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에 계란도 넣지 않은 청빈한 교육부장관을 칭송하던 청와대 민경욱 대변인이 이번엔 ‘유가족 감별사’로 나섰다. 민경욱 대변인은 9일 오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지금 (청와대 진입로에) 유가족 분들이 와 계시는데, 순수 유가족 분들의 요청을 듣는 일이라면 누군가가 나서서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입장이 정리가 됐다”며 “박준우 정무수석이 나가서 면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민경욱 대변인은 ‘순수 유가족’이란 표현의 의미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유가족이 아닌 분들은 대상이 되기 힘들지 않겠느냐는 말”이라며, “실종자 가족들이야 진도 팽목항에 계실 테니까 여기 계실 가능성이 적을 테고”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굳이 ‘유가족’ 앞에 ‘순수’를 붙이는 행태는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는 유가족의 배후에서 정치세력을 찾으려고 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또 KBS는 9일 김시곤 보도국장의 발언에 대한 해명을 담은 보도자료를 “"8일 조문을 하는 과정에서 이준안 취재주간이 일부 유족들에게 대기실로 끌려가 폭행을 당하고 5시간 가량 억류당하는 일이 발생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결국 김시곤 보도국장의 발언에 분개하여 합동분향소로부터 KBS로, 다시 청와대로 몰려온 유가족들은 ‘순수’하지 않고 ‘폭행’을 휘두른 사람들이 되고야 말았다.
▲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 28일 오전 춘추관에서 청와대 홈페이지 일시 불통 사태 등에 대한 경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제 오늘 유가족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러나 정황을 살피면 민경욱 대변인과 KBS 측의 상황인식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유족들이 KBS에 오자 새정치민주연합의 몇몇 국회의원들이 나와 KBS 측과 유가족 사이에서 중재안을 제출한 것은 사실이다. 유가족들은 김시곤 보도국장의 면담을 요구했지만 KBS 측이 이를 거부하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은 4층 보도본부장실 항의방문을 중재안으로 내놨다.
이에 KBS 측은 유가족들의 KBS 진입을 받아들이지 않고 임창건 보도본부장을 비롯한 스포츠국장, 해설국장 등이 내려와 대화를 시도했다. KBS 측은 대화 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은 모두 퇴장해 줄 것을 요구했고 의원들은 이를 수용했다. KBS 측의 요구는 매우 무례한 것일 수도 있었으나, 야당 의원들은 KBS 측이 그의 배석을 핑계로 면담을 거절할 경우의 후폭풍을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KBS 측이 유가족의 폭행을 우려해 김시곤 보도국장과의 만남을 주선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유가족 측은 굳이 언론사를 대동했고 JTBC 카메라를 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BS 측 임창건 보도본부장은 부하직원인 김시곤 보도국장의 발언에 대해 진위 여부를 파악해야 한다고만 답하는 등 성의없는 태도로 일관했다. 유가족대표단이 분위기가 험악해진 상황에서 JTBC 취재진의 입장을 요구해 취재를 하려고 하자 KBS 측은 굳이 이를 방해하여 몸싸움을 만들었다. KBS 측이 성의없는 답변으로 일관하자 유가족 측은 KBS가 유가족을 자극해 폭행 사건을 만들고 청와대로 가지 못하게 묶어두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추정하고 청와대로 이동했다.
유가족들은 스스로 폭행을 행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자제했고 중재안을 제시한 야당 의원들 역시 공을 내세우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설령 합동분향소에서 일부 유가족들이 폭행을 행사했다 하더라도 KBS의 보도행태와 그 기저에 깔린 인식을 보여주는 김시곤 보도국장의 발언에 대한 문제제기의 논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유가족들의 KBS 측으로 항의방문을 온 이후로는 자체적으로 대표단을 꾸리고 타 방송국 카메라를 대동하는 등 대화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KBS의 보도자료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김시곤 보도국장이 나와 해명할 건 해명하고 사과할 건 사과하면 되는 일이었다.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의 역할 역시 유가족들의 열망을 대변하고 조율하는 것이었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유가족들의 분노를 활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 8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KBS본관에 세월호 침몰 사고 유족들이 항의방문하고 있다. 이들은 세월호 희생자수와 교통사고 사망자수를 비교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진 KBS 모 국장의 해임 등을 요구했다. (연합뉴스)
보수세력, '순수'와 '폭력'에 집착하는 이유는...
2008년 촛불시위 당시 시민들은 ‘순수’와 ‘비폭력’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있었다. 시위상황에서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시위에 참여한 이들이 운동세력이나 시민사회단체의 조직과 무관한 ‘순수’한 군중임을 보여주어야 정부가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볼 때 착각이었지만, 당시 시민들이 한국 사회 보수세력의 논리를 알고 대비하였음을 보여준다. 한국 사회에서 정부 당국에 항의를 하면서도 비난을 받지 않으려면, 먼저 자신이 각종 정치세력과 무관함을 입증해야 하고 결코 폭력을 사용해선 안 된다.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세력이란 시민들의 정치적 의견을 수렴하는 역할을 맡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공권력과 시민의 사이에서 폭력이 발생했을 때 훨씬 더 자제해야 할 쪽은 시민이 아니라 공권력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그런 점에서 ‘순수’와 ‘폭력’에 대한 집착은 민주주의 체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국가의 의무를 방기하는 한국 보수세력의 철학을 드러낸다. 시민들이 즉자적 분노를 표출하든, 혹은 정연한 정치적 반대의견의 개진하든, ‘선동’, ‘배후’, ‘불순’, ‘폭력’ 등의 단어로 ‘양념질’하고 최후에 ‘종북’이란 이름의 ‘캡사이신’을 뿌리고 입을 막으면 그만이라고 믿는 지극히 반민주주의적인 통치철학이다.
난감한 것은 시민들이 제아무리 스스로의 ‘순수’와 ‘비폭력’을 강조한다 한들 계속해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보수세력은 시민들의 요구에 철저히 모르쇠를 하다가, 정당·운동세력·사회단체 등이 결합하면 ‘불순한 배후’를 발견하고 시위가 격화되면 ‘폭력’을 규탄한다. 제아무리 ‘순수하고 비폭력적인 시민의 항의’라도 그것을 지속하다 보면 ‘불순’과 ‘폭력’의 고리를 벗어날 수 없다.
2008년 촛불시위처럼 어제 대통령이 한 외교적 약속을 뒤집어야 하는 엄청난 일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한 방송국의 보도국장이 진정성 있게 사과하거나 사퇴하면 될 일이었다. 이런 일에조차 유족들의 항의에 중간에 있는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고 결국 유가족은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을 직접 대면하겠다고 나섰다.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에 있어 대통령이 호출되는 상황이 타당한 것은 아니나 중간에서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니 결국엔 대통령을 불러낼 수밖에 없다.
국가가 어찌 처신해야 할지 묻는다면...
그렇기에 민병욱 대변인의 ‘순수 유가족’ 발언은 보수세력의 통치가 탈정치를 조장하는 상황을 드러낸다. 그 발언은 대통령과 시민 사이의 공백과, 치부를 김추기에 급급한 책임지지 않는 권력집단이 된 거대한 행정부와 공영방송을 드러낸다.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체제의 재생산 구조를 통해 민주적인 권력을 산출하는 체계가 아니며, 그저 ‘좌파’라는 불순물들을 끊임없이 솎아내야 유지되는 일종의 정수처리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온전히 드러낸다.
불순한 것은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의 표출과 그것을 대변하려는 정치세력이 아니다. 사태의 정치적 해결을 꺼리고 책임지기를 거부하는 통치행위자다. 이 사실을 부정할 때, 그들은 끊임없이 정치적 반대파들을 ‘좌파’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선 정작 정치적 견해를 뜯어보면 시민들 중 한줌도 안 되는 이들만 ‘좌파’임에도, ‘좌파’라는 말 자체는 공론의 영역에서 너무나도 남발되곤 한다.
‘유가족’의 ‘순수’함을 청와대 일개 대변인이 검증하는 상황은, 그들이 여차하면 또 다른 ‘좌파’ 혹은 ‘종북’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국가의 권위와 신뢰가 그런 방식으로 얻어질 수 있을까. 박근혜 정부는 KAL기 사고의 일부 유가족들이 사건 발생 후 30년이 되도록 아직도 정부 발표를 전혀 믿지 못하고 테러리스트 김현희를 ‘가짜’라고 믿는 슬픈 역사를 21세기에도 되풀이할 것인지를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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