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날이 밝았다. KBS의 최고 의결기관인 KBS이사회(이사장 이길영)는 지난 26일 야당 추천 이사들이 제출한 ‘길환영 사장 해임 제청안’을 상정했고, 오늘(28일) 오후 4시 정기 이사회 의결을 앞두고 있다.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의 구체적인 보도 개입 폭로, 백운기 전 보도국장 청와대 면접 등 길환영 사장이 청와대 지시에 따라 움직여 KBS의 공공성과 독립성을 해쳤다는 사실이 수면 위로 떠오른 지도 어느덧 20여일 가까이 지났다.

사측과 대척점에 있는 노조도 아닌 자신이 임명한 보도 책임자에게 뜻밖의 연타를 맞고도 길환영 사장은 아직 꿋꿋하다. 기자들이 제작거부에 나서 뉴스가 멈출수 있단 경고에도 ‘감수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길 사장은 KBS 내부 협회와 노조가 벌이고 있는 ‘KBS 정상화’와 ‘길환영 사장 퇴진’ 투쟁은 불법이라는 강경한 입장이다. KBS 사태 초기만 해도 길환영 사장의 ‘용퇴’가 가능성 높은 카드로 제시됐지만, 그런 기대는 일찌감치 접혔다. 회삿돈을 들여 신문광고까지 내며 ‘항변’하는 그에게 ‘자진사퇴’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해임 가결’은 오롯이 여당 추천 이사들의 몫

이제 길환영 사장의 해임은 이사회의 ‘결단’에 달렸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공은 여당 추천 이사들에게 넘어갔다.

야당이사들은 △‘보도통제’ 의혹 확산에 따른 공사의 공공성과 공신력 훼손 △공사 사장으로서 직무 수행능력 상실 △부실한 재난보도와 공공서비스 축소에 대한 책임△ 공사 경영실패와 재원위기 가속화에 대한 책임 등을 이유로 길 사장의 해임 제청안을 이사회에 제출한 상태다. 길환영 사장이 KBS 수장으로서의 자격을 잃었다고 천명한 야당이사들의 뜻은 표결을 거치지 않아도 이미 알 수 있는 부분이다.

▲ KBS는 KBS의 독립성과 공공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공사 경영에 관한 최고의결기관으로 KBS이사회를 두고 있다. (사진=KBS 홈페이지 캡처)

그동안 대부분의 의사결정은 여야 7:4의 구조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야당이사 4명의 의견이 여당이사 7명에 의해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견고한 7:4 틀을 가져가기에는 부담이 크다.

KBS 양대 노조는 28일 이사회에서 해임 제청안이 부결될 시 총파업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침묵하는 다수’ 혹은 ‘보수적인 집단’으로 여겨졌던 곳들도 대거 참여해 무려 16개 협회가 ‘길환영 퇴진’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길환영 사장에 대한 공분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여당이사들이 진영 논리에 따라 길 사장을 비호한다면, 열흘째 이어지고 있는 방송 파행과 KBS의 공공서비스 수행 실패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질 수밖에 없다. 자신들이 뽑은 길환영 사장을 ‘중도하차’시키는 것은 물론 부담스러운 일이겠지만, 길환영 사장이 물러나지 않아 발생하는 후폭풍이 전자보다는 훨씬 거셀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KBS 안팎의 모든 시선이 여당이사들의 손끝에 쏠리고 있다. 버티기 중인 사장을 내부 투쟁으로 바꾸려는 많은 시도가 대부분 실패했다는 것은 김인규, 김재철, 배석규 등의 사례로 이미 판명됐다. 가뜩이나 보도통제 의혹에 휩싸인 청와대가 김시곤 전 보도국장을 ‘잘라내듯’ 직접 오더를 내려 길환영 사장을 갈아치울 수도 없는 상황이다.

한진만, 최양수 이사의 ‘학자적 양심’을 기대하며

민감한 사안이 있을 때 보다 심도 있게 토의하기 위해 만든 이사회 소위원회에서 여당 측 대표로 나온 이들이 한진만, 최양수 이사다. 이들은 여야 이사들의 의견이 갈릴 때마다 중간지대 역할을 하며 세밀한 의견 차이를 조율하는 역할을 해 왔다. 오랫동안 학계에서 활동해 온 언론학자로 한국방송학회장을 역임할 만큼 ‘방송’, 특히 ‘공영방송’에 대한 이해가 높은 두 이사를 이번 해임 제청안 의결에 ‘캐스팅보트’로 꼽는 까닭이다.

▲ 왼쪽부터 최양수 이사, 한진만 이사 (사진=연세대, 강원대 홈페이지)

한진만 이사는 지난 21일 JTBC <NEWS 9>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명예롭지 못하지만 보다 나은 KBS를 위해서 어떤 확실한 결정을 내리고 용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면 안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여당이사 다수가 길환영 사장의 해임에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한 이사는 ‘여당 추천’을 받았다는 KBS 이사로서의 포지션이 아니라 ‘학자로서의 견해’를 밝혔다. 한진만 이사는 각 당의 추천으로 이사에 선임되긴 했지만, 정치적 논리만을 가지고 입장을 정하지는 않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적도 있다. 이 또한 학자로서의 ‘소신’이었을 테다.

두 사람이 학회장을 역임했던 한국방송학회마저 25일 성명을 내고 KBS이사회에 △보도와 편성 자유 훼손한 경영진 처벌 △추천받은 정치권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것에서 벗어나 명망가로서 지니고 있는 전문성 발휘를 당부했다. 무너진 공영방송을 재건해 달라는 ‘동료들’의 촉구다.

길환영 사장과 KBS의 운명이 결정될 시간은 이제 5시간도 남지 않았다. '공영방송'에 대한 식견이 있는 이사들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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