체 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물어야 되는 지경이다”라고 설명했다. 다른 관계자는 “그들은 새누리당 후보를 막기 위해 출마했다 사퇴한다지만 정작 자신들이 적어도 선거에선 새누리당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죽어도 인정하기 싫은 것이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 고창권 통합진보당 부산시당 후보가 29일 부산시 연제구 부산시의회 브리핑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더 큰 승리를 위해 부산시장 후보직을 내려놓겠다"며 사퇴의사를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결국 ‘통진당 딜레마’는 단지 통진당이란 정당의 문제를 떠나 전체 진보정당 운동의 ‘부수적 피해’를 통한 신뢰의 위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번 지방선거에서 드러난 사실은 도합 11석에 달하는 두 원내진보정당 역시 이러한 위기에 대처할 뾰족한 방법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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