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남양유업의 ‘밀어내기’ 횡포가 알려진 뒤 각종 ‘갑질’이 일 년 내내 방송과 신문에 등장했다. 곧장 배상면주가 사건이 나왔다. 프랜차이즈 편의점 점주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도 일어났다. 크라운베이커리 ‘을’은 피해사례를 증언했다. 롯데와 KT그룹의 ‘을’들은 피해자모임을 만들었다. 프랜차이즈 화장품 판매 대리점에도 ‘밀어내기’가 있었다. 케이블TV업체 티브로드의 간접고용노동자들도 이때 싸움을 시작했다. 이른바 ‘골목상권’ 문제가 다시 불붙은 시기도 이 때다. 새정치민주연합(당시 민주당)은 실력 있는 국회의원들로 ‘을지로위원회’(을을 지키는 길로)를 꾸렸다.

▲ 남양유업 피해대리점협의회 회원들은 지난해 6월19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 남양유업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남양유업을 규탄하는 구호를 외쳤다. (사진=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불공정한 갑을관계는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공정거래위원회도 발 빠르게 움직여 몇몇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경제민주화가 아닌 ‘경제활성화’를 국정기조로 삼았다. 참여연대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남근 변호사는 “더욱 우려되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규제는 암이다’라는 구호에 맞춰, 경제관료들은 중소기업 적합업종 제도, 대형마트 진출과 영업규제 등 경제민주화의 상징적 제도마저 이제는 철폐돼야 할 암적인 규제로 호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 년이 지난 지금, 문제가 된 ‘갑’은 대부분 그대로다.

28일 경제민주화실현전국네트워크와 전국‘을’살리기비대위, 참여연대, 민변민생경제위원회, 전국유통상인연합회는 <갑을개혁 투쟁 1년 평가 및 과제 보고서>를 냈다. ‘을’살리기비대위 이동주 정책실장은 지난해 아모레퍼시픽, 아리따움 등 화장품 업체와 대리점·가맹점 간 불공정거래가 문제가 돼 국정감사에서도 다뤄졌으나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이동주 실장은 배상면주가 ‘국순당’ 문제의 경우에도 “상생방안이 협의됐으나 잘 이행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본사의 일방적인 거래조건 변경 등으로 공정위에 신고된 멕시카나 치킨은 점주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대리점과 판매점에 지원금을 과도하게 강제하고 목표량을 채우지 못하면 불이익을 준 이동통신 3사 문제도 답보 상태다. 여기에 이통 3사는 이미 알뜰폰 시장에 진출했거나 진출을 선언, 준비 중이다. 대기업의 ‘골목상권’ 침해도 여전하다. 평택에는 이마트 2, 3호점이 추가로 출점 예정이다. 수원에는 코스트코가 생기고, 제천에는 GS슈퍼마켓이 3곳 출점 예정이다. 이마트는 편의점 사업까지 진출했다. 문구, 식자재도매업 문제도 심각하다. 중소상인들은 동반성장위원회에 적합업종을 신청하면서 대형마트와 판매품목 조정을 요청했으나 ‘규제완화’ 국정기조 이후 논의가 멈춘 상태다.

개인사업자 1830여명으로 택배사업을 하고 있는 우체국 문제도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정사업본부는 중량별 차등수수료를 적용, 수수료를 인상한 데 그쳤다. 대리운전기사의 불공정 계약(“수수료입금액 및 입금방식은 갑이 정하는 방식에 따른다”) 문제도 그대로다. 상가세입자 문제는 법 개정까지 이어졌지만 그 효과는 제한적이다. 이동주 실장은 임대표 폭탄 문제와 계약갱신권 제한 피해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실장은 “건물 재건축, 매매에도 기존 임대차 계약을 보호하는 내용으로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밖에도 편의점 불공정 문제도 진행 중이다.

2012년 총선 때부터 나온 ‘경제민주화’ 정책경쟁이 사라지면서 갑을 문제가 해결되고 있지 않다는 게 시민사회단체들 지적이다. 경제민주화실현전국네트워크 이선근 공동대표는 “숨죽이고 있던 을들이 남양유업 등을 시작으로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 나선 지 1년이 지났지만 문제가 순방향으로 풀려가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선근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4개월 만에 경제민주화 과잉입법 운운하며 재벌대기업의 품으로 돌아갔다”며 ‘갑’과 공정위 등이 박근혜 정부의 규제완화 추진에 편승해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참여연대 등이 지난해 ‘대기업의 불공정·불법·부당행위’ 관련 공정위와 금융감독원에 행정처분을 신청하거나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한 사례는 총 25건. 이중 4건만 ‘당사자 협의’로 마무리됐다. 1건은 기각됐고, 19건은 진행 중이다. 참여연대 장흥배 경제금융팀장은 지난해 공정위는 불공정 행위를 근절하겠다며 △하도급 불공정 특약 피해 방지 △유통분야 표준계약서 개정 포함 12개 국정과제를 제시했으나 모두 실효성이 부족하거나 제재실적이 미미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정부가 ‘경제민주화 완성론’을 얘기하고 있다며 “실효성 강화 노력을 사실상 포기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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