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전 9시에 발표된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담화에는 세월호 참사 이후 34일 만에 이루어진 대통령의 대국민 직접 사과가 담겨 있었다. 그 외에도 열거된 내용을 보면 대통령과 정부가 민심 이반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느낄 수 있다.

필요하다면 특검 수용 의사를 밝힌 것, 여야와 민간이 참여하는 진상조사위원회를 포함한 특별법을 만들 수 있음을 밝힌 것 등은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및 책임자 처벌을 위해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자신을 죽이고 남을 살리는 영웅적인 선택을 한 희생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대통령이 눈물을 보인 것 역시 유가족들과 국민의 상처에 공감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높게 평가될 수 있다. 무엇보다 “최종 책임은 대통령인 저에게 있다”고 밝힌 것이 그간의 ‘유체이탈’ 화법의 시도를 벗어난 긍정적인 부분이라 평할 수 있다.
‘해경 해체’...‘재난 대처’도 ‘속도전’인가
하지만 전반적으로 열거된 내용은 ‘박근혜식 포퓰리즘’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만큼 두서가 없다. 대통령은 먼저 ‘해경 해체’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번 참사에서 드러난 해양경찰청의 사건 대처 능력을 보건데, ‘해체를 배제하지 않는 조직 개혁 및 재구성’이 필요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해체를 배제하지 않는 것’과 ‘해체를 선언하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행위다. 진상조사나 규명,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조직 개혁의 결론을 내린 것은 올바른 문제해결의 방식이라 볼 수가 없다.
결국 박 대통령은 ‘뭐라도 부수고 싶은 국민의 분노한 마음’이 자신에게 옮겨 붙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해경을 부수고야 만 셈이다. 해양경찰의 시험이 바로 내일(20일)이었다고 하는데, 시험을 준비하던 수험생들은 그야말로 ‘멘붕’의 상황에 처했다. 건설의 ‘속도전’ 때문에 재난이 일상화된 나라에서 재난 대비 방책도 ‘속도전’으로 처리한다면 과연 재난이 사라질 것인가.
이번 담화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인정한 대목은 그간 누리꾼들에게 비판을 받았던 ‘유체이탈’ 화법을 벗어났다는 점에선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번 담화에도 “이번 참사에서 수백 명을 버리고 도망친 선장과 승무원의 무책임한 행동은 사실상 살인행위”라는 지적이 들어갔다.
▲ 박근혜 대통령이 19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세월호 참사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이날 박 대통령은 해경 해체와 안전행정부 및 해양수산부를 대폭 수술하겠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유체이탈’서 돌아왔나 했더니 ‘도마뱀 꼬리 자르기’는 여전
대통령은 참사 직후에도 이와 같은 발언을 한 바 있다. 참사 직후 상황에서 이와 같은 발언은 재난의 책임에 대한 일종의 선긋기로 여겨졌고, 검찰 수사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도 충분했다. 실제로 검찰은 선장과 승무원들을 살인죄로 기소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정당한 법집행일 수도 있겠으나, 행정부 수장이 사법부 권한의 영역을 침해한 것으로 보일 것에 대한 우려는 없는가. 대통령의 이 발언에 대해 한국 언론이 아니라 미국이나 독일 등 외신 언론이 강도 높은 비판을 한 상황은 우리 언론의 사안에 대한 판단력을 성찰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다.
또한 대통령은 그런 이들에게 수백년 형을 선고하는 선진국의 사례가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사건 이후 누리꾼들도 이탈리아에서는 승객30명을 두고 혼자탈출해서 죽음으로 몰고 간 선장이 2900년형을 선고받았다고 분통을 터트린 바 있다. 하지만 이는 장삼이사나 누리꾼들이 분통을 터트리면서 할 수 있는 말이지 대통령은 대책을 제시해야 할 일이다. 형법 개정을 시도하는 것은 가능하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행 한국법 체계에선 수백년 형을 선고할 수가 없는데 그런 사례에 비교하면서 말을 하는 것은 너무나도 포퓰리즘적인 처신이다.
담화문은 이 정부의 처신이 단지 ‘국민의 대통령에 대한 분노’만을 방지하겠다는 의중에서 이루어질 뿐 문제해결의 의지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래서야 검찰의 세월호 승무원들에 대한, 청해진해운 실소유주 유병언 일가에 대한, 또 해경 간부에 대한 철저한 수사조차 곱게 보일 수가 없다. 설령 그것이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보수언론이 ‘구원파’ 문제 등을 보도하며 사태의 책임을 선정적인 보도로 흐리는데 일조하는 문제까지 겹친 상황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문제를 민관유착로 가져간 것 역시 책임 회피의 소지가 있었다. 이는 보수언론이 참사의 원인으로 보수정권의 ‘규제완화’가 지목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띄운 ‘관피아’ 규탄을 정부가 직접적으로 받아 안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지적된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본인들의 문제를 빼고 나온 대책이 과연 얼마나 실질적인 효과를 내며 실행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른바 ‘비정상의 정상화’, 공기업 개혁 담론이 드라이브를 걸 때는 민영화를 위한 규제완화를 반대하는 공기업 노조를 때려잡을 기세로 움직이다 문제가 발생하면 슬쩍 민관유착을 근절하는 규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눈가리고 아웅’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결국 대통령은 입으로는 ‘유체이탈’을 벗어놨으되, 여전히 몸의 차원에선 ‘유체이탈’을 실행 중에 있다.
중도파와 강경파 분리책, 운동세력의 대응은?
박근혜 대통령은 이 담화문을 국민들에게 던진 후 오늘 오후 예정된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순방 일정을 떠난다. 40시간에 불과한 일정이기에 굳이 취소할 필요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박근혜 정부가 달래려고 하는 국민이 ‘가장 분노한 일부’가 아닌 ‘분노가 옮겨붙을 지도 모르는 중도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황일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은 대선에서 ‘100% 대한민국’을 말했지만 통치에서 보여준 모습은 ‘51% 대한민국’에 만족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자신을 애초에 싫어하던 그 49%가 계속해서 화를 내야 51%가 유지될 수 있다는 계산을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대통령 담화문 전후 정황이 보여주는 것도 그런 ‘계산’일 수 있다.
지난 주말 동안 서울 도심에서 벌어진 시위에서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연행당했다. 보수정부에서도 5.18 전후의 시위에 대해선 비교적 관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상황이다. 시위에 참여한 이들은 “경찰들에겐 5월 18일이 아니라 대통령 담화문 발표 전날에 불과했던 것 같다”라고 꼬집는다. 특히 “가만히 있으라” 침묵시위의 경우 시위 방식의 특성상 전혀 위험할 것이 없었는데도 굳이 해산을 방해하고 연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 10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에서 청소년과 시민들이 '가만히 있으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고 정부의 무능함을 비판하는 침묵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쩌면 이는 박근혜 정부 측이 시위 탄압 문제에 있어서도 정무적인 판단을 하기 때문일 수 있다. 즉 ‘시민들에게 위험한 시위’를 막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정권의 지지기반에 위험한 시위’를 막고 싶은 것이다.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성난 외침이 아니라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들고 움직이는 침묵시위가 시민들을 더 울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명박산성’을 쌓아두고 시위대의 활동과 정권을 분리시키려 했다면, 박근혜 정부는 더욱 적극적으로 공권력을 활용하여 시위의 확산을 막고자 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선 시민사회 세력의 현명한 대응이 더욱 중요해진다. 소수가 거세게 흥분하는 것보단 다수가 냉정하게 화를 내는 것이 박근혜 정부에게 더욱 해가 되는 일이라면, ‘대통령 퇴진’ 구호를 가장 강하게 외치는 것이 급진적인 운동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의 입장으로는 대통령이 퇴진해야 할 이유가 너무나도 많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지만, 많은 시민들은 세월호 참사에서 새로이 정부의 책임을 느꼈고 현재 정부의 대응을 지켜보는 중이다. 그들의 발언을 이끌어내고 그들을 두려워하는 정부의 대응을 이끌어낸다면, 언젠가는 그들 역시 ‘대통령 퇴진’에 동의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과정 없이 그저 이 시국을 ‘대통령 퇴진’을 크게 외칠 호기로만 본다면 오히려 정권의 의도대로 강경파는 중도파와 분리될 수도 있다. ‘대통령 퇴진’을 외치는 이들의 활동의 자율성을 인정하더라도, 좀더 많은 시민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다른 차원의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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