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 주류 진보언론의 ‘노동’ 의제 외면의 연장선인가. 아니면 상대가 이른바 ‘삼성’이기 때문인가.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분회장이었던 고 염호석 노동자의 자살 이후 시신 탈취 및 이에 항의하는 지회의 파업 정국에서도 보수언론은 물론 <한겨레>와 <경향신문> 등 주류 진보언론의 보도는 약소하기만 하다.

포털사이트에서 ‘삼성전자서비스지회’ 혹은 ‘염호석’으로 검색했을 때 이 사안을 노동조합의 입장을 반영하여 보도한 곳은 <한겨레>나 <경향신문>이 아니라 <프레시안>, <오마이뉴스>, <레디앙>, <민중의 소리>, <참세상> 등 인터넷 진보언론이었다.
<한겨레>의 경우 이 사안에 대한 마지막 보도는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원이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는 사실을 알린 20일자 16면 기사이다. <경향신문> 역시 같은 날 12면에 해당 사안을 다뤘다.
▲ 20일자 한겨레 16면 기사
그러나 해당 기사에서 두 신문은 노조의 뜻과 유족의 뜻이 대립하는 것처럼 다뤘다. 고 염호석 지회장은 삼성서비스지회 여러분께’라는 유서에서 “저의 시신을 찾게 되면 우리 지회가 승리하는 그 날 화장해 달라”고 당부했고, 부모에게 남긴 유서에서도 “제가 속한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그 때 장례를 치러 달라”고 밝혔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고인의 부친이 노조의 뜻에 따르려고 했던 태도를 바꿔 경찰이 시신을 양도받은 것처럼 썼고 그것 역시 일면의 사실이지만 모친은 아들의 뜻을 따를 것을 원했고 노조의 투쟁에도 함께 한 상황이지만 두 진보언론의 기사에선 그러한 맥락은 찾아볼 수 없다.
와중에 21일자 <한겨레>는 2면 기사에서 <3세 승계 앞둔 삼성, ‘백혈병 사과’ 이어 ‘무노조’ 포기?>란 제목의 기사를 냈다. 이 기사는 심지어 ‘단독’이란 이름을 달고 있으나 막상 읽어보면 “삼성 미래전략실의 한 핵심 팀장”이 “무노조 경영 변화 가능성을 열어놓는 듯한 발언”을 했다는 것이 전부다.
▲ 21일자 한겨레 2면 기사
이 <한겨레> 기사는 제목 말미에 물음표를 달았기에 거짓말이나 왜곡이라고 규탄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미 실현된 노동조합 파업은 전날 16면에 배치되면서 아직 확정되지 않은 것에 불과한 삼성 경영진의 ‘의중’은 2면에 실렸다는 것은 진보언론에서도 노사균형 보도는커녕 사측 편향 보도가 나오는 것은 아닌지 물을 수 있는 부분이다.
<한겨레>는 2012년 10월에도 삼성 측에서 얻어낸 정보만으로 <삼성-백혈병 피해가족 첫 대화 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가 삼성 반도체 공장 백혈병 문제 해결을 위해 다산인권센터를 비롯한 20여개 단체로 구성된 ‘반올림’의 항의를 받은 바 있다.
물론 삼성을 둘러싼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사측의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하므로, 삼성 사측이 그러한 움직임을 보일 때 <한겨레>가 적극 보도하는 것은 공익에 부합하는 일일 수 있다. 삼성 사측 내부에서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을 것이므로 온건파의 입장이 승리하면 진보언론의 환영까지 받을 수 있다는 신호를 주는 행위일 수 있다. 그러나 진보언론이 그러한 역할을 하려면 삼성 측의 전향적인 반응을 다루는 것과 동시에 삼성 노동자들의 투쟁 역시 상세하게 보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보도는 진보언론의 노동 의제 보도의 약소함의 문제나 삼성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혹을 다시 한번 제기할 수 있는 상황이다.
진보언론의 기자들은 이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진보언론이 (삼성 눈치를 봐서 노조 파업 기사를 작게 쓸 만큼) 그렇게 주도면밀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라며 곤혹스러워 했다. 진보언론이 평소 노동 관련 이슈들에 대해 둔감했기에 나타난 현상이란 비판은 감수해야겠지만, 삼성 문제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랬던 것은 아니라는 해명이다.
진보언론의 한 기자는 “기본적으로는 세월호 참사 이후 이 사안에 대한 집중 때문에 다른 이슈에 신경을 크게 쓰지 못한 사정 때문이라고 본다”라고 설명했다. 진보언론의 사정을 아는 한 관계자도 “사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언론이 특정 기업의 문제를 크게 보지는 않는다. 기업들은 오히려 정치권력에 민감하기 때문에 차라리 진보언론이 정권교체를 위해 목을 맨다고 비판하는 쪽이 타당하다”고 설명했다.
그 관계자는 “가령 진보언론에 광고를 주지 않으려던 기업들도 2010년 지방선거에서 야권이 승리하자 다시 광고를 주게 된 경우도 있다. 2012년 대선의 정권교체 가능성이 생겼을 때 기업들은 이에 대해 반응했다”라면서 진보언론은 삼성보다는 오히려 정치권력의 교체에 민감할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이 문제가 ‘삼성의 영향력’ 때문에 생긴 것도 아니라면 한국 사회 주류 진보언론의 노동 문제에 대한 감수성과 공감능력이 너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 더욱 타당해진다. 염호석 지회장의 시신 탈취에서 많은 사람들은 1991년 5월 한진중공업 박창수 위원장 시신탈취 사건을 떠올렸다.
당시 <한겨레>는 경찰이 영안실 벽을 해머로 뚫고 들어가 시신을 탈취하는 사진을 지면에 실어 1991년 5월의 투쟁을 촉발하는 촉매 역할을 했다. 20여년 세월의 간극에서 권력자들의 행태는 반복되는데 변하는 건 진보언론의 감수성 뿐이라면 한국 사회에서 나이를 먹는 일이 서글퍼질 수밖에 없다.
21일 현재 언론들은 경찰 측이 도리어 시신운구를 방해한 혐의로 노동자와 활동가 3명에게 영장을 청구했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박근혜 시대 정부와 기업이 공모하는 노동 탄압의 현실에서 진보언론이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 20일 최근 숨진 채 발견된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센터 염호석 분회장의 유골함 운반 과정에서 노조원과 경찰이 마찰을 빚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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